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도 지방에서는 왜 제사상(祭祀床)에 빵을 올리게 되었을까요?
천해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세계적인 관광도시 제주도가 역사적으로 볼 때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고통과 절망의 섬이었다면 믿어지겠습니까?
고려 말에는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對蒙抗爭) 최후 근거지(1271~1273년)였으며, 삼별초 항쟁을 진압한 원나라(몽고가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세운 왕조)는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300년)를 설치하고 제주도를 지배했습니다. 조선시대는 왜구(倭寇)에 의해 빈번한 침략을 당했고, 절해고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정적(政敵)들은 중앙권력에서 격리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유배지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서 천주교의 폐단과 중앙관리의 조세 수탈이 원인이 된 이재수의 난(제주교안濟州敎案, 1901년)이 일어났고, 제주 4•3항쟁(1948년)은 빨갱이라는 미명아래 제주도 인구의 1/10인 3만명이 학살 당하는 끝나지 않는 비극으로 남아 있습니다.
과연 세월의 망각으로 고통과 절망이 단절 되어진 것일까요? 그들의 비극은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는 점에서 눈물과 한숨의 되새김질을 반복하는지도 모릅니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그 풍토가 매우 척박합니다. 논 농사는 거의 어려우며 밭 농사가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보리, 조, 메밀, 콩 등 잡곡과 감자, 고구마를 주로 재배하였습니다. 주식은 당연히 보리밥과 조밥이었으며, 바다에서 잡아온 어패류가 주요 반찬을 이루었습니다. 쌀밥은 제삿날에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으로 그 쌀을 뭍에 나가서 구입해야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보리, 조, 메밀이 흔하다 보니 요즘도 보리로 만든 보리 쉰다리, 보리 상외떡과 조로 만든 오매기 떡, 오매기 술, 그리고 메밀로 만든 빙떡, 메밀국수가 향토음식으로 유명합니다.
제주도 보리빵에 대해서 자료를 정리하다가 제주도에서는 제사상에 빵을 올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월이 변하니 풍습도 달라진 것일까요. 유교적 전통에 따르면 제사상에는 떡을 올리는 것이 당연한데 빵을 제수(祭需)로 사용한다니 공연히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물론 지역적 특성과 특산물에 따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이 다소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빵을 올린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초상 때 빵을 부조금 대신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제주도 지방에서는 왜 제사상(祭祀床)에 빵을 올리게 되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겠으나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과 보리빵에 대한 어원의 다양한 사용을 토대로 그 기원을 추정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으로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이라는 점입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산간 지대에서는 밭농사와 목축업이 성행했고, 바다와 인접한 어촌지역에서는 밭농사보다 어업이 중요한 생활이었습니다. 더구나 섬 전체가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지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물이 쉬이 빠져버려 논농사를 짓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으며, 밭농사도 메마른 토양에 잘 자랄 수 있는 곡물을 심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요작물의 대부분이 보리, 조, 메밀이었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 제사상에 쌀밥과 떡을 올리려면 심지어 뭍에서 사와야 했지요.
흰 쌀떡인 곤떡이나 쌀 시루떡인 곤침떡을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제주도의 전통적인 제례풍속이었지만, 마을이 위치한 지역에 따라서는 돌래떡, 빙떡, 오매기떡, 보리상애떡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돌래떡은 메밀가루, 멥쌀가루, 보릿가루를 섞어 반죽한 떡으로 돌래다대떡으로 부르며, 빙떡은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고 넓은 전으로 부친 다음 양념을 한 무채를 속으로 넣고 김밥처럼 말아서 만든 떡으로 ‘빙빙 감아 먹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매기떡은 차조(차좁쌀)가루로 반죽을 한 뒤 둥글게 빚어서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시루에 찐 다음 볶은 콩가루를 묻힌 떡이고, 보리상애떡은 밀가루와 보릿가루에 술을 넣어 반죽하여 발효시켜 만든 찐 떡으로 술떡이라 합니다.
쌀이 귀하다 보니 다양한 곡물가루를 사용하여 떡을 만들고 그것을 쌀로 만든 떡 대신에 제사상에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제주도에서 제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마을제(포제), 영등제(영등굿), 백중제, 조왕제, 칠성제, 당제(당굿), 문전제(문전코시) 등의 무속의례가 많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주로 돌래떡, 오매기떡, 상애떡, 빙떡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쌀떡과 곡물떡의 구별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을 중심으로 조사한 진성기씨의 글에 의하면 제사와 무속의례에 사용하는 떡은 서로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의 구별에 의하면 제사떡은 3년상을 중심으로 서로 달라서 이전에는 제편, 은절미, 절변, 우찍, 과질, 중과, 약과, 강정, 요애 등을 올리고, 3년상 이후에는 빙떡, 만디, 조개솔편, 상의, 낭왜, 조절편 등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무속의례시에는 돌래떡, 월변, 조매떡, 각변, 시리 등이 차려졌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제사상에 올리는 떡으로 ‘상의’가 눈에 띄는데, 상의는 밀가루와 보릿가루에 술(누룩)을 붓고 반죽하여 부풀게 만든 떡으로 빵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보리빵에 대한 어원의 다양성을 조사하면 빵이 제사상에 오르게 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 상화점에 나오는 상화와 제주도 보리빵(보리상애떡)
둘째로 보리빵에 대한 어원의 다양성을 조사하면 빵이 제사상에 오르게 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주도에서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제주도 보리빵은 그 맛도 독특하지만 먹어도 물리지가 않습니다. 수 백년 동안 생활 속에서 만들어 먹었던 음식만이 가질 수 있는 저력이 아닐까요?
보리빵을 만들 때 보릿가루만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일정 비율의 밀가루를 섞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밀가루 속에는 글리아딘(Gliadin)과 글루테닌(Glutenin)이란 단백질이 들어 있어서 물을 넣고 반죽하게 되면 글루텐(Gluten)이 만들어 집니다. 글루텐은 빵을 만들 때 조직구조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모양을 만들 때(성형)는 외상의 형태를 유지하도록 하고 발효시에는 그물망처럼 퍼지는 내상구조를 만들어 부드러운 빵이 되도록 하기 때문이지요.
특히 보리빵을 만들 때 술(누룩)을 사용하므로써 조상들의 생활 속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각 가정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주로 곡식을 발효시켜 술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술이 익어가는 것은 빵이 발효되어 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보리빵에 술이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발효법이라 하겠습니다.
만약에 보리빵에 술을 넣지 않아서 발효가 안된 체 만들어졌다면 어떤 상태가 되었을까요?
보리빵이 아니라 보리떡이 되는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딱딱해져 버리는 보리떡을 두고두고 먹을 사람은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제주도의 향토음식 중 눈에 띄는 것으로 상애떡, 보리상애떡이 있습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이 용어가 제주도에서만 여러 어원들과 섞여 혼용되고 있습니다. 상왜떡, 상외떡, 삼메떡, 상의, 보리상외떡 등이 그것입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상애떡, 상왜떡, 상외떡, 삼메떡은 밀가루를 사용하여 만드는 것으로 같은 어원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또 보리상애떡과 보리상외떡은 밀가루와 보릿가루를 섞어 반죽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상애떡은 어떻게 만든 떡일까요?
한복진씨가 쓴 ‘우리음식 백가지 1’의 증편에 보면 “증편은 달착지근하면서 새큼한 맛이 감도는 술떡으로 기주떡, 기지떡, 기증병, 벙거지떡, 상화, 상애떡 등으로도 불린다. 찐빵처럼 보풀려서 쪄내며 여름철이 제격이다”고 했습니다.
제주어 사전(濟州語 辭典, 1995)에는 상왜떡과 삼메떡을 “밀가루에 꿀과 막걸리를 조금 넣어 되게 반죽하고 만두 모양으로 만든 뒤 더운 방에 두어서 부풀어 오르게 하여 찐 떡”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앞서 말한 진성기씨의 글에 “상의는 밀가루와 보릿가루에 술(누룩)을 붓고 반죽하여 부풀게 만든 떡으로 빵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상애떡, 상왜떡, 상의는 표기가 약간씩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더군다나 한복진씨가 기술했듯이 상애떡과 상화가 같은 것으로 본다면 어원의 시작은 상화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상화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악장가사(樂章歌詞)의 쌍화점(雙花店)에 나오는 음식으로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합니다. 쌍화점은 한글로 수록된 고려가요(高麗歌謠)이기도 하지요.
첫째 절의 가사인 “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딘 ,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는 내용에서 말하는 쌍화(雙花)가 상화 혹은 상애떡입니다.
쌍화(雙花)는 문헌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문표기의 변화에 대해서는 떡의 모양이 ‘서리꽃처럼 희고 아름답다’는 의미로 상화(霜花)떡, 상화병(霜花餠)으로 불렀습니다. 옛 문헌인 고려사와 고려도경(高麗圖經), 음식디미방,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상화(霜花), 상화병(霜花餠) 만드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그렇게 쓰였던 것 같습니다.
상화는 고려시대에 원(元)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밀가루에 술을 섞어 반죽하여 팥소를 넣고 발효시킨 뒤 쪄낸 증편입니다. 예전에는 빵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니 발효를 시켜 만든 것도 당연히 떡이라 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화떡을 찐빵으로 볼것인가 아니면 만두로 볼것인가 하는 점에는 여전히 의견이 갈리고 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만두와는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쌍화점에 나오는 쌍화(雙花) 즉, 상화(霜花)는 책 속의 고려가요에나 존재하고 있을 뿐 일상생활에서는 사라진 언어가 되었습니다. 떡 이름에서도 주석으로만 쓰이고 있었지요.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 우리 겨레의 세시풍속인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날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물맞이를 하며 유두면, 수단, 상화떡(霜花餠) 등을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시대까지도 상화떡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밀가루를 누룩이나 막걸리로 반죽하여 부풀려 꿀팥으로 만든 소를 넣고 빚어 시루에 찐 떡이라고 하니 내용적 의미도 같습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여전히 쌍화떡을 만들어 먹고 있었습니다. 수리날(음력 5월 5일)에 수리취떡, 설기떡, 상화떡을 만들어 민속놀이를 즐기면서 먹는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온 이산가족 방문단에게도 만들어 대접했다지요. 상화떡을 만들기 쉬운 떡이라 하여 쉬움떡, 술을 넣는다고 해서 술떡으로 부르는데, 북한 조선말대사전에는 "쌀가루의 4분의 1을 익반죽하고 나머지는 감주로 반죽해 섞은 다음 설탕과 중조물을 두고(섞어) 쪄낸 떡"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고려시대의 상화떡이 이름과 내용을 그대로 보듬은 채 제주도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상애떡, 상왜떡, 상외떡, 삼메떡, 상의, 보리상애떡, 보리상외떡은 상화와 매우 유사한 어절의 소리글자입니다. 그리고 떡을 만드는 방법도 거의 같습니다. 혹자는 제수음식에서 제외한다는 의미의 상외떡으로 해석하지만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상애떡에서 보리상애떡으로 변화한 것은 제주도만의 지역적 특징입니다.
떡을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농경문화의 오랜 풍습입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종묘제사에 쌀떡(白餠), 수수떡(黑餠), 술떡, 인절미를 올렸으며 조선시대의 종묘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절구나 떡메로 쳐서 만든 친 떡을 떡살문양으로 눌러 자른 절편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또 추석에는 송편을 설에는 떡국도 올려졌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는다고 생각하는 팥 시루떡은 금기시했습니다. 떡을 제수로 사용할 때 그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에 관한 의례가 삼국시대의 조상신을 섬기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한 유교적인 조상숭배 제도로 변하면서 절차와 의식이 까다롭고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나 집안과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어서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속담처럼 제수차림에 대해 참견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예로부터 제사에 상애떡, 상의, 보리상애떡을 올리게 된 것은 쌀농사보다 보리농사를 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보리상애떡은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보리빵입니다. 빵이란 말 자체가 없었을 때는 조상들이 부르던 말 그대로의 보리상애떡이었던 것이지요.
<참고자료>
1. 역주 탐라지(譯註 耽羅志), 도서출판 푸른역사 간(刊), 이원진(李元鎭, 조선 효종 4년(1653년) 제주목사) 씀, 김찬흠 외(外) 옮김, 2002년 7월
2.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제주도 유배인 열전, 문학과 지성사, 양진건 저(著), 1999년 1월
3. 새로 쓰는 제주사, 휴머니스트 발행(發行), 이영권 지음, 2005년 7월
4. 제주도의 세시풍속의 특징, 문두병 글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5. 우리음식 백가지 1, 현암사, 한복진 글, 1998년 12월
6. 제주도에 감수꽈, 신라출판사, 전연술, 2004년 5월
7. 제주의 역사와 문화, 통천문화사, 국립제주박물관, 2001년
8. 高麗歌謠 語彙의 硏究, 김완진, 학술원논문집(인문 사회과학편) 제39집, 2000년 1월
<덧붙이는 글>
1. 음식디미방은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라고 하며 음식지미방(飮食地味方)으로도 불립니다. 안동 장씨(安東張氏)가 70여세(1670년경)에 한글로 손수 쓴 조리서입니다.
2.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에 나오는 상화병(霜花餠)을 양주동씨는 “밀가루를 물에 버무려 콩(팥)이나 깨를 싸아 꿀을 더하여 쪄내니, 일러 상화병(霜花餠)이라 한다.(以小麥麵溲而包豆荏, 和蜜蒸之, 曰霜花餠)”고 해석했습니다.
3. 악장가사(樂章歌詞)에 한글로 수록된 쌍화점은 고려가요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쌍화점과 비슷한 둘째 절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서 고려 충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절의 가사인 “쌍화점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딘 ,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싸미 이 점(店) 밧긔 나명 들명, 다로러 거디러 죠고맛간 삿기 광대네 마리라 호리라.”(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 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는 내용에서 말하는 쌍화(雙花)가 상화 혹은 상애떡입니다.
4. 규합총서는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년)가 1809년에 한글로 쓴 생활백과서로 주식의(酒食議), 재의(裁衣), 직조(織造), 수선(修繕), 염색(染色), 문방(文房), 기용(器用), 양잠(養蠶)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 문전제(門前祭)는 문전코시(門前告祀)라고도 합니다. 제주도지방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전에 제사상보다는 작은 상차림을 따로 마련하여 마루에 놓고 간단하게 고사를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하지 않는 독특한 의식이지요.
그런데 유년시절(경남 울산)의 제사 기억을 떠올려 보면 형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방법으로 고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향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 오른쪽에 작은 상을 함께 차려 놓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그 작은 상을 마루로 옮긴 뒤 할머니께서 대문을 향하여 고사를 지내고 음식의 일부를 담아 대문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
6.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주자(朱子, 1130~1200년, 주희 朱熹)가 관(冠), 혼(婚), 상(喪), 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하여 서술한 책으로 주자학이 조선시대의 기본사상으로 정립되면서 예제(禮制) 기준으로 보편화되었습니다.
주자가례의 상제와 관련하여 17세기 남인과 서인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은 피비릿내 나는 당쟁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왕실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년 효종의 승하로 일어난 상복에 대한 논쟁)과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별세하자 일어난 상복에 대한 논쟁)은 상복(喪服)을 기년복(朞年服, 1년상)으로 할 것인가와 대공복(大功服, 3년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겉으로 들어난 예송논쟁의 내용은 서인(송시열 宋時烈)이 주희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한 철학적 주장이었다면 남인(허목 許穆)은 육경(六經)의 고전예학(古典禮學)에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