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매일 질문을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출근길의 숨 가쁨과 병원 대기실의 긴 한숨, 아이의 진로와 학원비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 갈등과 혐오가 더 빠르게 번지는 뉴스가 하루의 분위기까지 좌우한다. 그 한가운데서 신앙을 가진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다시 묻게 된다. 그런데 그 질문이 쌓이는데도 성경적 대안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면, 신앙은 예배당 안의 말로만 남고 도시의 삶과는 어긋나기 쉽다.
복음에 뿌리 둔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은 바로 여기서 교회에 질문을 던진다. 교회가 교회 안에서만 맞는 말을 되풀이한다고 해서 도시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를 돕는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중심을 흐리면, 교회는 결국 선행을 하는 조직으로만 보일 수 있다. 그러니 출발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뿌리를 둘 것인가”다.
JKSH 모형은 이 방향을 간명하게 붙잡게 한다.[1] 예수(J)와 하나님 나라(K)가 뿌리라면, 샬롬시티(S)와 건강도시(H)는 열매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담대히 가르쳤다(행 28:30–31).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중심에 둘 때, 샬롬과 건강은 억지로 ‘만드는 과제’가 아니라 삶에서 자연히 드러나는 열매가 된다.
예수의 발걸음은 고통의 자리로 향한다.
복음서를 펼치면 예수의 사역은 늘 고통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영혼이 지치고 육체가 병든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소외된 이들, 관계가 깨어진 이들, 가난으로 눌린 이들이 그 자리에 있다. 예수는 그들을 피해가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고, 듣고, 만지고, 회복시킨다. 도시 한복판에서 교회가 붙들어야 할 첫 장면도 여기에 있다. 도시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 교회는 멀리있는 종교로 비치고 도시는 마음의 문을 닫는다. 반대로 고통의 자리로 가까이 가는 동행은 복음의 말이 다시 삶의 언어로 들리게 하는 통로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나중에만’도 ‘지금만’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세계”로만 말하면, 신앙은 오늘의 도시와 쉽게 분리된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의 변화만으로 설명하면, 신앙은 어느새 성취와 결과의 부담을 떠안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긴장 속에서 신앙은 주일 예배당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배가 끝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직장과 가정, 학교와 시장, 주민센터와 병원, 골목과 공원까지—하나님의 나라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닿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는 것은 도시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보이게 되는 길을 찾는 일이다.
샬롬은 관계와 질서의 회복이다.
JKSH에서 샬롬은 좋은 기분을 뜻하지 않는다. 샬롬은 관계와 질서가 바로 서는 상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붙들 때,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현실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이 관점에서 건강도 단순히 병이 없다는 말로 다 담기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영적 건강으로, 자기 자신과의 회복은 마음과 몸의 건강으로, 이웃과의 회복은 사회적 건강(신뢰·연대·돌봄)으로, 자연과의 회복은 환경적 건강으로 나타난다. 결국 건강 도시는 샬롬이 도시의 언어로 번역된 모습이다. 그래서 JKSH의 H(건강도시)는 교회가 복음의 중심을 지키면서도 시민과 대화할 수 있는 접점이 된다.
중심축이 흔들리면 교회는 미끄러진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중심축이 흐려지면 교회는 대개 두 방향으로 기운다. 하나는 교회 안의 종교 활동이 전부가 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복음의 말과 삶이 서로 떨어져, 복음의 증언이 희미해지는 길이다. 사도행전 28:30–31이 보여 주는 중심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함께 전하는 일이다. 도시 사명은 강단과 삶의 현장 사이에 벌어진 ‘복음의 공백’—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희미해지며 도시의 고통을 복음으로 해석하고 섬기지 못 하는 공백—을 메우는 데서 시작된다. 무엇을 할지의 목록을 늘리기보다, 무엇을 중심에 둘지부터 다시 정렬해야 한다.
교회는 도시를 향해야 한다.
도시를 향한 실천은 거창한 구호보다 방향전환에서 힘을 얻는다. 도시는 ‘규모’보다 ‘신뢰’를 먼저 본다. 그러므로 교회의 크기보다, 믿을 만한 거룩으로 교회를 세우는 전환이 필요하다. 거룩은 완벽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과 회개, 투명함과 겸손, 약자를 향한 책임있는 사랑이다.
또 하나의 전환은 설교와 목회의 중심선을 예수-하나님 나라로 다시 묶는 일이다. 도시의 문제는 영혼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과 몸, 관계와 환경이 한 덩어리로 얽혀 있다. 설교, 양육, 상담, 구제, 선교가 서로 갈라져 각자 움직이지 않도록, 복음의 중심에서 삶의 모든 영역이 다시 이어져야 한다.
도시의 아픔은 한 교회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개별 교회의 성과보다 지역 교회의 연합을 우선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교단과 규모를 넘어 지역 단위로 협력하고, 특히 작은 교회가 소외되지 않도록 살리는 연합이어야 한다.
공공 영역과의 대화도 성숙하게 회복되어야 한다. 정파적 정치화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관심을 갖고 협력하는 것이다. 돌봄, 정신건강, 청년, 주거, 교육 격차, 환경은 도시가 겪는 고통의 자리이며, 교회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번역되는 현장이다. 비난의 말이 아니라 제안의 언어가 신뢰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건강이라는 공통 언어는 믿지 않는 이웃과 대화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건강은 누구나 바로 이해하는 언어다. 건강도시는 더 나은 일상을 바라는 모든 시민의 갈망이 모여 만들어진 공통 언어다. 여기서 ‘건강’이라는 언어는 복음을 숨기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복음이 삶을 회복시키는 길을 보여 주는 통로다. 다만 중심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도시의 평안은 우리의 평안이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7)
예레미야서의 이 문장은 오늘의 현실에도 그대로 맞닿는다. 성읍의 평안은 남의 평안이 아니라, 그 성읍에 사는 공동체 자신의 평안과 직결된다. 성읍이 흔들리면 삶이 흔들리고, 성읍이 회복되면 삶도 함께 회복된다. 그러므로 성읍의 평안을 구하며 기도하는 일은 의무감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실제의 길이 된다. 주일 예배 대표기도에서 나라를 위해 늘 기도하듯,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 방향 전환의 출발점은 강단이다. 설교가 다시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중심에 둘 때, 교회는 복음의 방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도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일상의 작은 순종이 겹겹이 쌓일수록, 도시 속 교회를 향한 신뢰와 대화의 창도 함께 넓어진다.
1. JKSH는 예수(Jesus)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를 뿌리로 두고, 그 열매로 샬롬시티(Shalom City)와 건강도시(Healthy City)를 바라보는 공공 신학적 틀이다. 조무성, 「JKSH 공적 신학 모형을 통한 샬롬시티와 건강도시 형성: 성남시 다섯 교회 분석」(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