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타문중 자료

간재 전우선생

작성자벽초|작성시간14.08.19|조회수72 목록 댓글 0

(경북 영천의 어느 선비님께서 작성해 놓은 글을 얻어 왔습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조선 후기의 학자. 노론파(老論派) 학자들의 학통을 이어,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 이론을 세웠다.


본관 담양(潭陽). 호 간재(艮齋). 자 자명(子明).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고 임헌회(任憲晦) 문하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아 윤치중(尹致中) 서정순(徐廷淳)과 함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노론파(老論派) 학자들의 학통(學統)을 이어,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으나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 이론을 세웠다. 1882년(고종19)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이 되고 그 후 강원도 도사(都事) ·장령 ·순흥(順興)부사 ·중추원참의 등에 보직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만년에는 전라도의 계화도(界火島)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에 간재집이 있다


간재의 문집은 원집 43권, 속편 16권, 합계 59권 31책. 원래 저자가 초고를 직접 수정하여 1914년에 간재사고(艮齋私稿)라 명명하고 자서(自序)를 붙였으며,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 사후 약 10년 뒤, 경상도 문인 김정호(金楨鎬) ·오진영(吳震泳)이 경남 사천 용산정(龍山亭)에서 납활자를 이용하여 원집 43권, 속집 16권 합 30책의 간재사고(진주본)를 내자, 문인 이인구(李仁矩) 최병심(崔秉心) 등은 충남 논산 봉양정사(鳳陽精舍)에서목판본으로 전집(前集) 17권, 속집 6권 합 23책의 간재선생문집(新都本)을 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저자의 문인들이 분열하였다.


그 후 오진영은 일본을 배격하는 내용으로 인해 국내에서 간행하지 못한 글들을 묶어 저자의 별호를 딴 추담별집(秋潭別集)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상해에서 간행하였다. 한편, 저자의 유언을 받든 문인들의 후손인 김형관(金炯觀) ·성구용(成九鏞) 등은 1975년에 영인본으로 간재선생문집(華島手定本)을 간행하였다.


원집 59권 가운데 34권이 편지로서 총 4,224편이라는 방대한 양이 실려 있다. 대부분 스승과 동문 및 제자들과 왕복한 것으로 성리학설과 의리론에 대한 내용들이다. 잡저 574편도 대개 성리학에 대한 논설이다. 이 글들은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설을 충실히 지키는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의 입장을 담고 있다.


추담별집에 실려 있는 상소문은 을사조약에 격분하여 매국노를 처단하고 조약을 철회하자고 하였지만, 직접 항쟁에 나설 것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식민지시기에 씌어진 글들에서도 직접적인 항쟁보다는 전통적 도학(道學)을 중흥함으로써 장차 국권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부록에는 저자의 연보와 전기 등이 실려 있으며, 제주도에서 북간도에 걸쳐 3,000명에 달하는 제자 명단이 관선록(觀善錄)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간재 약전)

ㅇ가계와 수학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정동·삼청동·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는데, 이때부터 임헌회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임헌회를 직접 아산의 신양(新陽)으로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으며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에 따라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안자편(顔子篇) 오현수언(五賢粹言) 연원정종(淵源正宗)등을 편찬하여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ㅇ도학진흥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94년에는 사헌부 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을미년에는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전우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68세 되던 해부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嶝島)·군산도(群山島) 등에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고, 지금의 부안·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아가면서 학문을 폈다.


72세 되던 해에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고,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82세에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으며 60여책의 저서를 남겼다. 지금의 계화도에 있는 집은 모두 당시의 제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ㅇ학문

그의 성리학적 연구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하여는 나라가 망하여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지탄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인데, 홍직필은 이재(李縡)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므로 그는 자연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견해를 가졌는데 이들을 이른바 낙론(洛論)계열의 학자라 부른다.


전우는 이와 같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과는 자연히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는 의리를 숭상하고자 하여 조선조에 있어서 다섯 사람의 어진 이로서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을 동방의 5현(賢)이라고 하여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오현수언을 만들었는데, 이는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체재를 모방한 것으로서 그의 의리정신이 어떠하였는가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여 자기의 성리학설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김창협(金昌協)을 연원으로 하여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 그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으며, 이항로(李恒老)에게도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이진상(李震相)에게 역시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그는 오직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그 나름대로 성리학적 경지를 창안하여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부르짖었다.


그는 이러한 창안이 주자(朱子)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주자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주자가 모든 도덕적 의지는 성(性)에 근본하고 성은 천리(天理)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천리인 성은 당연히 높고 마음은 낮은 것이라 하였다.


그는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라 하였고, 또 “이를 미루어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자의 설에 바탕을 두기는 하였으나 내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든 심제(心弟)두 글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도 성은 천리이며 심은 기(氣)라고 주장함으로써 심즉리(心卽理)설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송시열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理氣)에 대하여는 이기유위무위변(理氣有爲無爲辨)에서 태극은 이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은 없으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하였다. 이를 무위(無爲),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하였고, 인간에게 있어서도 성은 무위한 것이며 심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성(心性)에 대하여는 성은 천리로서 무형·무위이며 심은 유위의 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은 순선(純善)이므로 대본(大本)이며 심은 작용이니 성명(性命)의 도덕성에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ㅇ평가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성격과는 달리 처신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였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金平默)고 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하였고, 파리장서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하여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견해를 따로 모은 책이 추담별집(秋潭別集)이다. 여기에 의하면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도학정신에 더욱 투철 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더러는 이에 대하여 “수 천 년의 도학이 간재 한 몸에 달렸으니 가벼이 죽기보다 학문을 북돋우는 것이 더 큰일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스스로는 일제의 탄압에 대하여 조선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전혀 일인을 상대하지 않았고 세금은 물론 제자 가운데 개화하는 사람은 이름을 지웠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에 대하여 영남의 거유 곽종석(郭鍾錫)은 그의 저서 면우집(?宇集) 권111의 ‘홍성길(洪成吉)에게 답하는 글’에서 “나 스스로는 간옹(艮翁)에 있어서 평소에 그 청절(淸節)을 흠앙(欽仰)하였던 것이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였던 바이니 간옹이야말로 나의 의혹된 바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이다.”고 하였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전우 자신은 전통적 도학의 중흥만이 국권회복의 길로 여겼기 때문에 이 정신에 투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우에 대한 처신의 평가가 어떠하였던지 간에 조선조 최후를 장식하였던 성리학적 공헌은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炳殷)·송기연(宋基冕)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등 3,000여명을 헤아리고 있다. 

 

 

 

아이콘 사진정보 보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