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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바깥이란......

작성자이강|작성시간16.08.09|조회수129 목록 댓글 0


종교에서 의미하는 시간은 물리과학에서 다루는 시간과 다르다.

우리는 시간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시간이 무언지 궁금하여 시계를 분해하여도

그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시간을 거센 물살, 고양이 발걸음, 쏜 화살, 눈 깜박할 사이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속도와 길이가 마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내면에 침잠하면 자신이 어떤 공간에

있는지 시간이 얼마큼 흘렀는지조차 모른다. 시간은 이처럼 마음의 변화와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종교적 시간은 다분히 심리적이고 인식적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은 두뇌는 반복적이고  습관적 기억(경험)은 압축하여

삭제시키기 때문에 시간의 길이는 짧아져 빨리 흘러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또 삼 년 전,

이 십 년 전 흘러간 시간은 모두 꿈결처럼 느껴진다.


우주에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으로  흐른다. 하지만 뱃머리에 서서 뱃전에 부딪치는 하얀 포말을

바라보면 시간은 미래(앞 바다)로부터 흘러와 현재에 거품을 일으키며 과거로 사라져 가는 것 처럼 보인다.

시간을 이렇게 수평 선형적으로 보지 않고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수직 상에  놓으면 과거-현재-미래는

동시적(同時的)이다.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있다"라는 현존감 속에 용해된다. 어두운 방안의 벽에 손전등을 비추면 밝은 테가

나타나고 나머지 부분은 어둠에 가려진다. 과거는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상상 속에 있지만  밝게 비친 현재만이

실재성을 가진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점이며 시간의 경계역(境界驛)이다.

현재와 연결되는 두 영역간의 질적 차이는 없다. 종국에 현재라는 시간도 없기에 과거심, 미래심, 현재심

모두 불가득 한 것이다.


상기, 회상, 현전, 재생은 과거의 한 순간이 현재에 되살아나 지속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과거의 상황을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신선하게 현재로서 경험하고 과거는 재현되었다.

과거의 기억은 '있는 그대로'로의 재생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감과 의미를 가지고 재창조되기도 한다.

단순한 졸업장이 찬란한 졸업장으로 능동적으로 현재에 살아난다. 과거는 중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 순간에도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죽은 자가 부활한 것이다. 


프루스트의 소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을 느끼면서

옛기억이 부활한다.


"마르셀이 부드럽게 적셔진 마들렌 조각을 한 숟갈의 차 속에 담아 입술에 가져갔을 때,

그의 온몸에 강렬한 행복의 감정이 흘러 퍼진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 보다는 나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특히 인도에는 시간과 연결된 역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 특정 시점을

밝히지 않고 한 때(一時)로 서술할 때가 있다. 여기서 '한 때'는 영원히 회귀한다는 초시간성을 가진다.

이는 순간이 영원화 된 것이다. 과거를 현재 속으로 데려와 재연한 것 처럼, 미래도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합격할 것이라는 예측과 기대로 미래는 현재화된다.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과 비전으로 미래를 지금 여기에서 경함한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실현되어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넘어 동시성을 띄운다.


인간은 시간성 속에서 보면 유한하다. 시간은 짧고 육체는 허물어져 곧 죽음을 맞는다.

시간의 파괴성, 종말성에 밀리면 인간은 단순히 사라지고 버려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허망하게 내던져

산화하면 허무하다. 현재라는 순간조차 끝없이 사라져간다. 그래서 덧없이 무상하게 소멸하기 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끊고 지속적 영원한 현재로 머무러야 한다.


변화와 차이를 거부하는데서 시간의 바깥, 무시간, 초시간성이 나온다. 시공과 인과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가라앉는다. 마음은 끝임없이 변화무쌍한 상태에 있다. 오고 가는 것, 일어나고 가라앉는 것, 태어나고

죽는 것은 마음이다. 늘 머무르고(시간의 지속성) 결코 변하지 않으며 아무런 속성들이 없는 것이 신의 시간이다.

시간의 바깥이란  부산함, 조급증, 성급함, 들떰, 산만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진다.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기쁨은 쾌락과 다르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으로, 쾌락과 즐김의

절정에 이른 뒤에 찾아오는 슬픔을 동반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금 여기서 경험되지 않는 것을

시간의 바깥이라 한다. 몰입과 창조, 사랑, 비전, 진리는 시간을 느끼지 않기에 시간을 초월한다.

깊은 사랑, 순수한 몰입이나 명상, 창조적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의 풍화에도 노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원은 무한히 잡아늘인

시간이라고 오해하는데 시간의 바깥이라 시간성이 없기에 영원처럼 느껴진다.


확실히 우리는 영원히 살 수가 없다. 다만 무시간, 영원한 현재로 살 수 있다. 시간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굴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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