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이론의 역사와 전망(변지연)

작성자유타란|작성시간00.12.31|조회수306 목록 댓글 0
화자이론의 역사와 전망
{내러티브} 창간호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수잔 랜서의 {시점의 시학}까지
변지연



1. 왜 화자(narrator)인가



화자 이론은 "모든 이야기에는 반드시 이야기하는 자가 있다"는 지극히 소박한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제법 진지한 어조로 꺼내기에는 좀 새삼스러울 만큼 이 진술은 자명한 것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소설을 읽을 때 이 누군가에 주목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흔히 우리는 밤하늘에 뜬 달은 보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도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자'를 나무란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달을 지시하는 자의 숨겨진 목소리는 간과한 채 그저 '달만 보는 자'라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경우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달도 볼 줄 알아야 하지만 달을 가리키는 자의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달을 지시하는 자의 의도와 전략까지 간파해 내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눈 앞에 벌어진 사태의 전모를 보다 잘 파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 서사물에 대한 20세기 이전의 관심은 전통적으로 이야기의 내용적 국면, 이를테면 등장인물의 성격과 가치관, 시대 사회적 배경과 사건의 추이 따위에 주로 치우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년 시절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런저런 민담들이나 초등학교 때 읽은 서양 동화들, 그리고 좀더 성장해서 읽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같은 소설들로부터 우리가 선사 받은 흥미와 감동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어렵잖게 추정되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채롭게 펼쳐지는 사건과 사건들, 이상적이라거나 독특하다거나 해서 매혹적인 인물들, 또는 그런 이야기들 속에 감춰져 있다고 짐작되는 '주제'라는 이름의 메시지,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는지. 평범한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야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법도 하지만, 19세기까지의 비교적 전문적인 소설 애호가들조차 대부분 '달의 빛깔과 생김새'에만 열중했다는 것은 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20세기 이후 서양의 뜻 있는 몇몇 부류의 문학 연구자들은 그러한 전통적 접근 방식의 한계를 진지하게 문제삼기 시작한다. 문학 텍스트를 '연구'한다는 것, 실로 그것이 소박한 감상 행위가 아닌 담에야, 기껏 허구적인 세계 자체에만 몰입해 있다든가 작가의 인생관이나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 정도를 논의하는 데 그친다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다분히 표피적인 접근 방식에 불과한 반성의 소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텍스트 해석에 있어서의 주관성 또는 인상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학 연구 방법론에 있어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강령 하나를 내세우게 된다. 하나의 텍스트가 창안되고 조직되는 세밀한 원리와 과정을 가능한 한 가장 촘촘하게 파고 들어가 볼 것. 텍스트를 구성하는 모든 세부들의 틈새를 최대한 비집어 볼 것. 그리하여 문학 텍스트가 지닌 심미성이나 인식론적 지평의 내밀한 형성 원리로서의 객관적인 틀을 저 심층으로부터 끌어올려 볼 것. 여기서 '그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 형식주의와 영미 신비평, 그리고 프랑스 구조주의를 개척하고 발전시킨 이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로 이들의 작업 속에서 서사학(narratology), 그리고 이 분야의 가장 핵심적 사안이라 할 화자 이론은 자연스럽게 싹트고 자라났던 것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을 내용과 형식 즉, '파블라(fabula)'와 '수제(sujet)'로 구분해 낸 러시아 형식주의, 이와 유사하게 소설을 '이야기(story)'와 '플롯(plot)'으로 나누고 이야기 현상에 일정한 '시점(view of point)'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해 낸 영미 신비평, 기존의 '파블라'와 '수제'의 개념에 힌트를 얻어 서사물을 '스토리(story)'와 '담론(discourse)'의 국면으로 분리하고 이를 토대로 서사학을 가장 밀도 있게 진전시킨 프랑스 구조주의, '실제 작가'와 '내포 작가', 그리고 '화자'를 구분하고 화자의 유형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미국의 W.부스, R.야콥슨의 '보는 자'와 '말하는 자'의 구분을 계승하여 전통적 시점 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화자의 개념을 한층 정밀하게 확립시킨 프랑스 구조주의자 G.주네트, 주로 기존의 서사학적 성과를 효과적으로 종합하고 화법의 다양한 양상들을 적절한 예시와 함께 효과적으로 해명하는 데 주력한 S.채트먼, G.프랭스, S.리몬-케넌, 그리고 화법이 등장인물의 심리와 욕망을 조절하는 방식이나 이데올로기와 관련되는 양상까지를 파고듦으로써 마침내 서사학에 정신분석적·사회역사적·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결합시키려 한 D.코온, P.브룩스, F.슈탄젤, S.랜서 등의 새로운 시도 등이야말로 필자가 거칠게나마 뽑아본 중대한 서사학적 성과들이다.

이에 본고는 이러한 서사학적 시도들 속에서 전개되어 온 화자 이론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다음 문제들을 재점검하는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에 있어서 화자는 정확히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 그것은 실제 작가와 실질적으로 얼마만큼이나 명료하게 구분될 수 있으며 독자는 그를 어떠한 방식으로 감지해 낼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그가 텍스트 내에서 발휘하는 기능과 영향이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인식론적·철학적 지평에 연루되는가? 이 물음들은 언어 서사물에 내장된 주요 창안원리의 하나로서 화자가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케 함은 물론, 한 발 나아가 텍스트의 해석과 평가에 있어 그것이 담당하는 실질적인 도구적 가치와 생산성의 정도를 타진해 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 혹은 현재에 대한 고찰과 진단이란 결국 미래의 전망에 그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화자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그 인식론적 함의



1)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 또는 '말하기'와 '보여주기'

R.바르트의 의사소통 모델이나 최근의 화행 이론, 그리고 바흐친의 대화론과 수용미학 등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공통된 암시는, 모든 언어적 표현과 발화를 그 자체로 독립되고 고정된 의미 영역이 아니라 일정한 상황적 맥락 위에서 수행되는 발화자와 피발화자 사이의 거래 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가와 독자, 화자와 수화자 간의 의사소통의 방식과 맥락을 전제하지 않는 한, 텍스트 분석은 공허하고 편벽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말하자면 그것은 텍스트를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의미구조로 대상화하고 그것의 내적인 형식과 구조를 분석하는 데 치중한 영미 신비평 식의 방법론에 대한 반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론의 출발이라는 것이 매양 그렇지만, 화자이론의 출발점은 다소간 놀랍게도 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제는 상식이 되어 버린 '디에게시스(diegesis)'와 '미메시스(mimesis)'의 구분, 즉 그의 {공화국} 제3편에 실린 소크라테스의 대화 제시 방법에 관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시인 자신이 발언자이고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기미를 보이지 않으려는" 이야기 방식으로서 오늘날의 용어로는 간접화법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그 반면 후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시인 자신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려는" 이야기 방식이며, 이른 바 '직접화법'을 가리킨다. 이 구분은 당초 서사의 차원이 아닌 단지 대화의 제시 방법으로 언급된 것이지만, 그것이 곧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의 문제, 즉 이야기하는 자가 듣는 자를 감응케 하고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의 문제를 최초로 건드려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화자 이론사에 있어 그 선구자적 의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고대 그리스의 양분법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19세기 말 이후 영미 비평계에서 '말하기 또는 설명(telling)' 대 '보여주기 또는 제시(showing)', 또는 '요약(summary)' 대 '장면(scene)' 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대립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한 번 흥미로운 논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 용어들은 애초에 대화의 기법으로서 논의되었던 디에게시스, 미메시스와는 달리 소설, 서사시 등의 문학적 서사물을 다루기에 적합하도록 얼마간 확장된 개념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요컨대, '말하기'가 화자의 중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 방식이라면, '보여주기'는 연극과 같이 사건이나 대화를 직접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화자는 사라지고 장면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이야기 방식이다.

그런데, 미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H.제임스가 "극화하라, 극화하라!"라는 유명한 문구를 통해 '보여주기'의 예술적 우월성을 선언하면서부터,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신비평가 P.러보크가 "소설의 예술이란 '보여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적극 주장함으로써 논쟁은 시작된다. 그들의 '보여주기' 예찬이란 곧 '객관적 진리'와 그것의 구현자로서의 작가의 권위에 대한 강렬한 의혹이자 단호한 거절에 다름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작가의 '설교' 따위는 듣기 싫다. 그러므로 차라리 작가는 사라지라! 아니 최소한 어딘가로 숨으라!." 이렇게 해서 영미 모더니즘 소설 창작의 이념적 배경으로 자리잡게 된 '보여주기'에의 추구는 이후 흔히 '의식의 흐름' 수법에 활용되는 '내적 독백'의 화법을 창출해 내게 된다. 화자에 의해 매개된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오로지 등장인물의 지각과 의식만이 직접적으로 보고되는 방식. 실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환상의 현대적 계승이자 헨리 제임스의 권고에 대한 가장 충실한 수행인 셈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벽두부터 영미 비평계의 다른 한쪽에선 이 '보여주기'의 신화를 과감히 깨뜨리고 나선 혁신적 저서가 출간된다. 바로 미국의 이론가인 W.부스의 {소설의 수사학(The Rhetoric of Fiction)}(1961)이다. 그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부스는, 모든 소설이란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독자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修辭)'임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언어 자체의 본질적 비유성이나 자의식적 글쓰기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일반화된 현 시점에야 이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주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설교'에 그만 지겨워진 독자들, 그리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노골적일수록 이야기의 환상성과 핍진감이 감해진다고 여긴 작가들이 다함께 '저자 지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당시,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재현이란 한낱 환상이며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부스의 주장은 '상식'을 깨뜨림으로써 진정한 상식을 재확인시킨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역자의 말마따나 이 저서는 "20세기 초부터 1960년경까지 소설 기법의 주류를 이루어 온 '객관적 서술'이라는 것의 허점을 지적하고 있는 소설론"이고, "작품이 하나의 자율적 구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작가의 의도와 심리 상태의 표현이고 역사적 현실의 구현이자 도덕적 철학적 진술"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을 증명함에 있어 부스는 '보여주기' 수법의 성공적인 예를 강조했던 러보크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이번에는 화자의 설명이나 논평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경우와 부적절하게 쓰인 '보여주기'의 부정적 효과를 예거해 보이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여주기' 신화에 대한 반발의 반대급부로서의 자리바꿈식 논리인 듯한 인상을 주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부스의 시도는 어디까지나 '말하기, 보여주기'의 소박한 이분법 자체, 그리고 '보여주기'의 우위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깨뜨리기 위한 일종의 간접증명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부스 자신도 고백했다시피, 양자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으며 오직 문제되는 것은 기법의 적절성의 여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에게시스를 미메시스에 통합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을 뒤집고 모든 것을 디에게시스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의도가 부스에게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확실히 그의 저서는 작가와 기법과 수사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 행위 자체에 대해 노골적으로 직면하려는 태도가 역력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부스의 시도는 모더니즘 소설이 숨겼던 저자를 다시 전면에 내세우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자의식적 글쓰기'와 그 핏줄을 같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시점(point of view)의 발견

하나의 문학 텍스트를 이렇게 작가의 기법이자 수사의 산물로서 관찰하게 될 때 연구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 중의 하나는 문학 텍스트의 조직 상태와 조직 원리, 그리고 그것이 독자에게 미치는 심미적 효능의 비밀을 추적하는 일이다. 이 소설은 도대체 어떻게 짜여졌길래 그토록 흥미롭거나 지루하며, 깊이를 지녔거나 천박한가? 지극히 소박한 어법으로 던져본 물음이지만, 사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 신비평, 구조주의 등의 예술 이론들이 상호간의 현저한 입장 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던져온 근본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화두를 쥐고 개척되고 발전되어 온 서사 이론, 그 중에서도 특히 화자 이론의 기점이라 할 만한 저서로는 H.제임스의 {소설의 기술(The Art of Novel)}(1907)과 신비평의 대표적 저서들 즉 P.러보크의 {소설의 기법}(1921), C.브룩스와 R.P.워렌의 {소설의 이해(Understanding Fiction)}(1943) 등이 있다. 물론 이 저서들에 상정된 화자의 개념이 아직 충분히 정밀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들이 적어도 화자의 존재와 시점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이론사적 의의를 인정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가령, 제임스는 소설에 작가를 대신하여 이야기의 진행과 발전을 관장하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중심의식(central consciousness)'으로 명명한다. 그 뒤를 이어 러보크는 "소설의 기술(craft)이라는 복잡한 문제 전체는 시점의 문제, 즉 화자의 스토리에 대한 관계의 문제에 달려 있다"라고 진단하고 극화법의 단계를 체계화한다. 그는 우선 시점을 크게 '1인칭 작중인물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3인칭 작중인물 시점, 3인칭 제한 시점', '심리의 완전 극화' 등으로 삼분하고, 후자로 올수록 '보여주기'가 완성됨을 강조한다. 특히 톨스토이나 새커리처럼 대체로 전지적 시점을 고수하기보다는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처럼 일정한 예술적 효과를 위해 적재적소에서 시점을 등장인물에게 양보하는 기교가 필요함을 예증해 보이고 있는 대목은, 시점의 서사적 효능에 대한 그의 선구적 이해수준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런가 하면 브룩스와 워렌의 {소설의 이해}는 이른바 '1인칭 관찰자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대한 자세한 해명을 통해서 시점 이론에 기여한다. 이 저서는 특히 오늘날 거의 교과서적인 분류법으로 알려져 있는 4분법 체계(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의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시점이 등장인물의 내부에 있느냐 외부에 있느냐를 일차적 기준으로 삼은 후 이것을 다시 스토리에 대한 시점자의 '참여도'에 따라 각각 이분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류법은 일찍이 제임스와 러보크가 언급한 '3인칭 제한 시점', 즉 3인칭으로 서술되면서도 시점이 등장인물 안에 있는 경우를 해명해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그 결함을 노출하고 만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난 결함은 역설적이게도 화자 이론사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즉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보는 역할'과 '말하는 역할'을 구분하지 못한 채 인칭의 대립에만 주목하는 시점 개념의 불완전성을 자각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 전환점에 다름 아닌 G.주네트가 있었다.



3) '시점'에서 '초점화(focalization)'로

G.주네트의 {서사담론(Discours du recit)}(1972)은 특정 소설 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보편적인 서사 이론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보여준, 그리하여 서사학 자체의 유효성을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실증해 보이고 있는 독특한 책이다. 특히 전통적 시점 이론의 한계를 맨 처음 짚어 내고 그 실질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화자 이론사에 남긴 그 공적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

저자에 따르면, 1인칭 회고소설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이 자신의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은 '보는 자'와 '이야기하는 자'의 명백한 분리를 드러낸다. 가령 한 낯선 사람을 본 사춘기 소년 마르셀과 몇 십년이 지난 뒤 이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즉 낯선 인물이 샤를르이며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전부 알고 있는 성인이 된 마르셀은, 설령 그들이 동일인물일지라도 둘 사이에 기능상 차이가 있고 특히 알고 있는 정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지각하고 인식하는 '경험의 주체'로서의 소년 마르셀과 그 경험을 '회상하고 이야기하는 주체'로서의 성인 마르셀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존의 시점체계들은 결코 이러한 분리를 설명해 내지 못한다. 이들에 따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로만 존재할 뿐, 소년 마르셀의 '시점'과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 시점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성인 마르셀의 '목소리'의 차이는 뭉뚱그려져 인지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네트는 이처럼 감별력이 미약한 '시점'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그 대신 '보는 주체 또는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초점화자(focalizer)'와 '이야기하는 주체'로서의 '목소리(voice)'를 분리시킬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 제안은 곧 다른 대부분의 서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 널리 적용되기에 이른다.

주네트에 따르면 초점화는 그것이 스토리와 관련되는 양상에 따라 크게 '비초점 서술'제로 '초점화', '내적 초점화', '외적 초점화'로 분류된다. '비초점 서술'은 화자가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는 소위 '전지적 시점'을 의미한다. '내적 초점화'는 화자가 정해진 등장인물의 눈에 비친 것만을 이야기하는 소위 '제한된 시점'으로, 이후 다른 이론가들에 의해 '인물에 속박된(character-bound) 초점화' 혹은 '작중인물-초점화자'로 칭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내적 초점화'는 다시 초점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는 경우와 여러 사람에게 배당되는 경우, 그리고 동일한 사건이 여러 사람의 초점에 따라 여러 번 서술되는 경우 등으로 나뉠 수 있다. 예를 들면, 헨리 제임스의 {대사들}의 모든 것은 주인공인 '스트레처'의 눈을 통해 이야기되는 '고정된 초점화'를,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은 처음엔 초점화자가 '샤를르'이다가 그 다음엔 '엠마'가 되며 종국에는 다시 '샤를르'로 돌아오는 '가변적 초점화'를, 그리고 R.브라우닝의 서사시 [반지와 책]은 하나의 범죄 사례가 살해자, 희생자, 피고 측, 기소자 측 등에 의해 연속적으로 인지되는 '복수 초점화'를 보여준다. '외적 초점화'는 화자가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적게 이야기하는 경우로서, 헤밍웨이의 {살인자들(The Killers)}처럼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을 전혀 알려주지 않고 '연기'만 하는, 이른 바 '관찰자 시점'을 가리킨다. M.발과 S.리몬-케논의 용어를 쓴다면 '인물에 속박되지 않은(non-character-bound) 초점화', 혹은 '화자-초점화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 '외적 초점화'에 대한 주네트의 설명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점화의 원칙인 등장인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인물 자체를 '향해서'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독자는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후에 발이 이것을 초점화의 한 종류가 아니라 '초점화의 부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런데 초점화의 양상에 대한 주네트의 분류는 엄밀히 말하면 '누구에 의해서 초점화되는가'의 문제, 즉 '초점화 주체(초점화자의 유형)'만을 다루고 있을 뿐 '무엇이 초점화되는가'의 문제, 즉 '초점화 대상'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공백을 발견한 발이나 리몬-케넌은 그리하여 초점화를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의 관계로 정의하고 양자의 결합이 지속적인지 가변적인지, 그리고 초점화 대상의 외적 측면만 드러나는지, 아니면 그 내부까지도 드러나는지의 여부도 면밀히 살펴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특히 발의 '초점화의 단계'에 대한 분석은 초점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인칭'의 구분만을 염두에 두는 시도의 어리석음을 실증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끈다. 사실 인칭의 대립을 통해 화자 문제에 접근하려는 태도의 문제점은 많은 논자들에 의해 자주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한 태도의 가장 큰 난점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1인칭 시점 또는 1인칭 서술'에서 '나'는 등장인물이면서 화자이지만, '3인칭 시점 또는 3인칭 서술'의 경우 '그, 그녀'는 단지 등장인물일 뿐 화자는 아닌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주네트 역시도 "화자란 자신의 서술에서 언제나 '1인칭'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1인칭 서술'이니 '3인칭 서술'이니 하는 용어들의 사용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발의 '초점화 단계'에 대한 논의에서 한층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다음 세 문장의 예들을 살펴보자.

? "메리는 항의 집회에 참석한다"라는 문장에서, 초점화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외적 초점화자이고 초점화 대상은 '메리가 항의집회에 참석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은 초점화자와 초점화 대상의 쌍이 하나뿐이므로 '단일 초점화'이다. 그러나 ? "나는 메리가 항의집회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의 문장에서, 초점화 대상은 ?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초점화자는 '이중화'되어 있다. 발이 보기에 이 문장은 '나'라고 명명된 내적 초점화자 외에도 그 '나'의 경험 내용 전체를 바라보는 누군가 즉 외적 초점화자가 따로 존재한다. 이는 ? "미셀은 메리가 항의집회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은 내적 초점화자가 '나'에서 '미셀'이라는 이름의 인물로 바뀌었을 뿐, '외적 초점화자→내적초점화자→초점화 대상'으로 분석되는 이중 초점화의 양상은 ?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분석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초점화 양상에 있어서 1인칭 서술과 3인칭 서술이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1인칭 서술일 때 외적 초점화자는 초점화를 일단 내적 초점화자에 양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내적 초점화자의 시각이란 어디까지나 외적 초점화자의 시각 내에서 일어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시점을 반영하려는 사람은 그가 그 사람의 시점을 아는 한도 내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T.토도로프가 일찍이 '소설 속의 나'와 '담론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를 구분하고 "문학적 서술에서는 오직 '3인칭'이라는 인칭 범주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단정지은 바 있듯이, 발의 분석은 '진정한 화자란 궁극적으로 언제나 1인칭이며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극화된 화자는 항상 3인칭일 뿐'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3. 화자의 개념과 유형



1) 실제 작가, 내포 작가, 화자

'시점'을 이처럼 '초점화'로 대치시키는 일은, 화자의 개념과 역할을 '보는 자 또는 경험하는 자'의 그것으로부터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설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초점화자와 구분되는 화자의 개념은 어떤 것이며, 그는 정확히 작가와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저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까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 저서야말로 하나의 소설을 쓰거나 읽는 행위를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 체계로 바라보고 화자의 문제를 비교적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최초의 서사 이론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저서가 서사 이론에 공헌한 핵심적인 것의 하나는 뭐니뭐니 해도 '실제 작가'와 '내포 작가(the implied author)', 그리고 '화자'를 구분했다는 데 있다. 부스는 이 저서에서 실제 작가와 화자의 거리는 물론 내포 작가와 화자 사이에도 뚜렷한 경계선을 그어 보이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내포 작가는 "실제 작가가 특정한 소설을 쓰면서 만들어낸 자신의 '제 2의 자아'"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실제 작가와 내포 작가의 불일치가 암시되어 있다. 예컨대 작가는 실제 자신의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상이나 정서를 소설에 표현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쓰는 서로 다른 작품마다 역시 상이한 사상과 정서를 담을 수도 있다. 설령 작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소설화하고자 한다 셈치더라도 그 자신과 그의 '제2의 자아'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존재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작가의 제2의 자아로서의 내포 작가란 결국 '텍스트 전체의 규범과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발은 이러한 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게 있어서 내포 작가는 어디까지나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일 뿐 의미의 근원으로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제 요소들에 대한 독자의 관찰과 추측을 통하지 않고서 그것이 감지될 길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리몬-케넌이 내포 작가를 선험적이고 고정된 의미가 함축된 '작가의 제2의 자아'로서보다 "텍스트의 모든 성분들로부터 독자에 의해 추측되고 집성된 하나의 '구성물'"로 보는 쪽을 선호하는 것도 이 점에 연유한다.

그렇다면 부스에게 있어 화자는 어떤 존재일까.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을 상당히 섬세하게 인식해 낸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든, '그'든 이야기하는 한 사람의 의식을 통과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연극에서조차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것이 누군가에 의해 서술된다. 소설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우리는 하나의 경험하는 주체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경험하는 그의 견해가 우리와 사건 사이에 끼어들게 된다. {살인자들}처럼 그러한 '나'가 없는 경우, 경험이 없는 독자는 그 이야기가 중재 없이 전해진다고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화자에게 아무런 개인적 특성이 주어져 있지 않더라도 작가가 하나의 화자를 이야기 속에 설정하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이미 중재되고 있는 것이다. 굵은 글씨는 필자의 것임


인용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작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곧 그가 자신의 대리인인 화자의 '중재'를 통해서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작가는 자신이 의도하는 이야기의 성격과 주제와 예술적 효과에 따라 그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유형의 화자들을 기용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부스는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의 화자들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극화된 화자'와 '극화되지 않은 화자', '관찰자로서의 화자'와 '행위자로서의 화자', '자의식적 화자'와 '그렇지 않은 화자', '신빙성 있는 화자'와 '신빙성 없는 화자', '전지적 화자'와 '제한적 화자' 등.



2) 화자의 여러 가지 유형

부스가 서술 효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로 내세우는 것은 '화자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극화되어 있느냐(극화된 화자)' 아니면 '화자가 신념이나 특성을 작가와 공유하느냐(극화되지 않은 화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화된 화자' 중에는 단순한 '관찰자로서의 화자'도 있고, 사건의 진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행위자로서의 화자'도 있다. 또 필딩의 {톰 존스}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스스로를 작가로 의식하고 있는 '자의식적 화자'가 있는가 하면, {허클베리 핀}처럼 작품을 쓴다는 일에 대해 말을 극히 적게 하거나 까뮈의 {이방인}처럼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화자'도 있다. 그리고 내포 작가, 화자, 다른 작중인물, 독자 등 네 사람 사이의 '거리'에 따라 '신빙성 없는(unreliable) 화자'와 '신빙성 있는(reliable) 화자'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화자는 도덕적·지적·신체적·시간적 측면에서 내포 작가나 그가 하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과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독자의 일반적 규범과도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이 거리는 화자의 의도적인 거짓말에 의해 생기는 수도 있겠으나, 사태의 실상에 대한 화자 자신의 인지 결여로부터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밖에도 부스는 엄격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지닌 화자(전지적 화자)와 현실적 시각과 추측에 국한되어 있는 화자(제한된 화자)도 다루고 있다.

그런데 화자의 유형에 대한 부스의 설명은 그 나름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다소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것을 텍스트 전체의 구조 속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규명할 방법은 없을까? 그 가능성을 주네트가 보여주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크게 화자가 속해 있는 '서술의 차원(Narrative Levels)'과 '스토리에의 참여 범위'를 기준으로 화자의 유형을 가르고 있다. 그런데 스토리에 참여하는 '동종화자(homodiegetic)'와 참여하지 않는 '이종화자(heterodiegetic)'에 대한 후자의 논의는 부스도 이미 행한 것으로 별로 새로울 것은 없는 논의이다. 그러나 화자를 서술 수준과 연계시키는 전자의 논의는 분명 주네트가 화자 이론에 새롭게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서술 수준에 있어서 화자가 자신이 서술하는 스토리보다 상위에 있으면 '스토리 외적 화자(extradiegetic)'이고, 화자가 자신이 서술하는 스토리 내의 작중인물이면 '스토리 내적 화자(intradiegetic)'이다. 이때 전자가 '1급 화자'라면 후자는 '2급 화자'인데, 스토리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3급, 4급 화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몇 겹으로 이루어진 액자소설의 경우 각 서술 수준들의 화자들은 원칙적으로 그 수준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어 있다.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가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 중의 한 주인공인 '알리바바'와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그건 확실히 넌센스일 것이다. 그러나 주네트는 '겉 이야기'의 화자인 '트리스트람'이 탈선하여 '속 이야기'의 아버지께 낮잠을 주무시라고 요청하는 {트리스트람 샌디}나 피란델로의 희곡인 {저자를 찾아나선 여섯 등장인물}과 같이 역전되고 극단적인 형식도 존재할 수 있음을 귀띔하고 있다.



3) '화자성(narratorhood)'의 스펙트럼

S.채트먼의 {이야기와 담론(Story and Discourse)}은 저자의 독창적인 이론보다는 주로 기왕의 서사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저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이 책에는 논쟁거리가 될 만한 저자 특유의 화자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단적인 예로는 부스의 서사 이론을 토대로 그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기호학적 소통 모델을 들 수 있다.








이 모델은 우선 '실제 작가'와 '실제 독자'가 서사 거래의 장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텍스트 상에서 각각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라는 대리인에 의해 위임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화자'와 '수화자'에만 유독 괄호가 부여되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양자가 여타의 참여자들과 달리 선택적 요인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채트먼의 도식은 텍스트 내에서의 화자와 수화자를 경우에 따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채트먼이 '화자성(narratorhood)의 부정적 극점'을 '최소한으로 서술된(minimally narrated)' 것이 아닌 '서술되지 않은(nonnarrated)' 이야기로 지칭하고, 이런 종류의 전달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언하고 있는 데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즉 그는 화자의 중재를 느낄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소위 '화자성(narratorhood)의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그 한쪽 극점에 해당하는 '화자성의 부정적 극점'은 '순수한 보여주기'의 극점으로서 작중인물의 언행과 생각이 극화되거나 대화, 일기, 편지 등이 인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의 극점인 '화자성의 긍정적 극점'은 화자가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순수한 말하기'의 극점으로, 화자가 대명사 '나' 같은 것을 사용하여 해석하거나 관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채트먼은 이처럼 예외적인 극점들보다는 양자 사이에 내포되어 있는 '숨은 화자'와 '드러난 화자'의 보편적 스펙트럼 속에서 담론의 차이가 찾아져야 함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가 작성한 '드러난 화자'의 스펙트럼은 배경묘사→시간적·공간적 요약→등장인물이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보고→논평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숨은 화자'에 의한 서술은, 독자에게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분명히 들려주면서도 정작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담론의 그늘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흔히 '간접화법'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이것은 화자의 중개나 해석적 장치를 드러내긴 하지만, 화자가 숨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령 "존은 돌아오겠다고 말했다"라는 문장에서 화자가 숨어 있는 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보고동사인 '∼고 말했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깊고 활기차고 쾌활한 콜리의 목소리를 들었다"의 경우 밑줄 그은 부분은 과연 누구의 언어인가? '그'의 것인가, 아니면 숨은 화자의 것인가?



4) 부재하는 화자?

그런데 이러한 채트먼의 논의는 곧 부분적으로 리몬-케넌에 의해 반박당하게 된다. 즉 그의 {소설의 시학}은 채트먼의 소통모델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채트먼이 서사 거래의 장 내부에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을 겨냥한다. 내포 작가가 하나의 구성물에 불과하며 목소리도 없고 직접적 소통수단도 없다면, 이러한 내포 작가에게 소통 상황 내에서의 송신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용어상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내포 작가가 철저하게 실제 작가와 화자와 구별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비인칭화되어야 하며, 발언자나 목소리로서보다는 일종의 내포적 규범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내포 작가와 내포 독자는 결국 서사 거래의 장에서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채트먼의 도식에 대해 리몬-케넌이 내비치는 또 하나의 불만은, 그것이 화자와 수화자를 소통 상황의 선택적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야기에는 항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떤 서사물의 텍스트가, 순수한 대화의 대목들이나, 병 속에서 발견한 원고나, 잊혀져 있던 편지나 일기를 제시할 때에도 이 담화의 발언자나 필자 외에 그 대화의 인용이나 글로 씌어진 기록의 복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상위의 서술상의 권위자가 있는 것이다. 부재 화자와 현존 화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채트먼의 양분법 대신, 나는 텍스트 내에 존재하는 화자를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느냐 하는 정도나 형식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굵은 글씨는 필자의 것임


필자가 보기에 리몬-케넌의 이 진술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자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도 엄격한 정의이다. 그의 말마따나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은 순수한 '보여주기' 또는 '객관적 서술'의 극치라 해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대화 역시 누군가에 의해 '인용'되어 있는데 이 '누군가'야말로 화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은연중 그는 과거에 대한 스스로의 지식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적 발언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현존을 들키게 되어 있다. 설령 서술이 철저히 극화되어 등장인물의 '내적 독백'의 형식으로 나타날지라도, 그리고 나아가 단지 발견된 일기나 편지의 형식으로 제시될지라도, 여기에는 최소한 그것을 '옮겨 적고' 있는 누군가의 중재 행위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몬-케넌은 부스 이래 자주 언급되어 온 화자의 '신빙성' 문제도 좀더 꼼꼼히 따지고 든다. 그 동안 대부분의 논자들은 화자의 신빙성의 여부를 내포 작가의 가치기준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로 설명해 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같은 설명이 납득할 만한 것으로 인정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케넌은 묻는다. 화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내포 작가의 가치기준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물론 그 역시도 내포 작가의 가치규범과 화자의 그것 사이의 간격을 지시하는 텍스트 내의 다양한 요소들을 제시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신빙성 없는 발언'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경우라는 것이 존재하며, 실제로 화자의 신빙성 여부를 간단히 결정하기가 어려운 텍스트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을 그는 간과하지 않는다. 예컨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에 나오는 가정교사는 일단 귀신들린 두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빙성 있는 화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자신의 환각의 세계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하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신경증 환자로 간주해서 안 될 이유도 딱히 없는 것이다.

리몬-케넌의 이 같은 지적들은 왠지 우리에게 화자 이론과 서사학, 나아가 구조시학 전체에 대한 희망과 절망 모두를 한꺼번에 예견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구조시학이 한층 섬세한 분석의 잣대들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하자면 무슨 신념에 찬 각오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케넌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서사학을 포함한 구조시학 자체가 운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백'을 그 스스로 헤집는 작업의 시발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잔뜩 뒤덮인 모래더미를 헤치고 가까스로 '구조'와 '체계'라는 단단한 철근을 들춰냈으나, 그 철근들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 모래들의 비의까지는 어떻게 해 볼 길이 없다는 자괴감 같은 것, 그런 불안한 예감을 그는 어느 순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4. 화법의 종류와 그 서술적 효과


1) 간접화법, 자유간접화법, 직접화법, 자유직접화법, 카메라의 눈

지금까지 우리는 화자 이론의 출발점인 시점의 문제로부터 화자의 개념과 유형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구자들의 고찰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직 다루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바로 '화법(mood)'의 문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를 근간으로 논의되고 개발된 것으로, 서술 정보를 조정하기 위해 화자가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발화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을 일컫는 용어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통해 느끼는 화자 개입의 정도나 화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는 종국에는 텍스트 표면에 구현된 이 화법의 양상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영미비평의 '말하기' 대 '보여주기' 논쟁 이후의 화법에 대한 구체적 고찰은 아마도 주네트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사담론}은 '등장인물의 발화된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전달되는' 몇 가지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다음 예문들은 화법들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예시하고 있는 문장들이다.



1 나는 알베르틴느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어머니에게 알려 드렸다.

2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알베르틴느와 결혼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3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알베르틴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다.

4 나는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 알베르틴느와 결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이 절박했다.

5 나는 어머니에게 "알베르틴느와 결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에요!"라고 말했다.

6나는 '알베르틴느와 결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야!'라고 생각했다.

7 알베르틴느와 결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숙명이야.

위의 일곱 개의 문장들 가운데 1∼7는 화자가 등장인물 '나'의 발화나 생각을 인용부호 없이 자신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간접화법(indirect discourse)'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에도 약간의 차이들은 존재한다. 1은 '서술된 발화(narratized or narrated speech)'로서, 주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보자의 음성은 가장 크고 정보의 양은 가장 축소된' 간접화법이다. 2와 3은 '전달된 발화(transposed speech)'인데, 1보다는 더 모방적인 편이나 발화된 말을 크게 실감나게 전하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다만 2는 발화된 상태를, 3은 내적 언어를 가리킨다는 점만 서로 다를 뿐이다.4는 최근 서사학자들 사이에 부쩍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 또는 '서술된 독백(narrated monologue)'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화법은 전달 행위의 표징인 보고동사가 간헐적으로 결여되어 화자와 등장인물의 언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특징을 지닌다. 가령, ?의 두 번째 문장은 누구의 언어인가? 등장인물인 '나'의 것인가, 화자로서의 '나'의 것인가? 보고동사의 결여는 이를 은근히 등장인물의 것인 양 느끼게 만든다. 말하자면 화자의 언어가 등장인물의 언어에 감염된 상태. '자유간접화법'은 이렇듯 미묘한 포즈로 '직접화법'으로 가는 길목에 가로누워 있다.

또 5와6은 화자가 등장인물의 발화와 생각을 인용부호로 묶어 극적인 형태로 보고하는 '직접화법(direct discourse)'의 예를 보여준다. 화자가 등장인물에게 발언대를 그대로 내어 주는 그야말로 가장 모방적인 형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화자의 자취를 완전히 숨기고 있지는 않는데, 보고동사와 인용부호의 사용이 그 결정적 표징이 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화자의 목소리를 완전히 지워 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7이다. 아무런 인용부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의 생각과 인식, 그리고 그가 행하고 취하는 행동의 질서에 따라 계속되는 서술 형태. 이것은 흔히 '의식의 흐름 수법'의 주요 특징으로 알려져 있는 '내적 독백(interior monologue)' 또는 '자유직접화법(Free direct Discourse)'이라는 것으로서, 자유간접화법과 더불어 모더니즘의 모방 우위의 신념이 개발해 낸 산물로 널리 평가받고 있는 화법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그 명칭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직접화법인 '내적 독백'은 보고동사를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간접화법인 '자유간접화법'은 기본적으로 보고 동사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전자가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 언어는 근본적으로 '발화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후자는 언제나 화자의 발화 또는 전달 행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전자가 '스토리 내적 화자'에 의한 1인칭 서술의 형태를 띠는 데 비해, 후자는 '스토리 외적 화자'가 3인칭으로 지칭되는 등장인물을 초점화하여 서술하는 형식일명 '3인칭 제한 시점'을 취한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환기시켜 준다.

독일의 서사학자인 F.K.슈탄젤은 '자유간접화법'을 이른 바 '권위적(authorial) 서술상황'에서 '인물적(figural) 서술상황'으로의 전이의 중요한 징표로서 진단해 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화법은 문법학자들에게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상호 경쟁 현상이며, 문학 비평가들에게는 '화자의 관점(perspective)'과 '등장인물의 관점'이라는 이중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서술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기존의 논의들이 한결같이 '3인칭' 소설만을 근거로 이 화법을 설명해 왔다는 사실이다. D.코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유간접화법'이 1인칭 회고소설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 자아만 완전히 강조되고 서술 자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자아에 전적으로 감정이입되기만 한다면, 자유간접화법은 1인칭 소설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슈탄젤 자신도 인정하듯 이런 경우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닐 듯 싶다. 현재의 서술 자아로 돌아오지 않는 과거 회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의 주장은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적용 가능한 논리일 뿐이다.

어떻든 '자유간접화법'이 '말하기'에서 '보여주기'로 넘어오는 과도적 단계라 한다면, '내적 독백'은 마치 '보여주기'의 완전한 실현인 것처럼 보인다. 한 개인의 내면 세계가 불가피하게 언어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언어를 매개로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흡사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그것은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내적 독백'과 견주어 봄 직한 또 하나의 '보여주기' 실험의 산물이 있다. 바로 프랑스 누보로망 주자들이 개발해 내고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에 특히 잘 구현되었다는 '카메라의 눈(camera-eye)' 기법이다. "카메라의 렌즈가 피사체를 포착하듯 주관이 극도로 배제된 냉정한 관찰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제시하는 방법." '내적 독백'이 1인칭 화자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이 기법은 철저히 사물의 '외피'만을 보여주려 애쓴다는 특징을 지닌다. 화자는 물론 초점화자까지도 철저히 스토리의 바깥에, 그것도 거의 인격성이 제거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내적 독백'에의 의혹, 혹은 '간접화법' 다시 호출하기

하지만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라는 이들의 시도는 알고 보면 고도의 '착각' 아니면 '능청'일 뿐이다. 그래서 미국의 이론가인 D.코온은 그의 {투명한 마음}(1978)에서 '내적 독백'에 의한 '의식의 흐름' 수법이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기법이라고 믿는 모더니즘의 관점에 반격을 가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그토록 명료하게 언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의식은 인간의 정신 영역 전체에 있어서 지극히 표층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 근저에는 그것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백'은 의식의 명료한 반영이기보다는 오히려 무의식과의 갈등의 산물이며, 심지어는 무의식의 진실을 방어하고 위장하려는 자아의 허위의식의 표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더군다나 그것은 사태의 전모를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가령 J.조이스의 {율리시즈}의 [페넬로페]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은 더 이상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한 여인의 몽롱한 성적 환상과 주관적 넋두리일 뿐이다. 그래서 코온은 모더니스트들이 실제 이상의 과도한 가치를 매겨 명명한 '의식의 흐름'을 '인용된 독백(Quoted Monologue)'이라는 명칭으로 대신함으로써 그 개념을 축소시켜 버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모더니스트들에게 외면 당해온 '말하기' 기법은 오히려 '내적 독백'이 지니지 못한 미덕을 소지하고 있다. 코온이 특히 '심리 서술(Psycho-Narration)'이라 이름 붙인, 즉 화자의 적극적인 중재로 심리가 설명되는 방식은 화자가 자신의 맘대로 시간을 연장하거나 줄일 수도 있고, 등장인물과의 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정함으로써 그의 심리를 보다 다각적이고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 여기서 화자는 등장인물에 대해 이런저런 태도를 취할 수도 있고, 무의식의 세계조차 상징적 수법을 동원하여 의미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코온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부스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은가? 내적 독백으로 대표되는 '보여주기' 뒤에 어차피 작가의 주관적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그것이 궁극적으로 '말하기'의 한 전략에 불과하다면, 화자의 목소리가 설령 '또랑또랑하게' 들린다 한들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나 부스가 그러했듯이 코온 또한 맹목적인 '말하기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보여주기'의 장점과 허구성도 알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권위적 서술'이 부적절하게 사용될 때의 헛점 또한 명백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서 말한 '심리 서술'의 장점과 '인용된 독백'의 직접성이라는 장점 모두를 끌어모아 그것을 효과적으로 구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눈에 띈 것이 '자유간접화법', 그가 붙인 명칭으로는 '서술된 독백(Narrated Monologue)'이다. 특히 그는 하나의 텍스트에 이 화법을 '심리 서술'과 병행하여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등이 그런 경우이다. 화자가 스토리의 바깥에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등장인물의 내부로 들어가 그의 눈에 비친 것을 묘사하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목소리는 한 번도 숨어본 적이 없으면서, 필요할 때마다 등장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하는 방식. '보여주기'의 완성도로 치자면 '서술된 독백'은 '인용된 독백'보다는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지만, 코온에게는 전자가 후자보다 오히려 설득력 있는 이야기 방식이 된다. 혹자의 지적대로 이러한 코온의 관점이 저자의 서술을 부활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당한 연관을 가지는 것임은 물론이다.



5. 맺음말:화자 이론이 걸어온 길과 새로 낼 길


서사학의 토대로서의 구조시학의 목표는 본시 문학 작품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작품 해명의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해 보자는 데 있었다.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인상비평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구조주의자들은 개별 작품, 그것도 몇 편의 짧은 시들에 대한 분석에 치중했던 신비평주의자들의 '단견(短見)'에 불만을 금치 못했다. 그들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그리고 제 장르와 개별 작품들을 아우르는 문학 현상 전체를 떠받치는 거대한 '틀'을 발견해 내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R.야콥슨의 '서사'와 '담론'의 구분이었고, T.토도로프의 '시점'과 '화자'의 분리였다. 그리고 그 뒤를 좇아 W.부스, G.주네트, K.F.슈탄젤, M.발, D.코온 등의 진지한 연구들이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이들의 성과들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이 창작되는 데 얼마나 복잡한 궁리들이 요구되는가를 알게 되었다. 예컨대, 작가가 특정한 유형의 화자를 설정하고 그로 하여금 이야기를 끌어가도록 유도하는 방법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화자를 스토리의 밖에서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등장인물의 하나가 되어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화자로 하여금 권위적으로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일부분만 아는 척 시치미 떼고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등장인물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가능한 한 철저히 숨게 할 것인가. 화자의 말투와 태도는 어떤 스타일로 정하는 것이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의 화법으로만 밀고 나갈 것인가, 독자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몇 가지 화법을 자연스럽게 섞어 말하게 할 것인가 등등. 소설 창작에 이런 무수한 질문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구조시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방법론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은 개별 텍스트들 사이, 그리고 문학 텍스트와 비문학 텍스트 사이의 '차이'들을 비집어 내는 데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텍스트에 함축된 철학적·역사적·이데올로기적·심미적 국면 등을 놓치기 쉽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서사학의 생애에는 단지 그것의 탯줄이라 할 '과학'만이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차라리 '언어'의 운명 쪽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작가의 글쓰기 전략은 단지 진공 속의 '기술(技術)'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역사와 철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말하기' 대 '보여주기' 논쟁의 근저에 깔려 있는 언어관과 세계 인식의 문제들, 그리고 담론의 양상을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계시킨 슈탄젤, 코온의 분석이 이를 증명해 준다. 서사 전략이란 결국 사회·역사적인 배경을 지니는 것이며 이념과 철학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서사의 문제를 단지 언어의 문법적인 운용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인 것처럼 보인다. 서사학에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는 P.브룩스,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시점과 서술을 설명하려는 S.랜서의 작업이 바로 그런 예들이다. 브룩스는 {플롯을 따라 읽기(Reading for the Plot)}(1984)에서 소설의 플롯을 단지 작가의 전략의 산물로서보다는 한 단계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한 편의 소설을 쓰거나 읽는 일은 마치 에로틱한 유희와도 같다. 쾌락의 충족을 늦추기 위한 탈선과 반복이 성행위인 것처럼, 소설은 "종결을 늦추기 위한 탈선과 반복"이라는 것이다. 또 랜서의 {시점의 시학(The Narrative Act)}(1981)은 서사 담론을 이끄는 주요 인자들로서 화자의 성차(gender), 화자의 권위를 위한 토대, 작가의 상황과 신념 등을 꼽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저자의 관심이 화자의 존재를 넘어선 '허구 외적 목소리'까지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화자를 무조건 작가로부터 분리시키는 태도로부터 일탈하고자 한다. 어떤 조건 내에서 화자는 확실히 작가의 목소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이다.

어느 구석에선가, 아주 조그맣게, 서사학의 죽음에 관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신비평의 방법론을 완전히 휴지통에 버린 것이 아니듯, 아니 한편의 시를 분석하는 데 그것이 여전히 적잖은 유효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서사학은 이미 그 자신만의 영구적인 도구들을 굳건히 마련해 두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욕망과 이데올로기, 사회와 역사와 철학의 영역으로 스스로를 부단히 확장시켜 나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서사학은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기약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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