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사불자연합회 회보 교등 제2호를 올립니다.
피디에프 파일은 용량이 많아서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래아 한글 편집안으로 올립니다.
1면
제호 '교등'은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통도사 반야암 주석)의 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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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 교 사 불 자 연 합 회 cafe.daum.net/ tbuddha
제 2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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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등은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고 자비를 실천하는 교사불자회의 등불로서 이 땅을 정토로 구현할 것을 서원합니다. |
The Gyodeung
The Korean Buddhist Teachers’ Association Newsletter
발행일: 불기 2555년(2011C.E.) 1월 20일/ 발행처: 대한불교조계종 전국교사불자연합회/ 발행인: 강영철/ 편집인: 김희준
전국교사불자연합회 여름 수련회(낙산사, 2554년 8월 7 - 9일)
티베트불교 성지순례(포탈라궁, 7월 24일)
임원 운영 회의 (부산 홍법사, 12월 4일)
2면
티벳, 그리운 포탈라
하순희(경남교사불자회원․시인)
언젠가는 가고 싶던 마음의 땅 엎드려
간절한 기원으로 하늘 향해 합장할 때
바람은 머리위에서
따루쵸*를 휘날렸네
만년설 얌드록초 호수 젖어든 고요 속에
한 생애 저물도록 갈구하는 길목에서
가피로 머무는 환희
무량한 이 한 때여
가는 길도 손잡음도 은혜롭고 감사해라
바램 없는 바램으로 넘치고 넉넉하여
먼 후일 이 땅에 없을
우리 모두 행복하라
얄룽창포 강물처럼 흐르는 도반으로
법의 연꽃 만개한 삼예사원 돌아 나와
마니차** 따라서 가던
푸르른 영혼의 길
시공을 뛰어넘은 선지식 자취 따라
다함없는 빛과 소리 늘 함께 하소서
이 땅이 영원하기를!
평화와 자비, 사랑으로!!!
*따루쵸: 경전․소망 등을 써서 걸어놓은 오색 헝겊.
**마니차: 경전을 넣은 통으로 순례․기도 때
손에 잡고 돌림.
/격려사/
가르침의 등불이 되시길
성타 스님(불국사 회주, 본회 고문)
가르침의 본질은 바르고 참됨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끌고 키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어둠속에서
사람을 안내하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어두워 함부로 발을 내디딜 수 없을 때 등불은 내 발길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등(燈)’은 이음동의어입니다. 가르침과 등불이 하나를 이루어
이끄는 세상은 어둠이 없고 캄캄한 밤이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등불이며
세상을 밝히는 등이고 마음의 어둠을 쫓는 빛의 근원입니다. 교사 불자 연합회에서 펴내는 ‘교등’의 의미는
이렇게 크고 넓은 뜻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실천하는
교사 불자 연합회의 뜻은 참으로 대견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고 실천함으로써 모든 이가 고통과 어둠에서 벗어나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지시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으셨으며 말로써 말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당신 삶 곳곳에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 보이는 실천과 모범이 가장 훌륭한 가르침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인이 포교원장 재직 시 창립됐던 전국교사불자연합회가 꾸준한 활동과 성장으로 13년을 지나
이제 회보를 창간하고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한 것을 보니 그 마음이 흐뭇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교사 불자 분들이 성심껏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생활 속에서 실천해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있기에 한국 불교의 내일은 밝으며 여러분과 같은 생각을 가진
선생님들과 공부하고 커가는 아이들의 미래 또한 밝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앞으로도 ‘교등’의 제호처럼 가르침이 등불이 되는, 이 시대와 이 세상을 진리와 가르침으로
밝히는 등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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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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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의 수행
김성철(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티벳장경연구소장)
불교수행이라고 하면 우리는 눈을 반개(半開)하고 가부좌 틀고 앉아 깨닫기 위해 좌선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좌선 수행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여러 단계의 마음 수행 방법 가운데 최고 단계의 수행으로,
남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권유될 수 있는 고급의
수행이다. 다시 말해 '출가하시기 전의 부처님 마음'을 닮은 사람에게만 허용될 수 있는 수행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수행할 경우 교만한 마음만 강해질 수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에서 볼 수 있듯이 목적 중심적 가치관이 팽배한 우리나라이기에
불자들 중에도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최고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고급의 수행인
좌선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단계에서 요구되는 심성이 충분히 익어 있어야 한다. 수학공부에 비유하면,
고등수학인 미분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덧셈, 뺄셈, 곱셈 등 기초산수부터 차근차근 익혔어야 하는 것과 같다.
불교수행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불교수행을 하는 것은 부처님을 닮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을 닮는다는 것은 출가 후 구도(求道), 성도(成道), 전법(傳法)하신 후반의 삶을 닮는 것도
의미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 전 어린 시절부터 원래 갖추고 계셨던 마음을 닮는 것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시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 아래에 앉으시기 전에, 일반인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마음을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날 때부터 앎)로 갖추고 계셨다. 그 중 하나는 세속적 삶에 대한
염리심(厭離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마음, 즉 대비심(大悲心)이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지금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고 말 운명인 세속적 삶에 대해 강한 환멸의 마음을 갖고 계셨다. 다시 말해 세속적 복락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이 태어난 분이셨다. 그리고 이는 궁궐 밖 나들이 도중 동문과 남문과 서문 밖에서 만난
노인과, 병자와, 시체의 모습을 봄으로써 환기된다. 이것이 염리심인데 우리가 이러한 염리심을 체득하도록
해 주시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부정관(不淨觀)'이라는 수행을 개발하셨다. 부정관 중 시관(屍觀)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퍼렇게 변색되어 썩어 가는 '시체'를 직접 바라보든지, 마음 속에 떠올리는 수행으로 자신의
몸뚱이도 언젠가 시체가 될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 놓는 수행이다. 이런 수행을 거쳐야 우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 부처님께서 12살 되신 해 봄날의 파종행사인 농경제에 참석하신 적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농부가
쟁기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는데, 파헤쳐진 밭고랑에서 작은 벌레가 꿈틀대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것을 잡아먹고 그 새를 다시 큰 새가 날아와 채 가는 모습을 보신다. 이 때 어린 부처님께는 큰 슬픔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신다; "아아! 세간의 모든 생명체들이 이렇게 극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구나.
나는 이제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서 이러한 모든 고통을 해결할 길을 생각해 봐야 하겠다"
그리곤 염부수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기시게 된다. 일반적으로 12살 정도의 어린아이는 남이
아니라 자신이 괴로울 때 슬픔(悲感)을 느낀다. 더욱이 벌레와 같은 미물의 아픔에 공감하기는커녕
그것을 갖고 놀며 장난치는 것이 12살 소년들의 일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다른 분이셨다. 어린 시절부터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슬픔에 잠기실 정도의 예민한 감수성과
큰 자비심을 가진 분이셨던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이전부터 갖추고 계셨던 염리심(厭離心)과 자비심(慈悲心)은 깨달음을
위한 좌선 수행 이전에 우리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마음은
'부정관'과 '자비관'을 통해 훈련된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권인 스리랑카나 태국, 미얀마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인 위빠싸나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수행으로 부정관과 자비관을 닦게 하며, 밀교
즉 금강승을 신봉하는 티베트의 경우도 부정관과 자비관을 철저히 닦은 자에 한해 깨달음을 지향하는
지관(止觀) 수행을 허용한다. 출가하시기 전에 부처님께서 갖추고 계셨던 심성, 즉 염리심과 자비심을
어느 정도 체득한 자만이, '깨달음'을 위한 '좌선' 수행을 올바로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염리심'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자비심'을 체득한 사람의 경우 남에게 화를 낸다거나, 시기, 질투하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이런 '염리심'과 '자비심' 없이 '깨달음'을 위한 '좌선' 수행을 한다면, 이는 덧셈과 뺄셈도 공부하지 않고서
미분학 문제를 풀려고 덤비는 무모한 유치원생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재물에 대해 욕심을 내야하고, 가문을 빛내야 하기에 명예에 대한 욕심도 남아 있으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의 성공을 보고 질투심이 솟는 재가자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하기
이전에 그런 마음들을 정화하는 부정관이나 자비관을 먼저 닦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진정한 자비심으로 가득 찰 경우 결코 남을 해치거나 화를 내지 않아야 하고, 마음속에
진정한 염리심이 자리 잡았을 경우 재물욕과 명예욕이 조금도 있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수행이 철저하지 못한 우리는 가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런 잘잘못의 기준은
오계(五戒), 또는 보살 십선계(十善戒)에 의해 제시된다. ①산 것을 죽이지 말라, ②훔치지 말라,
③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거짓말하지 말라, ⑤험한 말 하지 말라, ⑥이간질하지 말라,
⑦꾸밈말 하지 말라, ⑧탐내지 말라, ⑨화내지 말라, ⑩잘못된 세계관을 갖지 말라.
이런 계목의 취지를 간단히 말하면 남도 해치지 말고 자신도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해치는 것 중에는 삿된 음행(邪淫)과 같이 자신을 고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도 포함된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계를 어길 경우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참회하라고 가르치신 바 있다.
그것이 자자(自恣), 또는 포살(布薩) 의식이다. 따라서 자비관과 부정관뿐만 아니라,
수행기간 동안만이라도 보살 십선계 등의 계가 주어진 후 매일 저녁, 또는 수행이 끝나는 날 대중이
둘러앉아 각자 그 동안 자신이 어긴 계목(戒目)에 대해 서로 고백하고 참회하는 자자(自恣) 의식이
재가불자의 보편적 수행방법으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또, 자자나 포살 법회와 같이 대중 앞에서 고백하는 형식으로 참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금당(金堂)의 부처님 전에 대중이 함께 모여 기도를 올릴 경우, 현생에서의 죄업은 물론
전생에서의 죄업에 대한 참회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지계에 대해 다짐하며 이루어지는
참회는 악업으로 인해 앞으로 닥치게 될 불행한 과보를 약화시키거나 막아 준다.
이렇게 생각과 분별을 통해 성취되는 부정관과 자비관 수행, 또 일정 기간을 정해 놓고 계를 받은 후
그 기간 동안 지키지 못한 계목에 대해 고백하고 참회하는 자자와 포살, 스님의 집전에 의해 부처님 전에서
올리는 참회기도 등의 기초 수행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이후에, 간화선이나 위빠사나 수행 등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재가자에게 권유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처님의 모든 마음을 올바르게 닮을 수 있다.
*2002년 3월 월간 <조계사보>에 기고한 글.
*출처: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http://www.kimsch.net
4면
/보리수 그늘/
티베트불교 순례기
도심(道心) 박성현 (마산교사불자회장)
7월 23일 티베트 시각장애우 학교 방문
따시델레! 구름사이로 히말라야의 설산이 보인다. 오후 3시 20분, 드디어 라싸 공항에 도착하였다.
투명하고 푸른 하늘 아래, 강가를 빼고는 나무하나 없는 척박한 산들이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었다.
우기인지라 산의 연한 풀빛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풀들이 방목하는 야크나 양들의 먹이가 된다고 하였다.
연변의 동포 가이드 박용걸 씨가 하얀 면사포 같은 까닥을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걸어주며 나중에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라고 하였다.
집집마다 지붕 모서리에 오색 깃발 묶음인 룽따(風馬旗)가 세워져 있고, 동네 어귀나 산과 탑 위에는
다르촉이 운동회 때의 만국기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깃발에는 경전 문구나
기원문이 적혀 있고, 보리와 유채 밭도 보였다.
6백만 명쯤 되는 티베트인들은 70%이상이 야크와 양들을 옮겨 다니며 기르는 유목민이었다.
중국의 침략 이후 유목민들도 정착을 강제 받고 있다.
점심을 먹고 티베트 시각 장애우 학교(Braille Without Border)를 방문하였다.
1997년 사브리예 텐베르켄이라는 독일의 젊은 시각장애우 여성이 베이징과 청두를 거쳐 라싸로 들어왔고,
네델란드인 남자 친구 파울의 도움을 얻어서 천신만고 끝에 설립한 학교였다.
국제단체의 후원금으로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고 이 학교 학생 출신의 선생님이 안내하였다.
준비해 간 학용품과 옷, 보시금을 전하였다. 햇빛이 강렬한 티베트의 시각장애우 어린이들은
전통적으로 전생의 업의 결과로 인식되어 집안에 가두어 키워지고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왔다고 한다.
설명을 듣는 중에 일행 중에 최초의 고산증 환자가 발생하였다. 응급처치를 하고 큰 불상사 없이
호텔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고 연변 동포 아줌마가 운영하는 ‘아리랑 식당’에서 우리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였다.
멀리 아스라이 포탈라 궁과 구름 띠를 두른 나무하나 없는 산과 태양전지 패널을 지붕에
장치한 2-3층짜리 연립주택들도 보이는 방에서 라싸의 첫날밤을 맞았다. 고산증 때문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7월 24일 조캉 사원과 세라 승원, 포탈라궁 참배
아침에 테베트 불교 4대 종파 중 겔룩파의 3대 사원에 드는 세라 승원을 참배하였다. 문화혁명기에
스님들의 생활공간만이 파괴되었을 뿐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다고 한다. 한때 8천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던 대학이었다고 한다.
승원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라싸 분지 중에서도
북쪽 높은 산을 배경으로 남쪽으로 조캉사원과 포탈라 궁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니차를 돌리며 시계방향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니 강원 세라메 트라창이 나온다.
이곳은 불교학을 공부하는 대학인데 몇 분의 스님들이 경전을 열심히 독송하고 있었다.
10위안을 한 움큼의 잔돈 지폐로 바꾸어 가는 곳마다 합장하며 보시금을 올렸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뒤편으로 다섯 개의 법당이 있고
그 법당 안에는 벽면에 빼곡히 쌓인 경전들과 화려한 옷으로 장엄된 각종 불상과 총카파 스님의
상이 모셔져 있다. 일행은 연신 합장하며 “그 경전 밑으로 기어 나오면 그 경전들을 다 읽은 공덕이 있다.
”는 얘기를 듣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처럼 즐겁게 경전 밑을 기어 다니기도 하였다.
대웅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아쉽게도 날마다 오후에 있다는 스님들의 토론 수업 광경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포탈라 궁’으로 돌렸다.
티베트인들은 역대 달라이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믿는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하시는
보타락가산의 명칭을 따서 궁전 이름을 ‘포탈라’라고 한다. ‘쿤둔’이란 영화에서 보았듯이,
이곳 사람들은 현세의 달라이라마가 다음 달라이라마로 환생한다고 여긴다.
다람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라마 성하가 집무를 했던 곳과
침실도 볼 수 있었다. 1959년에 달라이라마 존자님이 히말라야의 설산을 넘어 인도로
망명을 하고, 무려 130만의 티벳인들이 자유를 외치다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마오쩌뚱이
일으킨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사원 6천여 개가 파괴되고,
경전은 불태워지거나 화장실 휴지로 쓰이고, 조캉 사원은 돼지우리로 사용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달라이라마 성하가 1987년 미국의회 연설에서 ①티베트를 평화지대로 만들자,
②한족의 티벳 이주 정책을 중단하라, ③티벳인의 기본적인 인권과 민주적인 자유를 보장하라,
④티벳고원의 자연보호와 핵 쓰레기 폐기를 중단하라, ⑤ 티베트의 미래에 대해 공개 합동토론을
벌이자는 5개 항의 평화안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중국 측은 묵살하였다.
이후 성하는 불교를 세계에 알리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티베트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캉사원은 티베트인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사원으로 존중되는 곳이며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가 되는 곳이다. 비록 7세기 당시의 원형들은 문화 혁명기에 풍파를 겪으며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순례자들로 붐비고 지금도 신심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캉은 티베트 역사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룬 송첸깜뽀 왕의 주도로 그의 네팔 왕비인 브리꾸띠 공주가
모셔온 불상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당 태종의 웬쳉(文成)공주가 모셔온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는 라모체사원도 창건되었다. 왕 사후에 중국의 침략을 걱정하던 웬쳉공주는
불상을 조캉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조캉을 참배하고 주변의 야시장에서 조그만 ‘마니차’를 20위안을 주고,
현지인이 천연 물감으로 그린 10호 정도의 석가모니상 불화를 꽤 비싼 돈을 주고 모셔왔다.
야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며 사는 재미도 여행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인 것 같다.
오후 5시 조금 넘어 삼예 사원으로 가기 위해 라싸에서 동남쪽 방향인 체당의
산남(山南)이라는 곳으로
얄룽창포강을 따라 버스로 이동하였다. 강변의 포플러나무와 몇 그루의 이름 모를
나무들을 제외하고는 건조하고 메마른 황토 빛 고원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강물은 온통 싯누런 색이다. 우기여서 빗물이 산의 흙을 그대로 씻어 내려 그런가 보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문명을 이루고 살아왔는지,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땅에서
살고 있는지 실감하였다.
7월 25일 삼예 사원과 얌드록초 호수에서
아침을 먹고 어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30분쯤 달려 얄룽창포강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두 척의 거룻배에 편승해서 바다같이 넓고 아름다운 이 강을 1시간가량 건너야 하는
선상 여행도 즐길 수 있어 더 각별한 느낌이 든다. 삼예 선착장에서 강을 건너는 데 직선으로
건너지 못하고 모래톱을 피해 이리저리 돌아 가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모양이다.
환상적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강을 건너니 지프차 두 대와 미니버스 한 대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방목중인 양떼와 소떼를 헤치고 20여분을 달려 삼예 사원에 도착하였다.
강변 북쪽 모래 둔덕 삼예 계곡에 위치한 이 사원은 779년 인도에서 온 파드마삼바바 스님이
치송데첸 왕의 통치기에 불교가 국교로 되면서 창건하였다.
794년 왕의 입회하에 인도 후기 불교를 대표하는 카말라실라와 중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 선사 사이에 며칠 간 격렬한 대논쟁이 있었다. 인도 불교가 판정승을 하였지만,
티벳 스님에게 선종을 처음 전한 분은 청두(成都)에 머물던 신라왕자 출신 무상정중(無相淨衆) 스님이었다.
티베트 불교 역사상 최초로 삼보를 완비한 사원이다. 부처님세계를 표현한 만다라 형 건축이었다.
5층으로 된 중앙의 법당 건물은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며, 주변 건물들은 바다와 육지,
지하 세계를 상징한다. 1, 2층은 티베트 스타일이며, 3층은 중국식, 4층은 인도 양식으로 지어졌다.
5층의 천불전은 개방하지 않았다. 이 사원의 주불은 1층 중앙에 모신 4미터 높이의 석가모니불이고
벽 양쪽으로 보살과 수호신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늘어서 있다. 천장은 만다라로 장엄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서 함께 예불을 올렸다.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려 내렸다.
각층으로 계단이 나 있고 층마다 회랑이 되어 있어 ‘합장한 채 시계방향으로 사원 내부를 도는’ 꼬라(순례)를 하였다.
다른 사원보다 사람이 붐비지 않았다. 고요한 승원의 분위기에 젖어 4층까지 1시간 정도의 꼬라를 하였다.
삼예사원에서 되돌아 나와 길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구불구불한 길을
숨 가쁘게 오르자 해발 4,794미터의 캄발라 고개였다. 야크가 방목되고 있는 모습과 폐허가 된 사원의
잔해가 덩그렇게 있다. 멀리 눈을 이고 있는 산들과 눈부시게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보며 오르다 보니
어느 듯 하늘이 넓게 열리면서 약간 평평하고 너른 공간이 나타난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고산증이 나타난다. 정신이 아득하고 다리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돌탑들이 쌓여 있고 룽따와 다르촉이 히말라야의 바람을 맞아 휘날리고 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비취색의 얌드록초호와 호수 뒤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인 설산들을 보며 찾아든 고산증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잠시 고개에 앉았다. 멀리서 ‘딩 딩 딩...’ 야크들의 워낭소리가 들려오고, 돌탑에 기원을 드리는 순례자의
모습이 보인다. 야크나 사자개를 데리고 유료 기념 촬영을 권하는 티벳인들이 서성인다.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허허 벌판에서 용케 삶을 꾸려가는 이들의 끈질김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호수를 벗어나 히말라야 빙하계곡인 홍하 계곡을 따라 티벳의 4대 신산(神山)가운데 하나인
니이칭캉상 산 앞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잠시 정차하여 만년 빙하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출발하려니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진다. 산사태로 길이 막히지 않을까 운전기사와 가이드가 걱정을 한다.
탁류가 흐르는 계곡 그리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간체의 깊은 계곡을 넘어 낭추 댐을 통과하니
넓은 평야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시가체 까지가 티베트 제일의 곡창지대이다.
보리밭과 노란 유채꽃밭을 멀리 바라보면서 평지로 난 길을 따라 달려 어둠이 깃든 후에야
시가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가체는 티베트에서 라싸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오랫동안 과거 창 지방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오랫동안 교역과 행정의 중심지였지만 티베트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7월 26일 따시룬뽀와 쿰붐 사원을 순례하고
아침을 먹고 따시룬뽀 사원 앞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있는 3개의 돔 모양 약사여래 스투파인
평화의 탑 앞에서 예불을 올렸다. 이 사원은 총카파의 제자 겐덴드루프가 1447년 세웠다.
이 분이 바로 제1대 달라이라마이며 그의 유해가 포탈라가 아닌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입구가 복잡하여 높이 11미터의 스투파부터 참배하고 다시 나와 왼쪽 길을 걸어 올라가면
주법당인 잠바 첸누무에 이른다. 여기에는 크기가 무려 26미터의 청동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다.
오체투지로 3배를 하고 그동안 목에 걸고 다니던 ‘까닥’을 미륵부처님의 무릎 위에 공양 올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미륵부처님의 얼굴이 아주 푸근하고 상서로웠다. 부처님의 발치에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누구한테도 말 못할 숙세와
현세의 무거운 업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꼬라를 하고 사원을 빠져나와 간체의 쿰붐 사원으로 향한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렸을까.
15세기에 건축된 스투파형의 사원이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네팔양식의 건축인 쿰붐은
‘십만여 개의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상을 봉안하고 있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에 걸맞게
여기에는 112개의 법당이 있으나 현재 개방되는 곳은 30여 곳이다. 대전당의 가운데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2만8천근이 넘는 황동으로 도금을 하여 매우 장엄하다.
대전에서 예불을 하고, 그 옆의 40미터 높이의 9층 백탑을 1층부터 5층까지 시계방향으로
난 나선형의 길을 따라 오르며 꼬라를 하였다. 5층까지는 4면 8각형이고, 6층 이상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0여 칸의 방이 있어 스님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6층 테라스에서는 간체 시가지와 사원 전역을 조망할 수 있었고 그 이상은 개방되지 않았다.
함께 오지 못한 고재희 법우님의 보시금으로 산 과일을 후식으로 맛있게 먹고서 라싸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는 풍경은 밤새 눈이 왔는지 어제의 민둥산이 눈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얌드록초 호숫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광주에서 오신 곽금순 법우님 일행은 호숫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였다.
라싸로 돌아와 선물 가게에 들러 아내와 딸을 위해 천주석으로 만든 목걸이 두 점을 샀다.
중국의 홍수로 칭짱열차 길이 끊어졌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2박 3일 동안의 열차 여행을 포기하고
대신 항공편으로 중국의 보현보살 성지인 쓰촨성 아미산을 순례하고 낙산의 대불을 참배하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하였다. 포탈라궁의 야경을 아스라이 바라보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7일 서장박물관 관람, 회향식 봉행
1시간 정도 서장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중국의 침략과 문화혁명의 광풍으로 수난을 겪은
티벳 불교 문명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유물이 많았다. 우리의 한의학과 유사한 티베트
의학의 약재로 쓰이는 동식물과 광물, 인체해부, 외과수술 기구들을 그린 탕카(족자)들이 이채로웠다.
비행시간이 촉박해 역대 달라이라마 성하의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를 스쳐 지나갔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강가의 절벽 바위에 새겨지고 채색된 거대한 시탕대불,
석가모니불 앞에서 이번 순례의 회향식을 올렸다. 과일과 빵으로 공항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청두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뵈 랑첸(자유 티베트)!
*여행기 전문과 사진은 전국교사불자연합회 카페에 실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