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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심화1] 늦깎이 학생, 나의 어머니

작성자이정수|작성시간03.05.27|조회수487 목록 댓글 0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여자보다 남자를 우대하는 사회이다. 아래 글은 이러한 사회 속에서 어머니가 늦게나마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딸이 지켜보면서 쓴 글이다. 남녀가 불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 현상이 이 작품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파악하면서 읽어 보자.

늦깎이 학생-나의 어머니

학생 작품

어머니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조바심이 난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묘하게 일그러지는 정도가 심해질수록 시계 바늘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오고 아버지의 바스락거리는 신문의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 심해진다.
"딩동"
"엄마다!"
우선은 엄마를 대피시키는 일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신문을 힘있게 개키는 소리가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보이고, 엄마는 내게 고갯짓으로 아버지의 상태를 물어 보셨다. 나는 표정을 최대한 일그러뜨렸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아버지, 엄마 오셨어요. 엄마, 오늘 학교에서 있지∼."
하고 아무 말이나 주워 섬기며 엄마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내 명랑한 목소리를 아버지의 착 가라앉는 목소리가 끊어 놓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반찬도 엉망이고, 애들 공부도 돌보지 않고. 도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학교 수업이 늦게 끝나서……."
"무슨 놈의 학교가 10시가 넘도록 수업을 해? 거짓말 아냐? 그리고 공부하러 간 여자가 치마는 왜 입고 화장은 왜 해?"
아버지의 지나치다 싶은 말씀에도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셨다. 늘 이런 식이었다. 어머니가 수업이 저녁 시간에 잡혀 있다고 누누이 말씀 드리고, 또 미리 저녁상도 보아놓고 나가시는데도 아버지는 도무지 이해하려 들지 않으셨다. 옆에서 보노라면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무척 화가 났다. (어머니가 늦게 귀가하자 화가 난 아버지)

어머니는 늦깎이 학생이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과거에 대학교를 졸업한 분이다. 어머니께서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결심하신 것은 과거에 살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에 대한 정열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가정과를 졸업하셨다. 믿을 수 없지만 어머니가 여고생 시절, 당시의 여학생들은 장래 희망 1순위로 '현모양처'를 꼽았다고 한다. 만약 지금 우리 교실에서 장래 희망 조사를 할 때 누군가 현모양처를 쓴다면 담임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그 학생이 선생님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어머니는 늦깎이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여고 시절에 공부를 잘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영문과로 진학을 하고 싶으셨지만, 외할머니께서 다섯 딸 중 막내였던 어머니가 가정과로 진학하기를 강력하게 원하셨고, 어머니 자신도 영문과에 꼭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상태라 별 망설임 없이 가정과를 선택하셨다. 당시 가정과를 졸업하면 시집을 잘 간다는 통념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대학 진학)

어머니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가정과 선생님이 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병원 인턴으로 돈을 거의 벌지 못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가셔야 했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급식하듯이 창고에서 하루 먹을 양식을 꺼내주시는 엄한 시부모님 밑에서 시집 생활을 하고, 또 새벽같이 출근해 보충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 너무나 힘든 생활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입이 나아지자 학교에 사표를 내셨다. (어머니의 신혼 생활)

내가 7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울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의 병원이 울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운전을 배우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태우고 다니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운전을 배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사가 되셨다. (울산에서의 생활)

울산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어머니는 인근 대학교의 사회교육원에서 영어 강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의 얼굴이 생기로 반짝반짝 빛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어머니가 강의를 들으러 나가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러다 몇 번 듣고 말걸, 뭐 하러 돈 내고 신청을 하냐?"
하고 핀잔을 하실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수강 신청을 하러 갔다. 어머니는 너무 긴장하고 들뜬 나머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도 깜빡 잊어 허둥대셨다. 그 날 우리는 학교를 구경하고 가게에 들러 공부에 필요한 문구들을 샀다. 대학 공책 몇 권과 필기구 몇 가지, 헝겊으로 만든 필통 한 개. 어머니는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사회교육원에서 영어 강의를 들음)

어머니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오랜만에 다시 하는 공부이고, 영어 공부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공부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점점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드셨다. 열심히 하시는 만큼 어머니의 영어 실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하였고, 몇 달이 지나자 중학생인 나를 가르칠 정도로 수준이 향상되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단어 암기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서 단어 외기 시합을 할 때마다 내가 번번이 졌다. 어머니랑 함께 공부를 하면 나는 채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반면 어머니는 마치 숨도 안 쉬는 것처럼 몇 시간이고 꿈쩍도 않고 공부에 열중하셨다. 어머니는 정말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보기 좋았다. 어머니께서 늦게나마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이 기뻤고, 많다면 많은 나이에도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열정과 노력이 아름다워 보였다. (공부에 대한 어머니의 열정과 노력)

어머니는 곧 실력을 인정받아 초등학교 특활 교사와 백화점 시간 강사로 강의를 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대학원에 입학하길 원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저 한때의 일이겠거니 하며 이해해 주셨던 아버지는 그 나이에 여자가 대학원을 다닌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고, 또 비싼 등록금을 내야한다는 것에 대해 화를 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강의를 나가시는 것도 탐탁지 않게 보셨지만 그래도 강의가 낮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학원 입학을 희망하는 어머니)

그러나 이번 대학원 입학의 경우는 달랐다. 수업을 야간에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그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을 것이며, 집안 일은 누가 할 것이냐고 역정을 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계속해서 설득하며 허락을 기다리셨다. 등록금은 어머니가 벌어서 낼 것이며,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만 그것도 저녁을 미리 다 준비해 놓고 수업에 참석할 것이며, 공부로 인하여 아버지와 아이들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머니로부터 받아내신 이후에야 아버지는 허락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배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의 반대)

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머니의 사회 진출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평소에는 현대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이 어머니의 결심을 듣고 나선, "어머, 그럼 밥은 누가 해?"라고 말하곤 하였다. 어머니는 밥하는 기계였던가? 사실이 그랬다. 어머니는 며느리였고, 부인이었고, 어머니였고, 기사였고, 식기세척기였고, 세탁기였다. (주변 사람들의 고정 관념)

어머니는 언젠가 내 손을 잡고,
"너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
고 하셨다. 왜 그러시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여의사들이 남자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고 사회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고 사는 게 부러워서. 너는 엄마처럼 못나게 안 살았으면 좋겠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세등등함에 상처를 많이 받으신 모양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셨다. 아버지의 지나친 자부심은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약을 갖다주실 때마다 아버지는,
"이건 흔치 않은 약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나랑 결혼한 건 행운이야."
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무심하게 하신 말씀들이 20년이란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서 어머니의 가슴은 굴욕으로 멍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굴욕과 상처)

야간 대학원을 다니면서 아버지로부터 좋은 않은 소리를 많이 들으셨던 어머니. 수업을 마치자마자 숨이 턱에 닿도록 곧장 달려와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제 사회교육원 강사가 되셨다. 요즈음 어머니는 '지애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어머니 원래의 이름, '박정순'으로 불리우는 사회에서 사신다. 어머니의 이름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도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하시지만 속으론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다. (사회교육원 강사가 되신 어머니)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소유한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 어머니의 누리는 삶은 어머니에게 꼭 맞는 옷 같아서 보기에 좋다. 방안 가득히 책을 펼쳐놓고 강의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에게서 살아있는 빛이 보인다. (자신의 삶을 되찾은 어머니)

1. 남녀 불평등이라는 사회 현상이 앞의 글과 다음 시에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비교해 보자.
이 글에서 남녀 불평등 현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말해 보자.

두 얼굴

인형놀이는 무슨--.
사내 대장부는 그럼 못써!
애써 울음 참는 내 동생.
축구는 안 돼!
무슨 여자애가 저렇담.
움츠러드는 내 어깨.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다
그래 놓고서.
말 따로 마음 따로
두 얼굴의 우리 엄마
앞치마 두른 아빠는 좋아하시면서.

<예시>
* 비슷한 점
- 남녀를 불평등하게 대접하는 것은 나쁘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고, 얌전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 다른 점
[늦깎이 학생 나의 어머니]
-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
- 자식에게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얼굴]
- 남편도 집안일을 해야 한다.
- 자식에게 남녀의 역할을 분명하게 가르며 불평등한 교육을 시킨다.

2.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자이기 때문에, 또는 여자이기 때문에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는가?

3. 여러분의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해 보자.

4.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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