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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위기의 시대: 착취당하는 시간과 빼앗긴 미래/정용택

작성자김수영1|작성시간26.06.10|조회수186 목록 댓글 0

가속화된 일상과 돌봄의 진공상태

 

작년 8월,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 에어컨조차 없는 찜통 같은 쿠팡 물류센터에서 상하차를 하던 노동자가 끝내 쓰러졌다(이혜리, 2025). 지난해에만 8명의 쿠팡 물류·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목숨을 잃은 데 이어, 올 2월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었다. 1월 6일 새벽 야간배송 중 쓰러져 투병하던 40대 택배 노동자가 2월 4일 결국 세상을 떠난 것이다(최서은, 2026). 지병 하나 없던 그를 심근경색으로 쓰러뜨린 것은 ‘로켓배송’의 비인간적 속도전이었다. 그는 쉬는 날에도 카카오톡으로 쏟아지는 업무 지시에 시달렸고, 고객들의 평가로 이루어지는 높은 서비스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배송 구역을 빼앗기는 ‘클렌징’(cleansing)의 공포에 쫓겨 휴일 새벽에도 운전대를 잡았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죽음의 행렬은 현대 한국 자본주의가 인간의 생명력을 어떻게 갉아먹으며 삶을 뿌리째 뽑고 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게 한다. 거대한 물류 창고와 새벽의 텅 빈 거리 위에서 노동자들의 몸과 시간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PDA 스캐너의 기계음과 실시간 생산량에 관한 알고리즘의 지속적 통제 아래서, 일상은 숨 돌릴 틈조차 없이 극한으로 쥐어짜인다.

 

오늘날 자본은 시간을 “시간당 처리 건수”(UPH)와 “서비스 수준 협약”(SLA)이라는 계량 단위로 분해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알고리즘이 실시간으로 채점하는 생산주의적 시간 질서를 작업장 전체에 촘촘히 구축한다. 이렇게 설계된 시간 체제는 노동자에게 가능한 한 빠르게, 가급적 오래 일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그 요구를 감당할 생물학적·사회적 조건1)은 체계적으로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몸이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살 수 없는 시간성”(unlivable temporality)을 일상으로 정상화한다(Hincapié, 2025). 결국 야간배송 노동자를 새벽 골목으로 내몬 것은 개별 사업주의 악의가 아니라, 속도를 곧 생산성으로, 정지를 곧 손실로 환산하는 시간 질서 자체였다. 그 질서는 클렌징의 공포를 통해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쥐어짜도록 만들어, 착취를 자기착취의 외양으로 은폐한다.

 

문제는 이 가속화된 노동이 작업장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공장과 물류센터, 사무실과 플랫폼 앱의 알고리즘에 영혼과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퇴근한 이들에게, 가족들과 따뜻한 안부를 묻고 서로의 고단함을 어루만져줄 시간적·정서적 여력은 남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며, 연약한 존재의 곁을 온전히 지켜주는 ‘돌봄’(care)이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시간의 내어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커테이, 2016; 번팅, 2022; 시걸, 2025).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마주한 돌봄의 위기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생률이나 급속한 고령화라는 거시적인 인구학적 지표나 복지 예산 부족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진짜 위기는 파김치가 된 몸으로 마주 앉은 저녁 식탁, 서로의 눈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대화할 시간을 빼앗긴 부부, 아픈 노부모나 어린 자녀를 돌볼 최소한의 여력마저 잃어버린 평범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붕괴에서부터 서늘한 민낯을 드러낸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를 돌볼 힘을 잃어버렸는가?

 

삶 전체를 고갈시키는 추출의 기계

 

흔히 자본주의적 ‘착취’(exploitation)라고 하면 공장노동자의 피땀을 직접적으로 짜내어 이윤을 만드는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의 굴뚝 풍경을 떠올린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제한된 생산 현장에서 노동력을 구매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넘어, 인간의 일상과 사회적 협력, 나아가 생명력 자체를 무상으로 빨아들이는 하나의 조직화된 논리, 곧 ‘추출주의’(extractivism)로 진화하여 작동하고 있다.

 

일반적인 ‘추출’(extraction)이 가치 있는 무언가를 특정 맥락에서 뽑아내는 개별적 행위라면, 추출주의는 그러한 행위들을 체계적으로 극대화하려는 사고방식과 실천들이 하나의 작동 논리로 조직된 것이다. “추출주의적 논리”(extractivist logics)는 자본주의 및 근대성의 구성 형태들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특정한 자원이나 기술보다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사고방식과 이데올로기가 핵심이다(Durante et al., 2022).

 

최근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추출주의가 광물이나 화석연료 같은 천연자원을 파헤치는 물리적 ‘채굴’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자본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조직화 개념”(organizing concept)으로 자리 잡았다고 진단한다(Chagnon et al., 2022). 그럴 때 추출주의의 본질은 종속, 고갈, 비상호성이라는 세 축으로 이루어진 사회생태학적 파괴의 과정으로 설명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추출주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망라한 모든 행위자의 거주지인 지구 행성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정면충돌한다. 지속가능성이 청지기 정신과 상호성, 재생,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삶의 보장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추출주의는 이 모든 조건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반(反)지속가능성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기술적으로는 광산 채굴의 영역을 넘어 전 지구적이고 전방위적인 차원으로 확장된 작금의 “글로벌 추출주의”는 대중의 삶의 방식을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시키고, 사회를 유지하는 내적 자원들을 고갈시키며, 어떠한 호혜적 관계도 맺지 않고 오직 빨아들이기만 하는 비상호성을 뼈대로 한다.

 

과거의 제국주의가 식민지 광산에서 금과 은을 무자비하게 캐내어갔다면, 오늘날의 “팽창하는 추출주의들”(expanding extractivisms)은 새로운 경계면, 즉 자본이 이윤 창출을 위해 가치를 부여하고 포섭하려는 영토화의 ‘전선들’(frontiers)로 끊임없이 넓혀가며 우리의 삶 전체를 식민지이자 광산으로 삼는다. 스마트폰 앱 하나로 모든 노동과 소비가 초 단위로 쪼개져 관리되는 물류의 세계, 우리가 무심코 남긴 일상의 흔적과 관계망 데이터가 알고리즘에 의해 막대한 이윤으로 변환되는 디지털 영역, 끊임없이 빚을 지게 만들어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부채)로 미래의 소득마저 당겨쓰게 하는 금융화된 세계는 전면적인 추출의 작용이 거침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굴착 현장이다. 추출 기계로서의 자본은 이제 인간의 직접적인 노동과 사회적 협력을 스스로 세심하게 조직하고 돌보지 않고도, 외부에서 대중이 자생적으로 만들어내는 부와 삶의 활력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포획하는 무소불위한 인출력을 행사한다(Gago & Mezzadra, 2017; Mezzadra & Nealson, 2017; Post, 2023).

 

이토록 폭력적인 추출의 기계 속에서 가장 먼저, 가장 치명적으로 부서지는 것이 바로 돌봄이다. 돌봄은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곁에 머물며 주의를 기울이는 현존과 상호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치를 뽑아내는 데 혈안이 된 자본의 추출적 작용은 돌봄이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수 조건인 인간의 시간과 정동(affect), 물리적 여력마저 남김없이 수탈하고 고갈시켜 버린다. 돌봄을 행할 시간조차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한 시간으로 압수당한 사회에서, 돌봄의 위기는 필연적 파국이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소외와 텅 빈 내일

 

생명력과 시간을 철저하게 추출당한 대중의 삶에 남는 것은 극심한 소진(번아웃)과 ‘미래없음’(futurelessness)의 감각이다. 금융화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중이 겪는 근본적 소외는 월급봉투가 얇다는 경제적 궁핍을 넘어선 “미래 자체의 상실”로 진단되어야 한다. 미래없음이란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감각이 철저히 경직되고, 협소해지며, 결국 소멸해버리는 현상으로서, 헤겔-마르크스적 소외론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현행 금융자본주의의 특수한 시간성 구조 안에서 새롭게 재구성한 개념이다. 더 나아가 이 개념은 미래 자체를 그저 “장차 도래할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로 보지 않고, 하이데거적 실존현상학의 전통을 빌려 “이 삶 안에서 무언가가 여전히 가능하거나 미결로 남아있다는 감각”으로 이해한다. 가능성의 감각이 자본 축적 메커니즘에 의해 수축되고 폐쇄되는 과정 자체가 곧 소외의 본질인 셈이다(Skotnicki & Nielsen, 2021: 838-849쪽).

 

특히 주목할 것은 미래없음이 막연하고 개인적인 우울감이 아니라,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정치경제학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 개념을 발전시켜온 학자들은 대중이 자본의 가치 증식 과정에 포함되느냐 배제되느냐, 그리고 그 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느냐” “비자발적으로 내몰리느냐”라는 두 가지 축을 교차시켜, 현대인이 겪는 미래없음의 징후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날카롭게 분류한다(Skotnicki & Nielsen, 2021: 849-860쪽).

 

첫째는 “상업적 소진”(commercial exhaustion)이다. 빚을 갚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노동시장에 강하게 포섭된 이들이 겪는 탈진 상태를 뜻한다. 금융자본주의하에서 구글·아마존 등 거대 플랫폼 기업들의 소유 집중 심화 및 주주 가치 극대화 압박은 유연 근무제와 불안정한 스케줄링 같은 착취적 혁신을 낳는다.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플랫폼 노동과 투잡·쓰리잡의 압박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에너지를 현재의 생존에 쏟아부은 나머지, 내일을 기획할 물리적·정신적 여력을 철저히 박탈당한다. 더불어 학자금 대출이나 주택담보대출처럼 수십 년 뒤까지 이어지는 금융적 의무의 사슬은 가능성의 감각을 빚의 무게 아래 짓눌러버린다. 그렇기에 이는 경제적 궁핍을 넘어 “미래가 타인의 것이 되어버린” 상태, 즉 시간적 자율성 자체의 박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는 “치료적 현재주의”(therapeutic nowism)다. 1970년대 이후 포드주의적 대량생산의 위기로 등장한 포스트포드주의적 유연생산체제에 자발적으로 포섭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내 집 마련이나 안정적인 노후 같은 장기적 미래를 포기한 채 찰나의 위안에 매달리는 현상이다. 금융자본주의의 가속화된 “다품종소량생산”과 “맞춤형 소비” 요구와 사회적 돌봄망의 해체가 맞물린 자리에서, 개인은 그 정서적 부담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팍팍한 현실 가운데 장기적 미래를 설계할 수 없으니, 그저 오늘 하루의 고통과 허무를 잊기 위해 무의미한 영상 시청, 과시적 소비, ‘욜로’2)와 같은 말초적이고 순간적인 현재에 자신을 마취시키는 것이다. 요가·명상·자기계발 같은 치료적 기법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지속에 필요한 정서 관리 기술로 광범위하게 제도화되었으며, 겉보기에는 개인적 자율성의 실천처럼 보이지만 집합적 변혁의 가능성을 사적 영역 안에 가두어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정치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가능성의 감각을 소진된 현재에 양도하는 행위다.

 

체제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밀려나 구조적 실업이나 빈곤에 갇힘으로써 희망을 원천 차단당하는 “상상력의 주변화”(imaginative marginalization)도 있다. 극심한 빈곤이나 노숙 상태에 처한 이들에게서 미래에 대한 서사 능력이 점진적으로 소멸한다는 실증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이 소외는 서구 사회에서 주로 인종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적어도 현재까지는) 대체로 ‘지역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예컨대, 유럽이나 북미에서 세대 간 부의 이전이 차단된 유색인종 청년들에게 백인성은 곧 “시간적 자본”으로 작용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투자할 수 있는 감각 자체가 인종적 특권의 산물이 된다. 세대 간 부동산 자산의 이전이 차단된 한국에서는 지방 출신 청년들에게 “서울 출신성”이 곧 시간적 자본으로 작용한다. 강남 학군과 수도권 명문대라는 공간적 좌표가 계층적 신분증이 되는 사회에서, 미래를 기대하고 투자할 수 있는 감각 자체가 출신 지역과 부모의 자산이 결정하는 구조적 특권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 청년 세대가 “수저계급론”이라는 언어로 포착해온 바로 그 현실이기도 하다. 금수저로 태어난 청년에게 미래는 이미 부모 세대가 축적해둔 부동산 자산과 학벌 네트워크 위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질 기회의 지평이다. 반면, 흙수저로 태어난 청년에게 미래는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서기 어려운 서울 집값의 벽 앞에서, 혹은 수도권 대학 출신자 중심으로 재편된 채용 시장 앞에서 반복적으로 좌절되는 절망의 심연이다.

 

결국 어디서 태어났는가, 누구의 자녀인가라는 출생의 우연이 미래를 상상하고 기획할 능력 자체를 사전에 배분하는 사회에서, 지방 출신 청년은 개인적 실패를 넘어 공간과 자산이 시간을 지배하는 구조적 미래없음을 경험한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가능성의 감각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이 냉혹한 사실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미래없음이 단순히 심리적 무력감이 아니라 세습된 구조적 소외임을 웅변한다.

 

마지막으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획일적 미래를 거부하거나 체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뾰족한 대안 없이 기존 질서를 유일한 현실로 수용하는 “실용적 부인주의”(pragmatic denialism)가 있다. 기후변화 대응 논의에서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 없이 기술적 적응만을 추구하거나, 보편적 의료보장·공공주택 같은 대안을 “비현실적 몽상”으로 일축하는 태도가 그 전형적 사례다. 긴축 압박, 자본 도피 위협, 초국적 금융기구의 규율 권력 앞에서 민주적 개입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좌절되는 경험은 결국 가능성의 지평을 현존하는 자본주의 질서 안으로 더욱 단단히 가두어버린다. 이는 자본주의의 팽창 논리와 상품화 명령이 상상 가능한 미래의 경계 자체를 획정하는 헤게모니적 폐쇄의 결과다.

 

미래없음의 자본주의적 정치경제학은 필연적으로 “돌봄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일의 성장과 회복을 믿으며 타인의 미래를 향해 나의 시간을 기꺼이 투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미래에 관한 사회학 담론이 포착하듯, 우리가 겪는 미래없음의 감각은 권력을 가진 소수 엘리트 자본이 부와 자원, 심지어 시간까지 독점하면서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고 투사할 능력을 체계적으로 빼앗아버린 불평등한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의 뼈아픈 산물이다(Tutton, 2023).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미래로 밀어 올릴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 오늘 살아남기에 급급하여 내 곁의 취약한 누군가를 지키며 함께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사회. 돌봄이 실종된 시대가 보여주는 비참한 실존적 빈곤의 실체다.

 

연명하는 생존을 넘어 주체로서 살 만한 삶으로

 

우리는 흔히 숨이 붙어있으면 살아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철학자 버틀러와 보름스는 최근의 대담집에서 그저 생물학적으로 숨만 쉬고 있다고 해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일치된 목소리로 주장한다. 아무런 자율성 없이 억압 속에서 목숨만 겨우 이어가는 수준의 생물학적 “살 수 있음”(생존 가능성, viability)과 한 인간이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희망 속에서 삶을 실험하고 창조하며 살아가는 “살 만함”(livability) 또는 “살 만한 삶”(livable life) 사이에는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단언한다(버틀러·보름스, 2024: 31-76쪽).

 

바로 이 대목에서 미래없음의 징후들은 특히 두 사람의 대담을 주선했던 이들이 버틀러의 문제의식을 참조하여 언급한 ‘기대수명’(life expectancy)의 파괴 문제와 교차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이 연재에서 자주 다루게 될 기대수명은 인구통계학적으로 몇 살까지 연명할 수 있는지를 뜻하는 생물학적 평균수명이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며 살아갈 능력”,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면 “개인의 삶에 대한 지속적 감각, 어떻게 삶을 견디고 사는지, 또 어느 만큼의 고통, 살 만함, 희망이 있는지에 대한 지속적 감각”을 의미한다(샤르팡티에·바리야스, 2024: 19-20쪽; cf. 버틀러, 2020: 34쪽).

 

핵심은 기대수명이 결코 순전히 개인적인 심리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살 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사회적 관계와 지속가능한 인프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인프라의 구성 방식은 곧 개개 생명의 지속가능성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어떤 사회적 인프라가 누구를 위해 조직되는지의 문제는 누가 살 만한 삶을 살 수 있는지의 문제와 직결된다(버틀러, 2020: 33쪽). 물론 의존성이 곧 예속을 뜻하지는 않지만 언제든 쉽게 예속의 조건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자본의 추출적 논리가 사회적 인프라를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재편할 때 다수의 대중에게는 구조적 취약성으로 변질된다. 자본의 작동이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가능성의 감각을 빼앗아 미래없음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은, 곧 이들의 실존적 기대수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고 위협한다는 뜻이다.

 

물류 인프라, 해양 통로, 금융 중개 네트워크, 노동 현장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현행의 추출적 자본주의는 우리 사회의 특정한 인구 집단3)을 구조적 ‘위태성’(precarity)으로 벼랑 끝까지 몰아넣고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적 불운이나 생로병사와 같은 존재론적 ‘위태로움’(precariousness)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이 기본적으로 위태롭고 취약하지만, 어떤 생명은 더 위태롭고 취약하다(버틀러, 2018: 61쪽).

 

따라서 인간 삶의 보편적 실존으로서의 위태로움과 특정 집단에만 고통·질병·폭력·죽음의 위험을 의도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전가하는 사회적·정치적 과정으로서의 위태성은(현상적으로 깔끔한 분리는 불가능해도) 이론적으로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위태성은 어떤 인간의 삶에 얼마큼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드러내는 사회적·정치적 역학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곧 특정 집단에만 과도한 위험을 전가하여 실존적 기대수명을, 즉 그들의 미래를 체계적으로 빼앗아버리는 불평등한 사회적·정치적 폭력이다(버틀러, 2020: 51-52쪽; 샤르팡티에·바리야스, 2024: 19-20쪽).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뢰밭과 같은 위기로 점철되어 미래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고통을 견뎌내며 간신히 살아남아야만 하는 삶, “이것은 결코 삶이 아니다”라는 절규가 터져 나오는 현실. 그것은 결국 주체가 상실된 “살 만하지 않은 삶”(unlivable life)으로의 잔혹한 추락을 뜻한다.

 

돌봄, 가장 급진적인 대항 정치이자 조직화 원리

 

그렇다면 이 파국적인 추출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저항하고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일각에서는 여전히 이 거대한 위기를 개인의 도덕적 해이나 여유 부족 탓으로 축소 해석하려 한다. 연말마다 관성적으로 울려 퍼지는 막연하고 낭만적인 소외계층 돕기 캠페인이나, 각박한 세상 속 개개인에게 그저 “조금 더 친절하고 배려하자” 촉구하는 자기계발적 구호가 보여주듯, 개인의 윤리적 각성이나 시혜적 선행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대중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시간을 탈취하는 추출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이 삶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선의에 기댄 개인의 자선이나 값싼 위로만으로는 결코 이 미증유의 파국적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제대로 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추출주의가 오늘날 도달한 극단적인 형태를 다시 한번 명확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포획망은 자연 자원이나 공장의 담벼락을 넘어 대중의 일상과 시간, 감정과 욕망의 영역으로까지 전선을 끊임없이 확장해왔다. 생태정치학자 던랩과 야콥센은 삶의 모든 영역이 수탈 대상이 된 현실을 “총체적 추출주의”(total extractivism)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한다(Dunlap & Jakobsen, 2020).

 

이들에 따르면 총체적 추출주의란 지리적·기술적으로 확장을 거듭해온 추출의 논리가 극단으로 치달아, AI 및 로봇을 필두로 하여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체계 전반을 관통하는 지배 원리이자 강박적 명령으로 자리 잡은 상태를 뜻한다. 작금의 기술과학적 자본주의(technoscientific capitalism)4)가 인간과 비인간의 모든 생명을 남김없이 집어삼키려는 탐욕적인 충동 속에서 지구를 총체적으로 재편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괴와 착취를 지극히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내면화한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이 극단적인 추출의 논리는 결코 경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간 감각, 관계 맺음의 방식, 무엇을 ‘비생산적’이라 부르고 무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화적·인식론적 심층에까지 깊숙이 침투해있다. 요컨대 오늘날의 추출주의는 하나의 경제모델이기 전에,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사회를 유지하고 조직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명적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절박하게 붙잡아야 할 해답은 이 파괴적인 조직화 원리를 근본에서부터 전복하는 돌봄의 급진적 재발견에 있다. 돌봄은 더 이상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갇힌 여성들의 무급 도덕적 의무나, 여유 있는 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다. 자본의 총체적인 추출이 인간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각자도생의 경쟁으로 몰아넣는다면, 돌봄은 우리 인간이 본래부터 파편화된 원자가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생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임을 강렬하게 선포하는 대항적 실천이다.

 

만일 추출이 아닌 돌봄이 사회를 조직하는 지배적 원리가 된다면, 우리의 경제와 정치와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최근 유럽의 복지 연구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돌봄 사회”(caring society)의 비전이 하나의 응답이다(Kadi et al., 2024). 돌봄 사회란 더 많은 사회적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의 현대적 재현이 아니다. 정확히 ‘추출’의 대안으로 ‘돌봄’을 정치·경제·사회 조직 전반의 근본 원리로 삼는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 국가와 시장과 가족과 시민사회 사이의 정의로운 돌봄 분배가 이루어지며, 타인을 돌보는 행위가 경제적 사유의 중심에 놓인다. 국가나 시장의 논리를 넘어 사람들이 자기-조직화와 집합적 돌봄 인프라를 통해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삶을 함께 꾸려가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공간이 살아 숨 쉰다. 이는 추출의 논리가 만들어낸 인간관계의 황폐함과 시간의 착취에 정면으로 맞서, 의존성과 취약성을 부끄러움이 아닌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긍정하면서 새로운 공동의 삶을 구성하려는 문명사적 전환의 기획이기도 하다.

 

돌봄의 논리를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정치경제학적 중심 원리로 내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총체적 추출주의의 폐해를 거슬러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살 만한 삶으로 탈바꿈해내는 가장 근본적인 대항 정치이자 실천이 될 것이다. 총체적 추출주의가 지구와 그 위의 모든 생명을 소비하며 전진하는 한, 돌봄 사회를 향한 질문은 선택적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절박한 윤리적·정치적 물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어질 연재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작동 논리와 그 잔혹한 추출 기계 속에서 무참히 부서지고 있는 우리의 실존을 비판이론과 민중신학의 눈으로 심도 있게 진단하려 한다. 이러한 사회철학적 ‘시대진단’(Zeitdiagnose)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과학의 ‘역량 접근’(capability approach)과 정치철학의 ‘돌봄 윤리’(care ethics)를 이접적으로 종합하여,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 갇힌 시혜적 감정이 아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공적인 역량으로 재정의할 것이다. 착취당하는 시간과 빼앗긴 미래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가속화된 쳇바퀴를 멈춰 세우고 서로의 깊은 취약성을 껴안는 ‘돌봄의 정치’(politics of care)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추출의 논리에 맞서 돌봄을 우리 사회를 조직하는 중심 원리로 굳건히 세우고 급진적인 사회 정의의 비전을 그리는 곳, 돌봄 사회를 향한 여정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걸어보려 한다.

 

■ 주

1) 충분한 휴식, 화장실 갈 자유, 폭염을 피할 그늘
2) “You Only Live Once”의 약자, 현재의 즐거움에 충실하자는 태도
3) 물류센터 노동자, 플랫폼경제 종사자, 사내하청 비정규직, 임시·일용직, 무급 돌봄 노동에 갇힌 이들
4)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기술과 과학이 핵심적인 경제 발전 동력으로 자리 잡아, 과학기술 발전과 자본 축적 과정이 긴밀하게 연결된 형태(Birch & Muniesa, 2020)

 

■ 참고문헌

버틀러, 주디스 (2018).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버틀러, 주디스 (2020).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버틀러, 주디스·프레데리크 보름스 (2024).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아르토 샤르팡티에·마티아스 바리야스 엮음.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번팅, 매들린 (2022). 《사랑의 노동》. 김승진 옮김. 반비.
샤르팡티에, 아르토·로르 바리야스 (2024), 〈머리말〉.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pp. 10-27).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시걸, 린 (2025). 《서로가 아니라면 우리가 누구에게》.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이혜리 (2025). 〈쿠팡 물류센터 일해 보니…숨은 막히고 비지땀 줄줄, 그 노동엔 에어컨이 없었다〉. 《주간경향》. 8월 3일 자.
최서은 (2026). 〈쿠팡 새벽배송 노동자 또 사망…택배노조 “쿠팡은 대책을 마련하라”〉. 《경향신문》. 2월 27일 자.
커테이, 에바 페더 (2016). 《돌봄: 사랑의 노동》. 나상원·김희강 옮김. 박영사.

Birch, K., & Muniesa, F. (Eds.). (2020). 《Assetization: Turning things into assets in technoscientific capitalism》. MIT press.
Chagnon, C. W., Durante, F., Gills, B. K., et al. (2022). “From extractivism to global extractivism: the evolution of an organizing concept.” 《The Journal of Peasant Studies》, 49(4), 760-792.
Dunlap, A., & Jakobsen, J. (2020). “Introduction: Consuming everything—capitalism and the imperative of total extractivism.” In 《The Violent Technologies of Extraction: Political ecology, critical agrarian studies and the capitalist worldeater》 (pp. 1-12). Springer.
Durante, F., Kröger, M., & LaFleur, W. (2022). “Extraction and Extractivisms: Definitions and Concepts.” In 《Our Extractive Age》 (pp. 17-30).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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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capié, Ramírez. L. (2025). “Unlivably Accelerated Work: How Neoliberal Capitalist Temporalities Produce Labour Precarity.” 《Las Torres de Lucca. Revista internacional de filosofía política》, 14(1), 21-32.
Kadi, S., Kalavrezou, N., Leichsenring, K., & Pot, M. (2024). “Caring Societies: The Future of Long-Term Care.” 《European Centre for Social Welfare Policy and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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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tton, R. (2023). “The Sociology of Futurelessness.” 《Sociology》, 57(2), 438-453.


정용택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과 민중신학을 전공했다. 주요 연구 주제는 현행의 추출적 자본주의와 기술적 파시즘의 상관관계, 돌봄의 정치경제학적 재구성, 지대추구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윤리적 비판 등이다. 대표 논저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개신교》(공저, 2024), 《모이셰 포스톤, 시간과 노동 그리고 사회적 지배》(2025), 〈가치 체제의 최전선으로서 돌봄: 행성적 자본세 시대의 돌봄의 정치경제학〉·〈구원의 자본, 혐오의 정치—한국 극우 개신교의 정치경제학, 1945-2025〉(202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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