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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엄씨를 탐구해 보다.

작성자벽초|작성시간14.07.10|조회수387 목록 댓글 0

 영월 엄씨(寧越 嚴氏)의 시조인 엄임의(嚴林義)는 중국 한(漢)나라 시인 여요(余

姚)사람 엄자능(嚴子陵)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

다.

 엄임의(嚴林義)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

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서 신라(新羅)에 왔다가 본국

(本國 : 당)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

안주(安住)한 것이 한국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조에서 엄임의(嚴林義)를 내성군(奈城君)추봉하고 후손들에게 영월을 식읍

으로 하사하자,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영월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엄임의는 고려조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고 내성군(奈城君)에 봉해졌으

며 강원도 영월 땅 행정(杏亭)에 눌러 살게 되었다. 라는 기록도 있다.)

 

 ※추봉이란 한 인물이 생전에 봉해진(임금이 내린 군호) 것이 아니고 뒷날에 봉해

진 것이니 고려조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다는 것은  "신라(新羅)에 왔다

가" 라는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벽초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힌다.) 

파락사(波樂使)로 올 때 엄임의가 정사로, 영월신씨(寧越辛氏)의 시조인

신시랑을 부사로 파견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월(寧越)은 강원도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내성군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영월로 고쳐서 조선 1895년 영월군이 되었

다.

 

 엄임의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엄태인(嚴太仁)은 검교군기감윤(檢校軍器監尹)벼슬로 군기공파(軍器公派)라

하였으며  아래로 13공계를 이루고 있다. 

둘째 엄덕인(嚴德仁)은 복야벼슬로 복야공파(僕射公派)라 하며  아래로 28공계,

셋째 엄처인(嚴處仁)은 문과(文科)벼슬로 문과공파(文科公派) 아래에 단일공계

3공파 42공계의 자손들로 형성되어 있다.

  • 군기공파(軍器公派) - 엄태인
  • 복야공파(僕射公派) - 엄덕인
  • 문과공파(文科公派) - 엄처인

공계(公係)라는 말은 위 파조 아래에 후손 중 어떤 인물(00公)을 기점으로   다시 분파되는 족보상의 계보를 말한다.

필자의 경우 함양박씨 제 2파인 문원공파 - 치암공파 - 정랑공파 자손이라하며 시조부터 뿌리의

갈래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碧草)

 

 

                      뿌리공원에 있는 영월엄씨 조형물에 성씨유래가 적혀 있다.

                             영월 엄씨 시조 내성군  엄임의(嚴林義)의 신도비

                    강원도 영월에 있는 영월 엄씨 시조공 嚴林義의 묘소이다.

 

 

조선충신 영월군 호장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엄흥도지묘

 

※贈 이란 현직에 있었던 관직은 아니지만 생전의 공이나 업적이 있는 분께 내린

벼슬로 명예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은 조선조 종2품의 하계에 속한 관직이다.

 종 2품 상계인 가청대부 부터 대감이라 불리며 아쉽게도 가선대부는 종2품하계라

서 "영감'이라 불린다.

 관찰사와 동일 직급으로 관찰사는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며 종2품하계기에 지금

도지사는 "도지사 영감"이라 호칭을 하는 것이다.

 대감에 못미치는 벼슬인 가선대부로 명예를 안겨주었지만 야박하게도 대감 아닌 

영감의 벼슬을 준 것이다.

 증직중에는 이 가선대부가 꽤 많은 것 같다. (벽초)

 

 

엄흥도(嚴興道)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할지라도  나는

달게 받을 마음이다.

 

 이 얼마나 정의로운 마음인가?

 강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그렇게 까마귀밥이 되도록 버려졌으며

 “누구든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

는 어명이 내려져 있었으나 엄흥도 자신은 물론 일족이 멸문 할 수도 이다는 것을   

면서도 거적에 싸인 단종의 시신을 수습,  동을지산(현재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

에 모신 후 성(姓)을 갈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려 자취를 감추었다. 
 (※ 엄씨 성을 감추고 어떤 성을 썼는지는 밝히지 못하였다.)


당시 엄흥도는 영월 땅의 호장(향직의 우두머리)이었다.
고려시대의 호장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에서는 그곳의 행정을 전담했

으며, 수령이 파견된 주현에서도 부세·역(役)·호구 등의 문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도 수령의 유고시 수령의 역할을 대행하며 민호를 총괄하고, 관용공물

의 조달을 주관했다. 특히 관노비는 호장이 관리했기 때문에 관노비의 재주(財主)로

서 등기되었다.(필자의 판단으로는 시 군 과장이나 부군수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嚴氏家는 연산군 때 이르러 호된 시련을 겪게 되는데 성종의 후비였던 귀인엄씨는

연산군이 자기 생모가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은 것도 이들 후비들 때문이라 하여

엄귀인의 아버지 사직공과 오빠 회(誨)ㆍ계(誡) 등 3부자가 함께 참살을 당하게 된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이 엄귀인과 윤필상 등 12대신의 간계라고 임사홍

이 모함하면서 벌어진 이른바 갑자사화라는 참극이다.

 
엄씨가문에서는 딱 한 분의 왕비가 배출되었는데 영친왕의 생모이자 이방자 여사의

시어머니이신 고종황제의 妃이다.

엄귀비는 1854년 증찬정() 엄종삼()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으며, 명성황후가 1896년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뒤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신 후 후궁이 되어 친왕

()을 낳았다.(민비가 죽고 계비가 되었다. 순헌귀비()라 불린다)

 우리나라 개화의 여명기에 양정(養正)ㆍ진명(進明)ㆍ숙명(淑明) 등을 설립, 오늘날

사학의 요람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영친왕의 이름은 이은(垠) 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46명인데 문과 28명, 무과 39명, 사마시 78명, 역과 1명이

니 명문양반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 시신수습으로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의 충절은 선조(宣祖) 때 그의 영웅성이 재평가 되어 후손을 찾아 증손 한례(漢

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

으며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한편 시조의 16세손 흔(昕)은

 중종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정자(正字)를 지냈고 호당(湖

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수찬(修撰)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세자시 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을 지냈다.

 특히 그는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그 행적(行蹟)이 등재(登載)되어 영월 엄씨를

 더욱 빛냈으며 <선(善)으로 패(敗)한일 보며 악(惡)으로 이긴일 본가, 이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니 명백(明白)한가, 평생(平生)에 악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成)

하리라>라는 시조(時調) 한수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한다. 

加資(가자)라는 말은 승진을 할 때 근무일수를 기초로 평정되는데 정3품 이상은 왕명에 의한 승진

이었기에 예외가 되는 것이며 엄흥도가 가선대부(종2품 하계) 를 받은 지 승진 일수를 지났기에 다시

직책을 올려 주는 것이지요. 자헌대부(정2품 하계)에서 다시 공조판서 (정2품상계)로 대감반열에

오릅니다. 실질적인 품계가 아니지만 그만큼 명예를 높여준 것으로 사료됨 : 벽초 )

 

 흔(昕)의 현손 집(緝 : 성구의 아들)은 숙종(肅宗)때 정언(正言)과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폐모론(廢母論)에 유생(儒生)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파직 당한

성(惺)과, 효종(孝宗) 때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나갔던 황(愰)이 유명했고, 성의 조카

 정구(鼎耈)는 효종(孝宗) 때 좌승지(左承旨)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 되었으

나 무고함이 밝혀져 뒤에 교리(校理)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한

석봉(韓石峯)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

「집고첩(集古帖)」과「만향제시초(晩香薺詩抄)」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문(嚴

門)을 대표했으며, 집(緝)의 아들 경수(慶遂)는 숙종(肅宗)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

理)를 역임하여,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연행록(燕行錄)」을 간

행한 숙(璹),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낸 도(燾), 고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석

정(錫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엄(嚴)씨家는 근세에 이르러 선지자의 집안으로 신문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개화파 인물인 엄세영(嚴世永)은 국제 정세에 밝았던 초기 외교가로 신사유람단

(紳士遊覽團)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고종(高宗) 23년(1885) 영국(英國)군함이 거문도

(巨文島)를 점령했을 때는 일본 나가사까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도웰 함대

사령관과 담판을 하기도 했다.

 

어디에선가 보고 들은 것 같은 기억이 나기에 소개해 본다.

이 엄자에는 입口가 두 개나 들어 있다.

그래서 엄씨가 사람들은 노래를 잘 부르고 말을 잘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악장을

전파하러온 시조 엄임의의 유전자 DNA를 이어 받은 탓이라고 한다.

 경희대 성악과 교수 엄정행, 말을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엄용수, 앵커 엄기영을 비

롯하여 엄정화, 엄태웅, 엄지원도 곽광을받는 연기자이며 엄앵란도 영월 엄씨인 것

이다.(그럴 듯 하다. ㅎㅎㅎㅎ)

 

 엄씨의 본관은 약 60개이나 모두가 영월 엄씨에서 분파된 것이라 하며 전국에 영월 엄씨는  14~15

만 명 정도가 살고 있을 것으로(2014년 현재)추정한다. -200년도 조사 시엔 50위 인구수는 132,990

명 이었으나 2005년도에는 70위로 밀려났다.  (벽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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