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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목사님 칼럼

작은 것들이 모여 물결을 이룰 때

작성자화려한 봄|작성시간26.06.14|조회수2 목록 댓글 0

장례 이야기 ④

<한번쯤 덕질로 성덕이 되어보자>

요즘 장례지도사들 중에는 여성도 많다. 유리천정 깨기의 아주 좋은 사례다. 고인이 여성일 경우 여성 장례지도사를 원하는 유족들이 꽤나 많다. 남자들의 손에 속살을 내보이고 맡기는 게 왠지 께름칙하다는 거다. 거기다 그들은 숨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유튜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장(葬)스토리 TV’가 좋은 예다. 우선 후드 티 차림으로 등장한다. 건네주는 이야기는 ‘장례비용 깎기’ ‘화장비용 아끼는 법’ ‘장례지도사가 되는 법’ ‘상조 회사 선택 방법’ 등 귀에 솔깃한 것들이다. 조언 내용은 실제적이다. ‘화장(火葬)하면 비싼 수의를 살 필요가 전혀 없다.’ ‘50만원이 넘는 유골함은 거품이 끼어 있으니 절대 사지 마라.’ ‘음식 값을 아껴야 한다. 주방에서 일하는 도우미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 등이다. 실제로 장례비의 80%가 접대비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런 제안들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플라스틱프리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고금숙님의 말이 크게 공감되었다.

“작은 것들이 모여 물결을 이룰 때, 세상이 조금이라도 움찔할 때, 우리는 ‘성덕’이 된다. 쓰레기 덕질에 성공한 덕후들 말이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물을 듯하다. 덕후란 일본어 오타쿠(御宅)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특정분야의 전문가’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준말이다. 덕질은 덕후들이 심취해 빠져든 행위들을 일컫는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 자원재활용법이 개정되어 2022년부터 컵 보증금제가 실시된다. 세상은 이렇게 바뀐다. 고금숙님은 이렇게 조언한다.

“세상일에 자기 일처럼 나서는 덕후가 전체의 3% 이상 되면 세상이 변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 소설 <멋진 신세계> 속 레니나는 이를 ‘개인이 감동하면, 전체가 비틀거리게 돼요’라고 표현했다.”

개인이 감동할 일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장례순서를 한번 만 바꾸어보자. 화장의 경우 3일을 기다렸다가 발인예배와 함께 화장터로 달려갈 일이 무엇인가? 영국 모델은 뷰잉(입관)이 끝나면 승화원에서 시신을 인수해 간다. 화장절차를 마친 다음 리무진에 유골을 정중하게 모셔 유족들에게 건넨다. 우리나라는 발인이 끝난 다음에 화장장으로 간다. 지칠 만큼 지쳐서 또 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화구(火口)에 고인을 집어넣은 것을 확인해야 한다. 또 들여다보게까지 한다. 너무 잔인하다. 이게 트라우마가 된다. 입관식이 끝나고 나면 먼저 화장을 하자. 그 일을 교회 장례위원들이 대신해 주면 된다. 유족들을 보호하는 장치다. 이런 것이 진정한 장례 서비스다. 감동이다. 그러면 염습절차가 간단해진다. 더군다나 지금은 냉장기술이 발달해 있어 이전처럼 더운 여름날 3일 장 5일 장을 하면서 시신이 부패할 일도 없어진다.

코로나는 이 모든 것을 실증해 주었다. 보건복지부의 ‘코로나19 사망자 장례관리 지침’에 따르면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한 시신은 유가족 동의를 받고 우선 화장한다. 장례식은 그 뒤에 치른다. 신속하게 사망자를 화장해 감염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장례식장에 참여해 보았지만 장례식은 판박이다. 고인에 대한 추억담이나 회고담 덕담은 없다. 죽음이 가르쳐준 인문학이 사라졌다. 죽음을 통한 성찰이 없다. 장례식장의 장례는 참으로 끔찍하다. 바로 옆방에서는 불경과 목탁소리가 울린다. 한쪽에서는 꺼이꺼이 울음소리가 크다. 고요함이나 경건함은 없다. 시장바닥이다. 마치 시신처리 하치장에 와 있는 느낌이다.

병원장례식이 아닌 교회장례식으로 전환하자. 그러면 죽음에 대해 부활신앙에 대해 얼마나 힘있게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건축가 승효상님의 지적이 따금하다. “도시가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부동산의 공동체로 변하면서, 묘역은 우리의 일상과 공존할 수 없는 혐오시설이 되어 쫓겨났고 재물의 맛에 취한 교회와 사찰은 시장보다 더 상업적인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도시에서 마음을 고요케 하는 성소를 찾는 일이 이제는 도무지 쉽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부티크 빌딩으로 변해버렸다. 삶과 죽음을 성찰할 장치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살았으나 죽은’(딤전 5:6) 건물이다. 며칠 전 만난 건축가 유현준교수는 내게 청란교회의 안치실, <호텔 막벨라>의 도시형을 같이 시도해보자고 제안해 왔다.

이 뿐이 아니다. 장례식은 언제나 허겁지겁이다. 출산을 앞두고 병원도 산후조리원도 미리 준비한다. 죽음은 왜 그렇게 준비되지 않는 것일까? 숨이 넘어가야 자연장이나 묘지를 찾는다. 혼비백산이다. 그 짧은 시간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유택(遺宅)을 구한다. 뒤따르는 것은 바가지요금이다. 매사 당하고 산다. 그래서 ‘상 당했다’고 하는 것일까? 부실건물에 입주한 꼴이 되어 두고두고 후회한다. 가족갈등이 심화된다. 제발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으로 전환하자.

덕후가 필요한 세상이 왔다. 사소(些少)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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