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613-4 서울 용산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 - 서울 효창공원/고대/정릉/의릉/선농단 등 ☆
☆ 20260613-4 서울 용산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 - 서울 효창공원/고대/정릉/의릉/선농단 등 ☆
◇1. 전쟁기념관(戰爭記念館) The War Memorial of Korea : 전쟁기념관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용산기지)에 위치한 국립 박물관이다. 1989년 육군본부가 충청남도 계룡시의 계룡대로 이전하면서 남겨진 부지에 세워졌으며, 1991년에 착공하여 1994년 6월 10일에 개관했다. 박물관 부지는 본래 용산기지의 일부이며 과거 일본 조선주차군 제20사단 예하 보병 제79연대 병영이 있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접수했고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육군의 제7보병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창설되었다. 야외전시장 한켠에 사단 창설 기념비들이 남아 있다. 박물관 앞 광장에는 6.25 전쟁 당시 유엔군사령부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도와준 16개 병력지원국과 6개의 의료지원국 국기와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 육군/대한민국 해군 및 대한민국 해병대/대한민국 공군 부대 깃발들과 대한민국이 외국에 파병한 부대기도 걸려 있다. 이름 그대로 한국 관련 전쟁들이 메인 테마인 박물관으로 야외에는 각종 항공기, 장갑차량, 화포가 전시되어 있다. 전쟁기념관은 상당히 희귀한 군사 유물이 많은 곳이다. 대표적으로 B-52 폭격기(기체번호 55-0105의 B-52D)는 미국 본토를 제외하고는 전 세계 국가 중에서 딱 세 군데(영국. 호주)만 전시하고 있다.[6] 전시중인 B-52의 위치들 하나는 영국 덕스포드(Duxford)의 덕스포드 제국전쟁박물관(IWM Duxford)에 전시 중인 기체번호 56-0689의 B-52D이고, 다른 하나는 호주 다윈(Darwin)의 다윈 항공 박물관에 전시 중인 기체번호 59-2596의 B-52G,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기체번호 55-0105의 B-52D이다.(한국에 파견된 독일 적십자 야전병원은 1954년 5월부터 1959년 3월까지 24만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나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지원이 이뤄졌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국방부와 학계의 고증을 통해 2018년 6월 의료지원국으로 추가 지정됐다. 이에 따라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등 기존의 5개 의료지원국은 6개국으로 늘었고, 전투지원국을 포함한 유엔 참전국은 22개국이 됐다. 전투지원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다.)
◇2. 효창원(孝昌園) : 효창원은 조선조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묘소 즉 효창원(孝昌園) 자리인데, 그 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및 숙의박씨의 소생 영온옹주(永溫翁主)를 안장한 조선왕실의 묘원(墓園)이었다. 효창원은 지금의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 걸쳐 소나무·밤나무 등 수림이 매우 울창한 곳이었는데, 1894년 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하면서 효창원의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24년 6월 효창원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의 묘소를 비롯한 모든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릉 경내로 이전함으로써 효창원은 그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에 이토록 상처 입은 '효창원'은 그 외세와 투쟁으로 형장의 고혼이 된 대표적인 분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을 풍찬노숙으로 지켜낸 분들의 묘역으로 거듭남에 따라 해방공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참배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소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1945년 11월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이하 김구 주석)는 미군정 산하 왕실재산관리처에 효창원을 선열묘역으로 사용하는 문제를 타진케 하고, 김구 주석이 효창원 현지를 방문하여 묘역으로 결정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 (李奉昌,1901~1932) · 윤봉길 (尹奉吉1908~1932) · 백정기 (白貞基,1896~1934) 의사 유골을 일본에서 봉환, 문효세자가 묻혔던 자리에 국민장으로 안장하고, 같은 장소에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허묘(虛墓;假墓)를 나란히 모셨다. 묘 석축에는 김구 주석이 쓴 '의사들의 훌륭한 공적은 후세에 영원히 전해지리라‘라는 뜻의 유방백세(遺芳百世) 휘호를 새겨 놓았는데, 이것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민족을 위해 생명을 던지러 떠나는 동지와 지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이후, 고국 땅에서 재회한 이승의 동지(김구)가 영혼의 동지들에게 보내는 감상이 담긴 인사로 이해되는 한편, 동포들에게 전하는 뜻이기도 하다. 1948년 9월 22일에는 임시정부주석 이동녕(李東寧, 1869~1940)선생과 동 비서장 차리석(車利錫, 1881~1945) 선생의 유골을 중국에서 봉환, 효창원 동남쪽 문효세자 모친이 묻혔던 자리에 사회장으로 안장하고, 그해 국내에서 서거한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曺成煥, 1875~1948) 선생도 두 분과 같은 장소에 안장하였다. 1949년 7월 5일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이 동지들과 혼을 같이 하겠다던 평소 유언에 따라 국민장으로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다. 그러나 특히 김구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던 이승만 영도하의 당시 집권세력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선열묘소를 교외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하였는데, 그 일단으로 1959년 봄부터 제2회 아세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 옹 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되고, 언론사를 비롯한 각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묘소 이전은 보류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 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되었다. 이러는 동안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또다시 선열묘역을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현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부근으로 이전하려고 추진하였으나 역시 유족과 사회 각층의 반대로 보류되었다. 이 같은 경로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묘지 진입로 및 석계단 설치·외곽 주변정리·수목 조성 등)을 10개년 계획으로 시작하는 동시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1981년 6월 유료개방 때까지), 1977년 7월에는 건설부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하였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로 각 묘소 앞의 묘표석(墓表石)을 새롭게 개수(改竪)하였다. 1989년 11월 의열사(義烈祠) 및 창열문(彰烈門)이 건립되고 묘역 확장과 정비가 대충 마무리되었으며, 1989년 6월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3. 만해 한용운 심우장(萬海 韓龍雲 尋牛莊)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遺宅). 만해 한용운 심우장이라고도 한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1984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지정되었다. 1933년에 벽산 스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까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했다. 한옥 중에서도 특이하게 남향(南向)이 아닌 북향(北向)으로 된 한옥이다. 남향이 아닌 이유는 한용운 본인이 남향으로 하면 돌건물(조선총독부)이 보인다는 이유로 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있는 산비탈에 있는 북향터를 사저로 잡아 짓게 되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만해의 딸 한영숙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애초에 북탈진 북향 언덕 위에 지어진 집이라) 심우장뿐 아니라 주변 모든 집들이 좋든 싫든 집을 북향으로 지어져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곳 심우장에서 한용운이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이 집을 떠나지 않았고,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행보를 걸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때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내가 아는 육당(최남선의 아호)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러버렸소."라며 만나지도 않았고 일제 형사가 찾아왔을 때는 호통을 치며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며 보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다가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이 곳에서 사망하였다.
◇4. 서울 선잠단지[서울先蠶壇址사적 제83호.] :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신(잠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제단으로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는데, 각 도마다 좋은 장소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으며, 한 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원년(1506)에는 여러 도에 있는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강남 잠실이 바로 옛 잠실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선잠단의 설치 이후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 잠신이 의지할 자리인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그 터만이 남게 되었다.
※(선잠단지 → 서울 선잠단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5. 정릉(貞陵) 사적 제208호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1396)의 능으로 29만 9,573제곱미터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의 부인), 경처(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이성계는 원 동녕부를 원정해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한 것이었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하다가 목이 타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다. 남다른 사랑을 주던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는 것은 물론 강 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을 정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오늘날은 서울 중구 정릉이 있던 곳이라 정동이라 부른다.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였고,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므로 태조가 공을 들여 조성했지만 제3대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정릉의 위상은 바뀐다. 신덕왕후의 능을 이방원이 푸대접한 이유는 그녀와의 알력 때문이다. 문제는 강 씨가 실질적인 개국 공신인 데다 여세를 몰아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 태조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이런 조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 남은 등이 그녀의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태조 역시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왕위 계승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계모의 아들인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동복형인 방간이 자신을 치려고 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결국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곧바로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후 현종 10년(1669) 송시열 등이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복위를 주장하자, 마침내 그녀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된다.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홍살문 우측에 보이는 네모난 돌을 깔아둔걸 판위(版位)라고 하는데 왕이 능에 도착하면 가마에서 내려 이 자리에 서서 선왕의 능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절(국궁사배)을 올리거나, 의례를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정돈하며 대기했다고 한다. 왕이 절을 하던 네모난 돌자리란 의미로 배위(拜位)라고도 한다. 홍살문을 진입하면 나오는 향로와 어로다. 홍살문을 지나서 향과 축문이 가는 길 (제사 때 신령(선대 왕이나 왕비의 혼령)을 위해 향과 제문을 들고 가는 길) 향로와 임금(왕)이 걷는 길이라는 뜻으로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왕릉을 찾아온 살아있는 왕이 걸어가는 길인 어로가 정자각까지 이어져 있다. "이승과 저승,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신성한 통로"를 상징한다. 정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의 모양에서 유래했는데 왕의 신위를 모시는 몸채(정전) 앞으로 제관들이 절을 하고 의식을 행하는 배위청(拜位廳)이 길게 나와 있어, 한자의 '고무래 정(丁)'자 모양을 띈다고 한다. 조선왕릉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제사 공간으로, 제례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정자 모양의 침전(寢殿) 건축물이다.]
◇6.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는 1905년 대한제국의 재정 총괄 내장원경(內藏院卿) 충숙공(忠肅公) 이용익(李容翊, 1854~1907) 선생이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이념으로 고종(高宗) 황제의 하사금을 받아 설립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곧이어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체결과 이용익 선생의 망명으로 운영난을 겪으며 천도교 지도자였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이 경영권을 이어받았으나 일제의 탄압과 세계 대공황 등의 여파로 재정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선생이 일제 식민지 관학(즉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을 가리킴)과 맞설 수 있는 민립대학 설립의 원대한 꿈을 품고 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특히 인촌 선생의 혼이 담긴 본관(사적 제285호)과 겨레의 정성을 모아 건립한 (이전에는 중앙도서관; 현재는 )대학원 중앙도서관(사적 제286호)은 대학 성장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된 고려대학교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민족의 양심이자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해나갔으며 이는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4.18 고대학생 의거를 비롯한 숱한 민주화 항쟁으로 분출되기도 하였다.
◇7.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 좌상(서울 普陀寺 磨崖菩薩 坐像) :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1828호로 지정된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은 개운사 암자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암벽에 조각된 상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어깨, 높은 무릎 등 당당한 신체를 보여준다. 마애보살좌상 오른편에 새긴 신중패(神衆牌)는 보살상의 조성 시기 추정에 참고가 된다. 이 상은 보물 제1820호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함께 여말선초에 유행한 보살상의 한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신중패(神衆牌)는 제석, 범천 등 호법신들을 청하는 내용을 쓴 패로 의식에 사용된다.
◇8.서울 선농단(서울 先農壇)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제단(祭壇). 사적 제436호로 지정받았다. 선농단에 관한 기록은 신라에 중국의 제례 제도가 들어온 뒤부터 나타나지만, 국가제사로 완전히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흥인지문 밖 전농동(現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일대에 제사를 지낸 뒤 직접 이곳에서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이면서 농사의 소중함과 농민에 대한 고마움을 알리는 의식이 열려서 임금과 농민들이 함께 밭을 갈며 농사를 지었던 장소로 잘 알려졌다. 왕이 선농단에서 이렇게 농사에 관련된 제를 올릴 때, 왕비는 선잠단에서 역시 잠신(蠶神: 누에치기의 신) 서릉씨(西陵氏)에게 제를 올린 후 백성들 앞에서 뽕을 따서 누에를 치는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태조를 시작으로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농사의 신 염제 신농과 후직을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고 나면 동적전으로 나아가서 푸른 천으로 감싼 쟁기를 받은 다음 농부의 가이드를 받아 푸른 소가 모는 쟁기를 다섯 번 밀었다. 이어 세자와 정승급이 일곱 번, 판서급과 대간이 아홉 번을 밀고, 왕은 관경(觀耕) 또는 관예(觀刈)라 하여 보리를 베는 모습을 관람했다. 제례는 일제의 간섭 하에 1908년(융희 2) 폐지되었다가, 1979년부터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다가, 1992년부터 현대에는 선농대제란 이름으로 매년 곡우 무렵에 동대문구 주최로 이 제례를 재현한다. 설렁탕의 어원이 생긴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래 '선농탕(先農湯)'이라 불렸던 것이 발음이 바뀌어서 설렁탕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당시 행사 및 제사가 끝나고 나서 참여했던 사람들의 허기와 공복(空腹)을 채우기 위해 우골(牛骨)을 고아서 만든 뽀얀 국물에 밥을 말아서 나눠 주었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이 선농단 제사를 지내고 먹은 탕(湯)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고 불렀고, 후에 '설렁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선농단 본단(本壇)과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오래된 서울 선농단 향나무가 있으며 문인상이 있다. 최근 개보수를 하면서 카페를 겸한 선농단 역사문화관이 생겼지만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9. 서울 청계천 수표(서울 淸溪川 水標) : 서울 청계천 수표(서울 淸溪川 水標)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수표 유물이다.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종 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고, 이 방법으로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수표이다. 한강변과 청계천 2곳에 설치하였는데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재위 1469∼1494) 때 돌기둥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폭 20cm의 화강암 사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있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21cm)마다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였다. 세종 때 나무 수표와 비교하면 촌·푼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가뭄과 홍수를 미리 예견할 수 있어 실생활에 직접 이용된 한층 더 발전된 것이다.
◇10.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서울 世宗 英陵 神道碑/영릉비(英陵碑), 영릉비석(英陵碑石]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영릉에 있는 조선 전기 세종 재위 기간의 주요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이다.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릉은 1450년 6월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기슭에 조성되었다. 1452년에 건립하였는데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김조(金銚)가 왕명을 받들어 각각 비문과 비음기를 짓고 세종의 제3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1452년(문종 2) 2월 능상(陵上) 아래에 건립하였다. 3월에는 비각이 완성되었다. 비문은 세종 재위 기간의 주요 업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고 비음기 전문은 남아 있지 않다. 1469년(예종 1) 3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영릉을 여주(驪州)로 천릉(遷陵)하고 7월에는 구(舊) 영릉에 남아 있던 신도비와 잡상(雜像)을 땅에 묻었다. 1974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비신과 이수를 발굴하여 옮겨 세웠다. 조선시대의 고유한 양식이 반영된 최초의 왕릉신도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1. 영휘원(永徽園) · 숭인원(崇仁園) : 서울시 동대문구 홍릉로 90(청량리동)
경내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숭인원(崇仁園)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황태자비 이방자의 장남 이진(1921~1922)의 원이다. 망국의 황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이듬해에 황태자 내외와 함께 순종을 뵈러 잠시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덕수궁 석조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순종황제가 원손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후히 치르게 하여 영휘원 동쪽 언덕에 숭인원(崇仁園)을 조성하였다. 석물과 봉분 크기는 작게하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망주석, 석호 1쌍을 배치 하였으며 원침(봉분)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특이한 점은 정자각 앞에 향로만 있고 어로가 없다는 점이라 하겠다. 비각 안 표석에는 '원손 숭인원(元孫 崇仁園)'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왼편 위쪽으로 영휘원으로 가는 중간에 어정(御井)이 있다. 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는 우물이다. 영휘원(永徽園)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사친(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의 원(園)이다. 엄씨는 5세 때 궁녀로 입궁, 명성황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다. 1895년(고종32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으로 이듬해 고종의 아관파천을 적극 도왔고 1897년 황태자(영친왕)을 낳았으며 1903년(광무 7년)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순헌황귀비는 여성의 신교육에 관심을 두어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현 숙명여대)를 설립하였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을 지원하는 등 나라를 짊어질 인재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1911년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휘원은 조선시대 왕의 생모 무덤을 조성하는 예에 따라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호석을 둘렀고, 문석인 장명등 석상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원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등이 있으며 비각 안 표석에는 '순헌귀비 영휘원(純獻貴妃 永徽園)'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12. 의릉(懿陵) 사적 제204호,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景宗)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경종은 숙종 14년 1688년 11월에 숙종과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장자로 태어났다. 후에 영조가 되는 동생 연잉군보다 여섯 살 많은 이복형이다. 숙종이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이고,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아 권세가 대단했던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태어난 지 채 100일도 되기 전에 원자 책봉을 받았고, 송시열 등 노론의 반대가 심했으나, 소론의 지지를 받아 4살 때 세자 책봉을 받았다. 숙종 말년에는 부왕인 숙종이 지병이 심해지자, 경종은 대리청정을 맡기도 하였고,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추존된 첫 번째 부인인 단의왕후(端懿王后)는 세자 때인 18세에 혼례를 올리고 경종이 보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 31세의 나이에 소생 없이 요절한다. 그해 11월 선의왕후가 14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경종이 즉위한 1720년에 왕비가 된다. 선의왕후는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그러나 딸인 선의왕후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론으로 전향하면서 영조와 철천지원수이자 정적이 되었다. 경종은 후사가 없지만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경종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17세의 중전 선의왕후는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세자 지위를 흔들었던 시동생 연잉군 대신 소현세자의 현손(玄孫)이자, 밀풍군의 장남이며 경종의 9촌 조카인 관석(觀錫)을 경종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올릴 계획을 세웠다. 이를 감지한 노론의 반격으로 선의왕후의 계획은 실패하였고 이 일로 인해 시동생 연잉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경종 승하 후 영조로부터 6년간 비참한 대우와 시달림으로 26세에 자녀 없이 승하한다. 노론과 소론의 기나긴 당쟁 속에서 이복동생 연잉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실록에서 전하는 바로는 경종과 연잉군의 형제간 우애는 각별했다. 연잉군은 경종 즉위 이후 '황형'이라 부르며 예우했고, 대계(大繼)를 생각한 경종도 우애를 표했다고 한다. 경종 자신도 아버지 숙종의 의심과 변덕으로 생모와 외삼촌이 죽음까지 당한 골육상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다. 비록 이복동생 연잉군이 마음에 안 들었어도, 이복동생을 죽이는 골육상쟁을 벌여서 조정에 피바람과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종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는 것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병증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죄인으로 죽는 모습을 14세의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연산군처럼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 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 나면 견제를 하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경종의 불임과 관련된 야사 이야기이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아 죽기 전에 세자[경종]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악독한 말을 퍼부으며 세자의 성기를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으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야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등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경종은 연잉군이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게장과 감을 먹고 난 뒤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졌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러한 근거로 세제(世弟)가 의도를 가지고 게장과 감을 올려 경종을 죽게 했다는 '경종독살설'이 퍼진다. 이 독살설은 재위 내내 영조를 옥죄게 된다. 경종이 승하하자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6년 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특이하게도 왕의 능과 왕비의 능이 상하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줄기의 맥이 좁아 왕의 릉과 왕비의 릉을 좌우 쌍릉으로 할 경우 폭이 좁은 생기(生氣)가 정혈을 비켜 가기 때문에 좌우로 쓰지 않고 상하 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17대 효종 영릉이 최초이고, 이후 20대 경종의 의릉이 동원상하릉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왕릉 40기 중 효종의 영릉과 경종의 의릉 등 2기만 동원상하릉의 형태이다. 1962년 천장산 자락에 위치한 의릉 능역(陵域) 내(內)에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의 건물이 들어왔다.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봉쇄했고, 곳곳에 건물을 짓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심하게 훼손하여, 능역 원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250년 이상 보존되어 온 의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과 함께 능역이 가장 많이 훼손된 왕릉이다. 다행히 1996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탈바꿈해서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고 현재는 기본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경종은 조선왕조에서 2대 정종, 13대 명종, 25대 철종 등과 함께 존재감 없는 왕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대의를 위해 동생의 허물과 욕심을 다그치지 않았던 왕이었다. 살아서도 왕인 자기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이복동생 영조에게 짓눌림을 받아야 했고, 죽어서는 중앙정보부라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에 조롱을 받은 곳이 바로 의릉이다.
◇13. 서울 살곶이 다리 : 살곶이다리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는 1420년(세종 2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1483년(성종 14년)에 완공했다. 명칭에 대해서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살곶이다리'나 '전곶교'가 맞고 한자 이름 ‘箭串橋’는 ‘전관교’가 아니라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2월 23일 이를 해제하고 보물 제1738호로 지정하였다. 대다수의 석교 문화재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적 지정요건인 인물, 역사, 사건 등을 고려해볼 때 유형문화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므로 사적을 해제하고 보물로 변경 지정하였다. 살곶이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져 불필요하다가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 20260613-4 서울 용산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 - 서울 효창공원/고대/정릉/의릉/선농단 등 ☆
서울 용산구
1. 이승만대통령 의전용 세단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 (용산동1가, 전쟁기념관)
2. 서울 효창공원 : 서울 용산구 청파동2가 134 6호선효창공원 6번출구
서울 성북구
1. 만해 한용운 심우장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만해 한용운 심우장)
2. 서울 선잠단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64-1번지
3. 서울 고려대학교 본관 :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4. 서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 6호선고려대역1번출구
5.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사길 60-46
6. 서울 정릉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 - 우이신설 정릉역2번출구 좌틀 570m
7. 서울 의릉 :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석관동, 문화재청의릉지구관리소)
서울 동대문
1. 서울 선농단 : 제기동6번출구 우틀-왕산로17번길-380m -- 선농단
2. 서울 선농단 향나무
3.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 매주 월요일 휴관 대략 09:00~17:00 입장료 천원 - 6호선고려대역3번출구/1호선청량리역2번출구 1km
4.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 : 세종대왕기념관
5. 서울 청계천 수표 :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6, 세종대왕기념관 (청량리동) = 6호선고려대역3번출구 -우 -세종대왕기념관 -우틀
서울 성동구
1. 서울 살곶이 다리 : 2호선한양대역3번출구 - 좌측 살곶이다리
◎ 산행일자 : 2026.06.13(토/맑음)
◎ 산행위치 : 서울 용산구,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 산행코스 및 시간 :
∘ 상록수역 ↔ 6호선삼각지역(08:50) → ①전쟁기념관 이승만대통령 의전용 세단(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08:57) → 삼각지역(6호선) 응암 방면 ↔ 효창공원앞1번출구(09:18) → ②서울 효창공원(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09:32) → 원효사.백범김구기념관(10:04) ↔ 효창공원앞역6호선 ↔ 보문역4번출구 정류장 1111, 1112 ↔ 서울다원학교.한용운활동터 정류장(11:00) → ③나국해 만해 한용운 심우장(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1:13) ↔ ④나국해 서울 선잠단지(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1:33) ↔ 정릉역(12:07) ↔ ⑤나국해 서울 정릉(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2:32) ↔ 성신여대(13:00) ↔ 고려대 1번출구(13:20) ↔ ⑥나국해 서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3:36) ⑦나국해 서울 고려대학교 본관(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3:37) → ⑧나국해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4:16) → 도란도란(15:03) → ⑨나국해 서울 선농단 ⑩나국해 서울 선농단 향나무(최근 방문일 : 2026년 06월 13일 15:23) → 제기사거리 ↔ 서울 홍파초등학교 사거리 → 세종대왕기념관 교차로(16:05) → ⑪나국해 서울 청계천 수표(최근 방문일 : 2026-06-13 16:29) ⑫나국해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최근 방문일 : 2026-06-13 16:32) ⑬나국해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최근 방문일 : 2026-06-13 16:32) → 서울 성심병원 ↔ 한국예술종합학교(17:11) → ⑭나국해 서울 의릉(최근 방문일 : 2026-06-13 17:25) → 한국예술종합학교(17:35) ↔ 한양대2번출구(18:22) → ⑮나국해 서울 살곶이 다리(방문일시 2026-06-13 18:37) → 한양대역(18:45) ↔ 상록수역(20:25)
◎ 소요경비 : 총 27,900 원 = 16,900 원 + 11,000 원
∘ 교통비 : 푸른나무~삼각지 2,150원-효창공원 1,550원~서울 다원학교 1,650원~정릉역-정릉 2,500원-고대 1,550원-경동시장앞~홍파초 1,500원-동부아파트~한국예술종합학교 1,500원-한양대역 1,550원~하나마을 2,950원
∘ 기 타 : 고대 도란도란 11,000 원
☆ 20260613-4 서울 용산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 - 서울 효창공원/고대/정릉/의릉/선농단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