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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북한의 핵실험 문제가 국제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네요.
오늘 실험을 강행 할거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인도가 1974년 1차 핵실험은 할 때의 Project이름이 'Smiling Bhuda'이었답니다.
당시의 총리이던 인디라 간디에게 실무자들이 핵실험에 성공한 뒤
'부처가 웃었다'라고 보고를 하였다는 군요...
정말 부처님이 웃었을까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실험을 하면서 이름은 평화롭게
붙혔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래글은 뉴델리 주재 신문사 기자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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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기행(5) 핵실험장 포크란 2006/03/11 13:31
인도 서부 타르 사막의 사막도시 포크란. 2월 하순이건만 사막의 열기는 벌써 후끈하다. 낮 기온이 35℃는 쉽게 넘어간다. 포크란은 인도가 1974년, 1998년 두 차례 핵실험을 한 곳이다. 흔히 ‘포크란Ⅰ’, ‘포크란Ⅱ’이라고 불리는 실험이다.

(포크란 위치)
핵 실험장은 인구 1만여명이 사는 사막의 도시 포크란에서 북서쪽으로 20여㎞ 거리. 도시 주변은 끝도 보이지 않는 평평한 사막의 연속이다. 한산한 거리에 군인의 모습이 많은 게 특징이라면 특징.
위치로는 조드푸르와 자이살메르의 중간쯤이다. 조드푸르는 라자스탄 주의 제2 도시로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재임중 찾았던 관광도시. 이곳에서 포크란까지 거리는 약170㎞. 조드푸르에서 자이살메르로 사막 사파리를 즐기러 가는 이들은 포크란을 지나간다.
하지만 인근에 핵 실험장이 있는 줄 모르고 가는 사람이 더 많겠다. 마을 어디에도 핵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시가 없다.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도 입간판 하나는 있을 법한데 없다. 도시의 유일한 호텔은 포트 포크란. 포크란의 옛 성주가 살던 성으로, 지금은 후손들이 성의 일부를 호텔로 개조해 관광객을 받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같은 일이 흔하다.

(포크란 시의 한 복판 로타리. 쭈구리고 앉아있는 개 모습만큼이나 한산한 마을이다.)
제2차 핵 실험장은 포크란에서 서쪽 자이살메르로 이어진 15번 국도변에 있다. 원래 대규모 사격장인 이곳은, 도로 오른편 안쪽으로 가로 세로 길이가 수십㎞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그 깊숙한 안쪽에 인도를 핵 강국으로 끌어올린 핵 실험장이 있다. 사격장은 1971년 파키스탄과의 전쟁 이후 건설됐다.
현장에 접근해 볼 수 없을까하고 왔다갔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국도변에서 군인을 상대로 생필품을 파는 한 주민은 “실험장이 5중의 철조망으로 둘러싸여있다. 경계가 철통같다. 우리도 못 가봤다”고 했다.

(포크란 사격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지난 2월말 현재 군 부대의 훈련이 한창이다)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길가에 호를 파고 위장막으로 덮고 훈련중이다. 십여문의 포가 트럭 뒤에 매달려 이동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사막의 겨울과 봄은 덥지않아 군 훈련의 적기. 포크란 인근은 사막이기는 하지만 부드러운 모래 입자가 언덕을 이루고 있는 사하라사막을 연상하면 잘못이다. 마카로니 웨스턴을 찍었다는, 초목이 드문 드문있는 이탈리아의 황량한 땅에 가깝다.

(카톨라이 부락의 마을 회관)
포크란에서 25㎞떨어진 카톨라이 부락. 2차 핵실험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주민 1500명이 산다고 했다. 기자가 들어가니 호기심어린 눈빛의 주민들이 모여든다.
“당시 실험 두 시간 전에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집안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라’라고 말했지요. 평소보다 강력한 훈련을 하는 걸로만 생각했습니다. 땅이 몇 초간 심하게 흔들렸지요. 첫 실험은 아마 오후 4시 가까이 되어 일어났을 겁니다. 집에 금이 조금 갔지요. 나중에 보상도 받았지요.”(주민 박다란 슈와)
현장에 가봤냐고 물으니, 역시 못들어 간다고 했다. 1차 실험 현장에는 가봤다는 주민이 있었다. 이곳에서 20㎞떨어진 우다람 카물라 동네 인근에 있는데, 군 훈련이 없을 때는 출입 통제를 하지 않아 볼 수 있다고 했다. 주민 찬드라 프라카쉬(26)씨는 “날이 더운 5, 6월에는 군인들이 철수해 들어가는데 문제 없다”고 말한다.
1974년 1차 실험 때 일을 묻자 30여년전 일이라 모른다고 했다. 마을 회관으로 찾아가니 노인들이 많이 보인다.
“그때도 많이 흔들렸지. TV는 물론 라디오도 없을 때여서 무슨 일인지 몰랐어. 이 지역은 지진이 없는데 무슨 일인가 했지. 나중에 군인들이 얘기해줘서 알았어.” 바크람 바나르 할아버지의 말이다.
“칼람 대통령이 2차 핵실험 당시 이곳에 5번 왔었어요. 그가 인도를 세계에 유명하게 만들었죠.” 카톨라이 여자초등학교의 체탄렘 베르마 교사가 현재 인도 대통령을 자랑스러운 듯 말을 꺼낸다. 칼람 대통령은 당시 인도 정부의 최고 과학담당 자문관으로 핵 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이름이 나오니 마을 사람들이 맞장구를 친다. “인도 미사일의 아버지이지요. 모든 인도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10여명의 마을 노인들간에 이견이 없다.
 (주민들이 즐기는 아편. 인근 구자라트주 등에서 몰래 사오는 것이라고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하객들에게 나눠주는 게 이곳의 관습이다.)
바나르 할아버지는 손에 검은색의 약간은 물렁물렁해보이는 덩어리 조각을 갖고 있다가 기자에게 권한다. 아편이었다. 마을에 결혼식이 있어 손님 접대 차원에서 준비했다고 했다. 물론 불법이다. 가격은 10?d에 100루피(약2500원)선.
인도 정부는 1998년 5월 11일, 13일 양일에 걸쳐 모두 5번의 핵 폭발 실험을 했다. 힌두우파정당인 BJP정권의 A B 바지파이 총리가 정권을 잡자마자 해치웠다. 암호명은 ‘샤크티 작전’. 지하 300? 사암 지하 동굴에서 단행됐다.
첫날은 3번, 둘째 날은 2번의 폭발이 있었다. 인도의 핵 능력을 대내외에 완벽하게 과시한 실험이었다. 이는 핵실험의 내용에서 드러났다. 원자폭탄(15㏏급), 수소폭탄(45㏏급), 전술핵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양의 폭탄(5,3,2㏏급)을 두루 실험을 해냈다. 인도의 핵 능력을 의심하던 일부 외국의 시각을 이로써 한 방에 날려버렸다.
세개의 폭발장치가 동시에 터지자 순간적으로 섭씨 100만℃의 열이 발생했고, 이는 태양 표면과 비슷한 온도였다. 바위 수천?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핵실험장에 있었던 한 과학자는 “축구장 만한 넓이의 땅이 공중으로 수? 솟아올랐다”면서 “사건 이후 (힌두교신화에 나오는)크리슈나 신이 언덕을 들어올렸다는 말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고 스트로브 탈봇은 전한 바 있다. 탈봇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으로 인도 핵문제를 전담했고, 저서 ‘Engaging India’에서 이같은 일화를 말하고 있다.(인도사람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언덕을 들어올 린 건 크리슈나가 아닌, 원숭이 신 하누만’이라고 했다. 누가 틀리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1차 실험은 암호명은 ‘웃는 부처’(Smiling Buddha)였다. 1974년의 부처님 오신 날인 5월 18일 단행됐고, 뭄바이에 있는 시루스 실험용 원자로에서 추출한 6㎏의 플루토늄이 사용됐다. 완전히 조립된 핵폭발장치는 무게가 무려 1400㎏이었고, 지하 107m지점에서 폭발됐다. 폭발에 성공한 뒤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에게는 “부처가 웃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인도는 이후 핵 관련 기술을 자체적으로 발전시켰다. 1974년 실험은 무기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조립에만 2년이 걸렸고, 크기가 컸으며 거추장스럽고, 수송기로만 운반할 수 있었다. 이로인해 무기화화 작업이 필요로 했다. 크기를 줄이고 야전에서 운송할 수 있도록 내구성을 향상시켜야하고, 우발적이거나 허가없이 폭발시키는 걸 막기위해 안전시스템을 갖춰야 했다.
핵의 무기화는 인디라 간디의 큰 아들 라지브 간디 당시 총리가 1988년 최종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10년후 핵 무기 실험이 단행됐다. 하지만 인도는 2차 실험 전인 1995년과 1996년에도 실험을 준비했다가 불발된 바 있다.
1995년 실험 불발기. 그해 12월 초 프랭크 와이즈너 인도 주재 미국대사는 포크란 사격장 위를 지나는 미국의 첩보위성이 이 지역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촬영했다는 걸 알았다. L자형의 터널들을 통해 케이블들이 깔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지하 폭발 장소로부터 자료 전송을 위해 목적인 것으로 미 정보기관들은 분석했다.

(타르 사막의 포크란 사격장에 피어있는 사막 식물)
프랭크 대사가 당시 워싱턴에 있었는데 뉴델리로 급거 귀환했다. 돌아오는 도중 뉴욕타임스는 ‘미국은 인도가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미국 정보 전문가를 인용해 보도했다.
프랭크 대사는 뉴델리에 도착하자 마자 나라시마 라오 총리의 A.N.바르마 비서실장을 즉각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그리고는 위성 촬영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준 뒤 자신의 호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는 실험을 할 경우 제재 등 여러가지 인도에 불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라오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에 대해 라오 총리는 ‘인도는 무책임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만 답했다. 실험은 무산됐다.
다음해인 1996년. 1947년 독립 이후 정권을 줄곧 잡아온 국민회의당이 총선에서 패배, 힌두우파정당인 BJP에게 정권을 넘겼다. 바지파이 총리는 포크란에서의 지하 핵실험 준비를 재개하라고 바로 지시했고, 이후 미국의 첩보위성은 이 지역에서 움직임이 증가된 걸 확인했다. 실험은 하지만 중단됐다. 집권한지 2주만에 BJP가 이끄는 연립정부가 하원 신임 투표에서 패배, 붕괴됐기 때문이다.

(길가에서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는 낙타들)
기자는 지프를 1차 핵실험장으로 돌렸다. 포크란 사격장 안에 있지만 2차 실험장과는 위치가 다르다. 지프가 다시 포크란 마을 근처까지 갔다가 비카네르 방면으로 가는 국도 15번을 타고 간다. 그러다가 중간에 다시 사막안으로 진입해 로하르키 마을까지 들어갔다. 포크란에서는 35㎞떨어진 지점이다.

(1974년 1차 핵실험뒤 실험장을 찾은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
마을 바로 옆으로 모래 언덕이 있고, 올라가는데 발이 푹푹 빠진다. 북한산 산행으로 다져진 다리건만 사막에서는 맥을 못쓴다. 낙타는 모래 경사지도 발이 빠지지 않고 잘 올라간단다.
모래 언덕 위에 올라서니 모래 사막이 멀리 펼쳐져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5㎞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1차 핵실험장이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말린다. 포탄 껍데기를 줍기위해 들어갔다가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않느냐는 생각 때문에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데 “쿵 쿵 ~ ~” 군부대의 포 사격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들려온다. 하는 수 없다.

(포크란 시의 판차야트 건물에 써있는 핵실험 표시. 1974년 한 차례, 1998년 두 차례 했음이 적혀있다. 판차야트는 지역자치기구이다.)
포크란 마을의 아난드 구치아 시장. “지역주민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핵 실험으로 포크란이란 이름을 세계에 알려졌지만. 포크란=인도 아닙니까?” 특히 1998년 포크란Ⅱ 뒤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포크란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했다.
“10만명 정도는 몰려왔을 겁니다. 한 6개월 간 열기가 대단했지요. 주민들은 방문객에 무료로 숙박과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손님이니까요. 시청 마당에서 재우기도 했습니다.”

(타르 사막의 사암 채취장. 곳곳에서 땅을 파헤치고 돌을 캐고 있었다. 지하 핵 실험장은 이런 바위를 뚫고 300미터를 내려간 지점에 만들어졌다.)
핵 실험에도 포크란 주민들은 아무런 일 없었나? 2차 실험장 인근 캐톨라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아무일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캐톨라이에서 만난 대학생 라미쉬 찬드라(24)씨는 “2차 실험 뒤 방목하던 소들이 실험장 근처에 갔다가 눈이 멀었다. 그리고 이후에 태어난 아기소의 70%는 눈이 멀었다”고 말했다. ‘눈이 먼 소가 지금도 있느냐’고 물으니 “다 죽고 없다”고 했다.
하지만 힌두어 신문 ‘다닉 바사케르’의 포크란 주재 기자 자이 카이산 다위씨는 “다 거짓말”이라고 부인했다. 주민들이 보상을 많이 받아내기 위해 말을 지어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만, 1978년 1차 핵실험 때는 가려움으로 나도 고생을 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13살이었는데, 손가락, 발가락, 사타구니 등이 가려워 두 세달 고생했다고 말했다.
바지파이 총리는 1998년 핵실험 성공 뒤 짤막하게 사실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미국의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벽돌 천?의 무게로 이 자들을 눌러버리겠다”고 참모들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8년. 미국과 인도는 핵 실험을 과거지사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미래의 협력을 위해 다시 손잡고 나가자고 다짐하고 있다. 인도가 핵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동반관계’라는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란 게 공통된 관측이다.
핵무기란 가져보지도 못하고, 핵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사람에게는 핵은 다만 공포의 대상이기만 하다. 핵무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대전유성의 과학자들이 몇년전 핵 관련 실험을 했다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발각돼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핵 관련 원천기술이 없는 우리는 원전의 껍데기만 짓고 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포크란을 다녀오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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