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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 계시판

시공간 조판소의 관찰 기록 - 정동재의 안귀령의 전력질주 중에서

작성자qufdlthsus|작성시간26.06.21|조회수18 목록 댓글 0

시공간 조판소의 관찰 기록

정동재

 

 

길에서 현판 하나를 본다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니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則近道矣)

만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는 말의 얼굴판대기

칠흑의 허공 위, 투명한 사각 격자가 입체로 떠오른다

시간마저 얼어붙은 우주의 은밀한 조판소(組版所)

 

시간도 공간도 남도 아닌 것이

기왓장같이 거친 표지에 먹줄 튕기듯 그은 수평의 외줄

차원을 넘어와 가로와 세로의 십()자 축으로 교차한다

가로누운 여인의 몸에서 번진 푸른 혈흔이

활자가 되고 팔자(八字)로 스크린 위로 떨어진다

아스라한 봄밤, 고딕의 이름들이 붙기 전 태초의 별들은

이미 무극과 태극의 기동으로 거대한 활판의 톱니바퀴가 되어

소리 없이 맞물려 흐르고 있었다

 

조판소 상단 머리맡

1 · 6 수리(數理)가 요동치는 북방에서

()의 첫 활자가 빙산처럼 돋았다 스러진다

검은 겨울의 물결이 출렁이며

칠산 바다 거대한 만조를 밀어 올린다

십자 축을 모태로 열리는 3 · 8 수리의 동방

싹을 틔우는 푸른 기운 서려 맺히고

2 · 7 수리로 꽃 피우는 남방이 열린다

마주 선 4 · 9 수리 서방의 격자 위로

치마폭 걸음걸이에 가을바람이 일어 만삭의 결을 짠다

 

무극과 태극의 핵, 0 · 5 수리가 정중앙 허리를 곧추세우면

착 달라붙는 사방(四方)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친다

플러스 마이너스 찌리릿 전기로 빚어지는 암수의 세상

활판의 어느 결에서도 숫자는 생()과 성()의 짝을 이루며

치우침 없는 거대한 균형을 붙잡고 있다

고개 들어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태양과 달, 5 2.35의 정밀한 인력

허공의 밀당이 짱짱한 열두 달을 책장처럼 엮는다

 

미래의 그물망 속에는 은빛 조기들이

이미 제 몫의 주인을 정한 채 파닥이고

보름간마다의 우주적 자비를 머금은 채

하나의 정지된 밀화(密畵)로 박힌다

감았던 눈을 떠 가만히 차원의 덮개를 닫자

상생(相生)으로 빛을 뿜던 활판이 고요히 침전한다

 

제 몫 다한 덮인 활판 적막의 자리에

복희씨부터 김일부선생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와 거대한 발자국 찍는다

 

 

 

 

[평론] 주역(周易)의 비경, 우주적 활판 위에 수놓은 은유의 성좌

정동재의 시 시공간 조판소의 관찰 기록

 

 

정동재의 시는 고전 철학의 중후한 법도와 현대적 SF 공학의 전위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탄생한 찬란한 언어의 모자이크다.

시인은 대학(大學)의 고색창연한 현판을 문을 여는 열쇠로 삼아, 독자를 칠흑의 허공 속에 명멸하는 우주적 조판소라는 환상적 시공간의 심연으로 날카롭게 침투시킨다. 가로누운 여인의 몸에서 번진 푸른 혈흔이 태초의 활자가 되는 순간, 시어들은 차원을 가로지르는 눈부신 감각의 세례를 받으며 일제히 깨어난다.

 

이 작품의 미학적 정점은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심오한 수리(數理)를 시각적·촉각적 이미지의 축제로 만개시킨 전개에 있다. 1·6 북방의 빙산과 거대한 만조, 3·8 동방의 푸른 기운, 4·9 서방의 치마폭에 감기는 만삭의 가을바람은 추상적인 우주 법칙을 밀도 높은 색채와 역동적인 질감으로 현현 시킨다. 음양의 대립을 플러스 마이너스 찌리릿 전기라는 현대적 위트로 변주하면서도, ‘5 2.35’라는 정밀한 수치로 우주의 짱짱한 인력을 붙드는 묘사는 치밀하면서도 화려한 지적 변증법의 극치를 보여준다.

 

결국 이 시는 은빛 조기가 파닥이는 운명의 그물망 속에서 우주적 자비를 길어 올리고, 복희씨에서 김일부로 이어지는 도()의 거인들을 역사의 적막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게 만듦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특히 시의 종장을 김일부(金一夫) 선생의 발자국으로 매듭지은 마무리는 이 작품의 사유를 우주론적 관측에만 가두지 않고 구원의 영역으로 도약시킨다. 이는 시공간 조판소의 관측 기록이 비틀어져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로 신음하던 인류를 향한 안타까움이자, 건곤감리손진간태(乾坤坎離巽震艮兌)의 팔괘가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아 재정립되는 거대한 개벽의 선언이다. 시인은 이로써 1360일의 정역(正易)적 상서(祥瑞)가 무르녹는 지상선경(地上仙境)의 풍경화를 활판 위에 온전히 풀어놓는다.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동양적 사유의 정수를 현대적 회화미로 연금해 낸 격조 높고 수려한 시적 도편(圖版)이며, 뒤틀린 시공간을 바로잡아 상생의 신세계를 직조해 낸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기록화이다. (평론: 정동재)

 

 

저자소개
노벨문학상이 지상의 최고 언어인 한국어의 정수를 깨닫지 못한 채  주로 상형문자 집단에 머물러 있다는 점, 그리고 문학의 정수이자 경전인 시(詩)조차 비유와 은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 언어를 함부로 농락하는 문단의 아픈 현실 앞에서, 시인 정동재는 한국 문학사에 전편(全篇) '평론시집'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그는 철학, 종교학, 수리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등등 천문, 지리, 인사를 넘나드는 '영적 물리학'의 세계를 통해 기존 문학의 틀을 깨부수고, 우주의 탄생부터 완성까지를 관통하는 거대한 '천지인(天地人)의 설계도'를 펼쳐 보인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하늘을 만들다》, 《살리는 공부》,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가 있으며, 전편 평론시집 《하느님 이름 지어보기》, 《물리학으로 하느님 이름 지어보기》, 전편 평론시선집 《말못병 하느님》, 그리고 대장정의 전편 평론시선집 완결판인 《안귀령의 전력질주》가 있다.

 

 

https://bookk.co.kr/bookStore/6a2f78ebf3403375ddf4355c

 

안귀령의 전력질주 - 정동재

비유와 은유라는 시적 언어가 혹여 독자분들께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지난 시간 오랫동안 깊은 고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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