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인물은 시인 윤동주입니다.
지난 10월 11일, 그가 일본 유학 시절 재학했던 도쿄의 릿쿄대학에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윤동주가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 읊었던 그곳에서, 이제 ‘남의 나라’ 사람들이 한국어 시를 낭송하며, 그의 삶과 시심을 기립니다.
80년 전, 만 스물일곱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 그의 ‘무엇’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걸까요?
그의 자취를 조용히 따라가 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윤동주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뛰놀던 고향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윤동주(1917~1945)
북간도 소년
윤동주의 고향은 북간도입니다. 북간도는 오늘날 중국 길림성에 속한 중국 영토이지만, 오랜 시간 한반도와 역사를 함께해 온 곳이지요. 조선이 혼란에 빠지자 애국지사들이 북간도로 이주했습니다. 동쪽, 곧 ‘조선을 밝힌다’는 뜻을 담아 마을 이름을 ‘명동촌’이라 짓고 황무지를 일구며 조국의 미래를 준비했지요. 명동촌은 독립운동의 기지이자 민족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민족운동에 기독교문화가 뿌리내린 신앙촌이기도 했어요.
1917년 겨울 태어난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민족과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습니다. 독립운동가였던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도 컸어요. 아버지는 명동학교 교사였는데, 윤동주가 어릴 적 “해처럼 빛나게 살라”는 뜻으로 ‘해환(海煥)’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기와집, 우물, 과수원, 교회당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여린 감성의 소년 곁에는 마음이 잘 맞는 단짝 두 명이 있었습니다. 친구 문익환과 고종사촌 송몽규. 셋은 유년기와 사춘기를 함께 보내며 서로를 성찰시키고 성장시킨 동무였습니다.
윤동주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소학교 시절에는 잡지 『어린이』를 구독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지요.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시를 많이 읽고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북간도를 떠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다니며 객지 생활을 했던 그에게 시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방에 늘 정지용의 시집을 넣어 다녔습니다. 정지용의 맑은 시어를 좋아했고, 그의 작품을 닮은 서정시를 쓰고자 했지요. 「빗자루」,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같은 제목의 동시도 써보았습니다.
조개껍질 – 바닷물소리 듣고 싶어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놀다
짝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릉아릉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윤동주는 평양에 와서 식민지가 어떤 곳인지를 뼈저리게 체감했습니다. 한반도 안의 현실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북간도와는 크게 달랐지요. 일제강점기라 해도 북간도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일제의 강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1930년대 들어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숭실중학교의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가 교장직에서 파면되었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시위에 나섰습니다. 학교는 결국 휴교에 들어갔지요. 이런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문익환과 윤동주는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 북간도로 돌아갑니다. 이후 용정의 광명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의 분위기도 평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력감, 상심, 분노가 쌓여갈수록 윤동주는 시를 썼습니다. 원고지는 사춘기 소년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지요.
뒤에서 차례대로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평양 숭실학교를 함께 다녔다.
새로운 길
1938년,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경성(서울)행을 결심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원한경이 교장으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로 했지요. 연희전문이 기독교계 학교인 만큼 일제의 강압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문과에 입학해 학기가 시작되자 윤동주는 감격에 찬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무궁화가 피어 있는 캠퍼스를 거닐고, 우리말로 진행되는 강의를 들으며 행복해했지요. 특히 한글학자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 시간에는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했습니다. 손진태 교수의 역사 수업도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었고요. 수필가이기도 했던 영문과 이양하 교수 역시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강의는 문학의 힘에 대한 생각을 다잡게 해주었어요. 윤동주는 마치 새로운 길 위에 들어선 듯했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새로운 길‘ 중에서 1938.5.10 -
윤동주는 새로운 길을 열어갔습니다. 조선일보에 시와 수필을 발표했고, 연희전문 문예부 활동에도 열중했지요. 문과 동급생인 강처중, 송몽규와는 ‘삼총사’처럼 우정을 나누며 꿈을 키워갔습니다. 석조건물인 핀슨홀 기숙사에 있던 그의 방은 친구들의 아지트와도 같았습니다.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을 맡았던 강처중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중략)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문 중에서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학창 시절. 그러나 시대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낭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2학년이 되던 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더욱 노골화했지요. 제3차 조선교육령이 선포되며 학교 수업에서는 일본어만 사용할 것이 강요되었습니다.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조선에서의 강제 수탈과 징용도 본격화되었고요.
암담한 현실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던 최현배 교수는 강제로 해직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이어 문학잡지 『문장』과 『인문평론』까지 폐간됐습니다. 청년 윤동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후 그는 1년간 글을 쓰지 않으며 침묵의 시간 속으로 빠져듭니다.
시대는 엄혹했습니다. 그래도 우정이 있었기에 견딜 만했습니다.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만난 대학 신입생 정병욱은 다섯 살 아래였지만 말이 통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였습니다.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출신, 정병욱은 남쪽 섬이 고향이었어요. 남과 북의 끝에서 온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고, 함께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하기로 했지요. 둘은 인왕산 아래 곳곳을 함께 거닐었습니다. 아래는 후배 정병욱의 회상입니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 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 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송 씨의 부인 조성녀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정병욱,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집문당, 1980
저녁이면 대청마루에 앉아 음악을 듣고 시를 낭송하며 문학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치 옛 시인묵객들이 술 한 잔에 시조를 주고받던 풍경처럼요. 때로는 충무로 책방이나 명동 예술극장에 들르고, 관훈동 헌책방을 순례하기도 했습니다. 음악다방에 앉아 산 책을 펼쳐 보며 음악을 들을 때도 있었지요.
윤동주 하숙집 터는 박노수 미술관에서 수성동 계곡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윤동주가 살던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그 터에 나중에 지은 주택이다.
산책을 좋아하던 윤동주는 아침저녁으로 후배 정병욱과 함께 수성동 계곡에 올랐습니다. 인왕산 오솔길로 접어들면 나뭇잎 사이로 초여름 햇살이 반짝였지요. 연두빛 나무들을 따라 두 사람은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습니다.
계절은 화려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조국의 현실은 초라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뒤 어떤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점점 깊어졌습니다. 상심이 쌓일 때마다 시인은 산책을 나갔고, 그 길 위에서 시를 썼습니다. 시를 써야 걸을 수 있었고, 시를 써야 숨쉴 수 있었으니까요.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중에서 1941.9.31.-
시인의 언덕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윤동주는 인왕산 자락을 산책하며 가슴에 저장해 두었던 시들을 원고지에 옮겼습니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지요. 영감을 받으면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시상을 다듬고 마음속에서 숙성시킨 뒤에야 글로 옮겼으니까요. 그리고는 후배 병욱에게 시를 보여주며 느낌이나 의견을 묻곤 했습니다. 두 사람은 룸메이트이자 길벗이고, 또 글벗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갈수록 삼엄해졌습니다. 일제는 문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묶어 전시 총력체제에 동원했습니다. 존경받던 문인과 지식인들은 창씨개명에 나섰고, 징병 제도를 찬양하며 학생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지요. 변절의 시대이자 광란의 시대였습니다. 하숙집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 정병욱,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집문당, 1980
우리말과 우리글이 금지될수록 시인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문학 청년 윤동주는 문학의 힘을 믿었습니다. 한 줄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시대를 바꾸는 힘이 있다고 확신했지요.
졸업을 앞두고 그는 기념으로 시집을 내고 싶었습니다. 4년간 학교에 다니며 써 둔 시 18편을 골라 모았고, 머리말처럼 한 편의 시를 새로 썼습니다. 제목은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정병욱이 보관했던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서시’를 맨 앞에 두고, 오랜 고심 끝에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로 정했습니다. 윤동주는 필사한 시집을 들고 이양하 교수를 찾아갔지요. 그러나 선생은 출간을 말렸습니다. 검열을 통과하기도 어렵고, 자칫 일본 경찰에 체포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윤동주 역시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지요.
시인은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박탈당한 분노를 「간(肝)」이라는 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책상에 앉아 펜으로 시들을 일일이 필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본은 모두 세 권. 그는 한 권은 자신이 간직하고, 한 권은 이양하 교수에게, 또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건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