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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자료

논산(반야산) 관촉사

작성자목경찬|작성시간23.12.11|조회수138 목록 댓글 0

반야산(般若山) 관촉사(灌燭寺)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254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창건 및 연혁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석조미륵보살의 조성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관촉사는 고려 혜명스님의 석조보살상의 불사로부터 부각되었다.

혜명스님은 백여 명의 장인과 함께 970년 석조미륵보살상의 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완성했다. 창건 당시 관련된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아래 <전해지는 이야기> 참조)

 

성보문화재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미륵전, 대광명전, 삼성각, 명부전, 반야루, 해탈문, 사천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 보물), 석등(보물), 배례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석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이름처럼 미륵보살로 유명하지만, 관음보살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2023년 12월) 관촉사 홈페이지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이라는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전해지는 이야기

1.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사제촌에 사는 한 여인이 산 서북쪽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니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났다. 이상하게 여겨 집으로 돌아와 사위에게 말하였다. 사위는 관에 고하였고, 관은 다시 조정에 보고하였다.

백관이 모여 회의를 하여 이는 불상을 조성하라는 조짐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혜명스님을 중심으로 백여 명의 장인과 함께 광종 21년(970년)에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솟아난 바위로 허리 아랫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곳에서 12km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었다.

드디어 목종 9년(1006년)에 불상이 완성되어 천명을 동원하여 도량으로 운반하였다. 그런데 아랫부분이 워낙 거대하여 가슴과 머리 부분을 올릴 방법이 없어 스님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아이들이 흙으로 불상을 만드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밑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 다시 모래를 쌓은 후 맨 윗부분을 올려놓았다. 이를 본 스님은 그 방법을 깨달아 불상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주었고, 찬란한 서기가 21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불상에서 빛이 나와 사방을 비추었다. 이때 중국에서 지안스님이 그 빛을 쫓아와 예배하고, 그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고 하였다.

 

2.

그 뒤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기 위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였다. 삿갓을 쓴 스님이 얕은 내를 건너듯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거란군은 얕은 곳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물에 뛰어들다가 거의 몰살하게 되었다. 거란군의 장수가 크게 노하여 그 스님을 칼로 치니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관촉사 은진미륵의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그 강을 건너던 스님이 바로 은진미륵이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은 그나마 산산조각이 나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가 조선 숙종 때에 다시 붙였다. 현재 은진미륵 보관 한쪽 끝에 이어 붙인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때의 상처다.

 

3.

은진미륵의 상처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조선 순종 3년(1909)에 세 명의 일본 사람이 불공을 드린다면 관촉사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은진미륵 보관 끝에 놓여 있던 금불상을 모두 훔쳐 가고, 이마에 있는 광명주마저 깨뜨려버렸다. 이때부터 은진미륵은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우람한 모습으로 논산 넓은 들판을 자비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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