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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김소월 시

작성자이정수|작성시간03.05.27|조회수247 목록 댓글 0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 시는 소월이 초창기의 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시 세계로 접어드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도출된 자아의 모습은 소월의 시 작품 전체로까지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내포한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연에서 화자는 동무들과 나란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마을로 돌아오는 평화롭고 정겨운 농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친근한 이웃과 우애의 믿음으로 하루 일을 마감하고 석양이 물든 서녘 하늘을 뒤로 하며 돌아오는 모습은 김소월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농촌 풍경이며 나아가 평화로운 농촌에서 늘 볼 수 있는 일상 생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을 화자, 곧 김소월이 “나는 꿈꾸었노라.”하여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동료들과의 노작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의문점의 해답은 곧 소월이 농촌 사회를 보는 시각이며, 현실 인식이다. 2연에서 그 해답을 구하도록 하자.

2연의 첫 행인 5행에서 역접 부사 ‘그러나’는 1연의 사연을 2연의 사연으로 부정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5행에서 나에게 집이 없고, 6행에서 우리에게 보습을 댈 수 있는 농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부가 농토가 없는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떤 경우에도 본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집과 농토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이 불평등한 가운데 부와 재화가 일방적으로 한 곳에 몰리면 구조적 모순이지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이 시가 창작된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시는 그 시대의 경제, 정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의에 의한 것이면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겠으나, 정치적, 경제적 압력과 비정상적으로 보금자리와 농토를 잃어버렸기에 한이 맺힐 뿐이다. 일제는 1900년 초부터 동양 척식 회사를 내세워 한국 통치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일인들의 농업 이민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토지를 강제로 점령, 탈취하는 데 총력을 경주하여 1908년 2850정보에서 1923년에는 70,777정보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였다.
이 확장된 농토의 지주가 된, 농업 이민 온 일인과 일제의 비호를 받는 일부 한국인 지주는 고율의 소작료(70-80%)를 한국 소작인에게 강요하였다. 소작률도 1920년 말에는 81.6%에 이르렀으니 나머지 농토를 전부 한국인이 경작하더라도 농부가 자기 농토를 소유하고 농사를 짓는 일은 20% 정도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의 경제적 수탈은 농촌을 헐벗게 하였고, 한국인 농부들은 농토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 이주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주위에서 직접 보고 인식한 소월은 아침에서 날이 저무는 저녁 때까지 거듭 탄식을 하면서 방황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5행에서 ‘나는’이 6행에서 ‘우리’라는 어휘로 바뀌어진 것이다. 김소월 시의 화자는 개인인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소월은 집을 잃은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보습 댈 농토이다. 나만의 세계에서 우리라는 세계로 소월의 시 세계가 확장되어 가는 모습이다.

3연에서는, 소월이 암담한 농촌 현실을 보고 방황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동과 남북에 내 몸은 떠나가니 했지만 몸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하고 있음을 말함이다. 방황하면서도 희망을 구했으나 별빛의 아득함만큼이나 희망도 아득하여, 마음에는 물결만 떠오른다. 물결의 이미지를 물거품으로 본다면 희망이 물거품인 것이다. 여기에서 낙망하는 소월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4연에서는 3연의 내용을 반전시키고 있다. 소월은 3연의 방황하는 마음이 황송한 심정임을 고백한다. 소월의 주위 동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표출이다. 자책하는 소월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 준다. 13행의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에서는 시각적으로 미래를 표시하고, 14행의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 가라’에서는 현실의 경험과 인식으로 미래에는 비교적 가는 길이 이어져 가리라 하여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4행의 ‘나는 나아가리라’에서는 봉착되는 난관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15행의 ‘한 걸음, 또 한 걸음’에서는 개척해 나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동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소월은 자신의 앞날에 전개될 미래 세계에 본인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를 다짐하고 있다. 16행에서는 ‘온 새벽’이라 하여 오늘 새벽, 곧 이러한 모습임을 강조하고 있는 동시에, 소월이 본 한국 농촌의 현실을 밝힌 것이며, 이것이 소월의 현실 인식이기도 하다. 보이는 산비탈엔 동료들이 묵묵히 흩어져 김을 매고 있는 모습하며, 각자 흩어져 앉아 있는 농부의 모습에서 침체되고, 현실의 변화에 둔감하고 체념한 수동적인 자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소월은 이 시에서 현실 개척 방법까지는 제시하지 못했으나, 현실을 정확히 보고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시 세계를 확장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윤주은, ‘소월의 이름을 부르노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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