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에 찍는 짧은 쉼표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하지
24절기는 태양이 움직이는 길(황도)을 15도 간격으로 나누어 만든 전통 역법이다. 즉, 24절기는 양력을 근간으로 삼아 태양이 15도씩 이동할 때마다 나타나는 기후 변화에 주목해 만들어졌다.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글자 ‘立(입)’이 들어간 입춘(立春)·입하(立夏)·입추(立秋)·입동(立冬)은 언제나 2·5·8·11월 초순에 위치한다. 한편 사주명리학에서는 새해 첫날을 설날이 아니라 입춘 시점으로 보며, 이때를 기준으로 그해의 띠가 바뀐다고 판단한다. 새해의 시작을 곧 봄의 시작인 입춘으로 여긴 셈이다.
하지(夏至)는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이와 반대로 동지(冬至)에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길어진다. 하지의 낮 길이와 동지의 밤 길이는 각각 약 14시간 40분에 달한다. 이처럼 한자 ‘至(지)’는 24절기 중 밤낮의 길이가 극에 달한 날을 나타낸다. 반면 ‘分(분)’자가 들어가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 결국 춘분(3월 20일경)에서 하지(6월 21일경)에 이르기까지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고, 추분(9월 22일경)에서 동지(12월 22일경)까지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길어진다. 하지의 낮 길이와 동지의 밤 길이는 각각 약 14시간 40분에 달한다. 이처럼 한자 ‘至(지)’는 24절기 중 밤낮의 길이가 극에 달한 날을 나타낸다. 반면 ‘分(분)’자가 들어가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 결국 춘분(3월 20일경)에서 하지(6월 21일경)에 이르기까지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고, 추분(9월 22일경)에서 동지(12월 22일경)까지는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다만 남반구는 북반구와 반대여서 하지에 낮의 길이가 가장 짧다. 이 시기 호주 남부 도시들의 날씨가 한국의 늦가을에서 초겨울 날씨와 비슷한 이유이다.
| 월(양력)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 24절기 | 소한 | 입춘 | 경칩 | 청명 | 입하 | 망종 | 소서 | 입추 | 백로 | 한로 | 입동 | 대설 |
| 대한 | 우수 | 춘분 | 곡우 | 소만 | 하지 | 대서 | 처서 | 추분 | 상강 | 소설 | 동지 | |
| 낮과 밤 | ◐ | ○ | ◑ | ● |
낮이 길어 할 일 많고 노동 강도 강했던 하지
6월 하지 무렵은 모내기를 마치고, 보리, 밀, 감자 등을 수확하고 밭작물을 파종하며 장마에 대비하는 등 본격적인 여름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모내기는 늦어도 하지 전까지는 무조건 마쳐야 한다. 보통 5월 초에서 6월 말 사이에 모내기가 이루어지는데, 하지 이후에 심은 벼는 생육 기간이 부족해 성장에 크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라는 속담이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 무렵에는 보리를 수확한 자리에 콩, 팥, 조 등을 새로 심고, 비가 올 때를 맞춰 들깨 모종을 밭에 옮겨다 심는다. 5월에 미리 심어둔 고추와 고구마, 감자밭의 잡초를 뽑아낸 뒤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고 웃거름을 주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또한 장마철 강한 바람에 고추나 토마토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주대를 세워 단단히 고정해준다.
하지 무렵 수확하는 봄 감자 ‘하지 감자’ (출처: 필자 제공)
하지가 지나면 알곡이 떨어지기 쉬운 보리와 밀 등을 서둘러 베어내고, 땅속에서 알갱이가 썩을 염려가 있는 마늘과 양파도 수확하여 볕에 잘 말린 뒤 저장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덜 익은 보리 이삭을 불에 그슬려 손으로 비벼 먹는 ‘보리그스름’이 아이들의 훌륭한 영양 간식이자 놀이였다. 하지 무렵 수확한 마늘은 알이 꽉 차고 맛이 가장 좋은데, 이때 뽑은 마늘종으로 장아찌를 담가 여름철 밑반찬으로 삼았다. ‘하지 감자’라는 말이 있듯, 이 시기에는 봄감자를 수확해 갈무리한다. 하지가 지나면 감자 싹이 마르고 죽기 때문에 이를 ‘감자 환갑’이라 불렀다. 하지 감자는 포슬포슬하니 맛이 가장 좋아 전을 부치거나 삶아 먹었으며, 강원도 지역에서는 감자 전분으로 송편을 빚어 먹으며 풍년을 기원했다.
김홍도의 〈점심〉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는 낮이 길다 보니 그만큼 노동 시간이 길어지고 노동 강도도 세기 마련이다. 모내기를 끝낸 지역에서는 하지 무렵 김매기(잡초 제거)를 시작하고, 마을 주민들은 ‘두레’를 결성해 공동으로 김매기를 하며 풍물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고된 노동을 달랜다. 이때 새참으로 곁들이는 막걸리는 더위와 갈증을 달래주는 최고의 강장제였다. 막걸리는 농가에 필수적인 술이라 하여 ‘농주(農酒)’, 맑은 술(청주)을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거칠게 걸렀다 하여 ‘탁주(濁酒)’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막걸리에 세금을 매기기 위해 집에서 술을 빚는 가내 가양주를 전면 금지하고, 양조장에서만 술을 사 먹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농번기 필수 음료인 막걸리를 농가에서 몰래 빚다 발각되면 술을 빼앗기고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 때문에 점차 농촌에서는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마시게 되었다. 어린 시절 막걸리 심부름을 갔다가 노란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훔쳐 마시다 취했던 기억은 이 시대를 거친 이들의 공통된 추억이기도 하다.
막걸리의 주재료는 본래 쌀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쌀이 귀해지자 정부는 1966년 8월 26일 약주와 탁주 제조에 미곡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이때부터 고구마나 밀가루가 쌀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197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쌀 막걸리 제조가 다시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미 원가 절감에 익숙해진 제조업자들이 밀가루 막걸리만을 고집하는 바람에, 100% 쌀로 만든 막걸리는 1990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시장에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청춘들이 즐겨 마시던 막걸리가 사실은 쌀이 아닌 밀가루 막걸리였던 셈이다.
양력 하지와 음력 단오(端午)의 교차
6월 하지 즈음이 되면 음력 5월 5일 명절인 단오를 쇤다. ‘일 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을 단오라고 부르는 이유도 낮이 가장 긴 하지 무렵에 단오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단오는 홀수가 겹치는 기수(奇數) 날이라 생기(生氣)가 배가된다고 여겼다. 이외에도 음력 1월 1일(설), 3월 3일(삼짇날), 7월 7일(칠석), 9월 9일(중양절)처럼 홀수가 겹치는 날을 중요한 명절로 삼았다.
『동국세시기』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단오날 먹었던 수리취떡 (출처: 필자 제공)
단오를 비롯해 중오절(重五節),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 등은 중국식 한자 표기이다. 이 때문에 우리 단오 풍속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한국과 중국의 단오 풍속은 완전히 다르다. 단오를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은 ‘수릿날’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단옷날 산에서 자라는 수리취라는 나물을 뜯어 떡을 해 먹거나 쑥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어 수릿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에는 “단오 옷을 술의(戌衣)라고 한다”라며, 술의란 신의(神衣), 곧 태양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의상이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즉 수레바퀴나 술의 등은 태양신을 상징하므로 단오 축제는 ‘태양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수리’는 신(神)이나 ‘높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단오는 결국 ‘지고(至高)한 신이 하강하는 날’이라는 의미가 된다.
단오가 드는 음력 5월은 예전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쉬운 나쁜 달이라 하여 ‘악월(惡月)’이라 불렀다. 선조들이 태양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수릿날에 태양을 상징하는 수리취떡을 먹고 술의를 입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옷날 쑥을 뜯어도 햇빛이 가장 강한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뜯어야 약효가 제일 좋다고 믿었다. 또한 전염병 같은 액운을 막기 위해 문에 부적(단오부·천중부·치우부)을 붙이고, 장명루(색실로 짠 팔찌)와 옥추단(알약 모양의 호신용 귀걸이)을 차고 다녔다.
『세시풍요』는 단옷날 여성들의 풍경을 시로 노래하고 있다.
단오 옷은 젊은 낭자(娘子)에게 꼭 맞으니 (戌衣端稱少娘年)
가는 모시베로 만든 홑치마에 잇빛이 선명하다 (細苧單裳茜色鮮)
꽃다운 나무 아래서 그네를 다 파하고 (送罷秋天芳樹下)
창포뿌리 비녀가 떨어지니 작은 머리털이 비녀에 두루 있다 (菖根簪墮小髮偏)
단오옷을 술의(戌衣)라고 한다 (端午衣曰戌衣)
위 시에는 모시치마, 그네, 창포뿌리 등이 등장한다.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와 얼굴을 씻고 새 옷을 입은 뒤 창포 비녀로 치장하는 것을 ‘단오장(端午粧)’이라 부른다. 모시치마는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복장이고, 그네는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기 전 체력을 달련하는 방법이며, 창포뿌리는 질병을 막기 위한 염원이었다. 창포뿌리로 만든 비녀를 머리에 꽂으면 두통이 사라진다고 믿었는데, 실제로 한방에서는 창포뿌리가 치통이나 하혈에 효능이 있다고 본다.
남자들 역시 씨름, 격구(擊毬), 석전(石戰) 등을 통해 몸을 단련하며 무더위를 이겨내고자 했다. “단오 부채, 동지 책력”이라는 말처럼 단오가 되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는 의미로 부채를 서로 선물했다. 또한 단오 무렵에는 제철 과일인 앵두를 깨끗이 씻어 씨를 뺀 뒤 설탕이나 꿀에 재워 두었다가, 오미자 국물에 띄워 먹기도 했다. 그야말로 선조들이 즐긴 여름철 최고의 청량음료였던 셈이다.
「단오풍정」 (출처: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단오풍정〉은 단오 풍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을 보자. 산에서 흐르는 물에 네 명의 기생들이 목욕을 하고 있으며, 한 여인은 목욕하는 이들을 보면서 그네에 발을 얹고 있다. 그네 뒤 두 명의 기녀는 산자락에 앉아 올림머리를 풀고 정돈하고 있다. 방물장수는 머리에 봇짐을 이고 기녀들에게 화장품, 복식 등을 팔기 위해 계곡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두 청년이 기녀들의 목욕하는 모습을 바위 뒤에서 훔쳐보고 있다.
필자는 이 그림을 단오가 아니라, 음력 6월 15일 유두(流頭) 물맞이 풍속을 묘사한 것으로 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유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준말에서 왔다. 양기가 강한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고 목욕하면 부정한 것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려 희종 때의 학자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에도 “동도(東都): 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고 기록하여 유두 물맞이 풍속이 이미 신라시대에 행해졌음을 말한다.
위 기록에 근거하면 신윤복의 풍속도는 기생들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는 유두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네보다 목욕하는 여인들에 주목한다면 유두 풍경임을 알 수 있다. 단오 때 여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를 삼고, 창포를 넣어 삶은 물로 머리를 감았다. 즉, 단오에 여성들은 집안에서, 유두는 산의 계곡을 찾아 목욕을 하며 물맞이를 한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상식』에는 여자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의 정릉계곡, 광주의 무등산 물통폭포, 제주도의 한라산 성판봉(城坂峰) 폭포 따위를 꼽았다. 이 말은 산의 계곡이나 폭포에서의 물맞이는 여성들이 하였으며, 남성들은 강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더위를 잊었다. 즉 유두절에 남녀가 각각 즐기는 장소를 구분하여 남녀의 내외를 지켜준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젊은 머슴들이 몰래 기녀들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본 것을 신윤복이 놓치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 참조 “더운 여름 물맞이, 유두(流頭) 풍속”)
목숨 걸고 비를 바랐던 선조들의 절박함, ‘기우제’
하지 전후로 내리는 비는 ‘하지물’이라 부르며 금쪽 같이 귀하게 여겼다. 이 시기에 비가 오면 모내기가 수월해지고 벼가 자라는 데 큰 도움이 되어 그해 농사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 이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천신(天神)·용신(龍神)·산신(山神) 등 다양한 신격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농경 사회였던 옛날, 가뭄은 단순히 날씨가 더운 것을 넘어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대재앙이었다. 농사가 망하면 민심이 흉흉해지고 결국 왕권까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하지(夏至)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비가 내릴 때까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우제를 지냈다. 절박했던 기우제는 크게 세 가지 ‘논리적 방식’으로 치러졌다.
① 용을 향한 정성, 그리고 ‘협박’
충남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 기우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민간에서 비를 관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용(龍)’이었다. 사람들은 정성껏 용의 형상을 만들어 굿을 하기도 했지만, 가뭄이 길어지면 태도를 바꾸어 용을 협박하고 괴롭혔다. 용의 신체로 인식한 산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번시 燔柴). 천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의미도 있었지만, 검은 연기가 검은 구름을 불러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밤중에 불을 피우면 그을음이 응결핵 역할을 해 과학적으로도 비가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 용의 서식지 위협하기도 하였다. 용이 사는 연못을 일부러 말리거나, 용 모양 바위에 불을 질러 용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서둘러 비를 내리게 만들었다.
② 라이벌 투입과 ‘부정(不淨) 타기’ 작전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디딜방아 기우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용을 자극하거나 하늘을 번거롭게 만들어 비를 짜내기도 했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처럼 용의 천적인 호랑이 머리를 한강에 던져 용을 잔뜩 자극했다.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영조 임금까지 한강과 양진(楊津, 서울 광진구 광장동 나루터)에서 10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호랑이 대신 개나 돼지를 던지기도 했다. 용소 주변에 동물의 피를 바르거나, 부녀자들이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와 속옷을 걸어두었다. 세상이 이렇게 ‘부정’해졌으니, 하늘이 이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깨끗한 비를 내려줄 것이라 믿은 역발상 공작이었다. 용과 닮은 도마뱀을 항아리에 가두고 막대기로 두들기며 비를 내리라고 주문을 외웠다(석척기우 蜥蜴祈雨). 조선 태종 때 주문은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라. 비를 흥건중히 내리게 하면 너를 돌아가게 놓아주리라’라고 적혀 있다. 소음을 내어 잠자는 용을 억지로 깨우려는 강요였다.
③ 비를 흉내 내는 ‘모방 주술’
비가 오는 상황을 미리 연출해 하늘을 속이거나 유도하는 방법이다. 물병에 나뭇가지를 꽂아 거꾸로 매달아 물방울이 떨어지게 하거나, 키로 물을 퍼 올리는 시늉을 했다. 기우제를 지낼 때 일부러 비 오는 날 입는 우비인 ‘도롱이’를 입어 비가 오기를 유도했다. 전남 곡성(谷城) 지방에서는 날이 가물면 여성들이 총출동하여 산에 올라가 단체로 방뇨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대량의 물(오줌)을 통해 비가 내리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모방한 행동이었다. 초기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는 부정한 방뇨를 씻기 위해 비를 오도록 하는 ‘역습적(逆襲的) 방법’이라고 해석하였고, 김택규는 대량의 방뇨는 모방 주술적 행위로서 강우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도롱이를 입는 것이 일반적인데, 도롱이는 비오는 날 입는 옷으로, 비가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집필자 소개정연학
인하대, 중국 북경사범대학에서 민속학을 전공했으며, 한중 쟁기 연구를 통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비교민속학회장 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선도문화과 특임교수로 근무하며,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천 물고기 로드』, 『추석』(공저), 『한중 두 나라의 대문과 상징』, 『한중 농기구 비교연구』 등이 있으며, 동아시아 주거민속과 무속과 삶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망종일에 보리타작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