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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Culture

연민, 하나님의 플레로마에의 참여/최창국

작성자김수영1|작성시간26.06.08|조회수37 목록 댓글 0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장이었던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종교를 도덕성이나 윤리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강했다. 기독교 초기에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로마인은 봉사나 구제에 대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봉사나 구제는 신을 섬기는 일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당시 로마인은 종교와 윤리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며 신을 섬겼다. 인간이 신의 심기를 건드릴 때는 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의례 기준을 어겼을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도덕성과 사회적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분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행의 대상은 단지 믿는 가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었다. 이는 기독교의 세계화에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영적이고 종교적인 실천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일상의 삶, 즉 인류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은 오이코스, 즉 집과 공동체에 대한 그레코-로만적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심했다. 로마 사회에서 오이코스의 주인은 가부장, 가장, 가산 전체의 소유자만이 가능했다. 집안의 식구인 노예, 여성, 어린이와 임차인, 일꾼, 상공업의 조수들은 모두가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부자유한 것으로 정의되었다. 재산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위계질서와 인권의 가치가 결정되는 사회였다. 그레코-로만식 오이코스의 위계질서는 바로 그 정의 자체 속에 지배와 종속을 수반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운동 또는 선교는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 장소로서 사람들의 삶 자체에 초점을 두고 오이코스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특히 예수님이 세 집단, 즉 궁핍한 빈자들, 병자들과 장애인들,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리스도교 운동은 지배적인 종교적·사회적 에토스 안으로 침투하여 인간의 평등성을 위한 새로운 집을 창조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자함과 선함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재산의 유무와 관계없이 예수님의 제자와 가족으로 함께 모이며, 새로운 집안을 형성했다(막 3:31-33).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막 10:15)고 한 내용은 “어린이다운 천진함과 순진으로의 초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력과 지배의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라는 도전이다”(Douglas Meeks, God the Economist, 128). 존 엘리어트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과 주변인들을 대했는가를 베드로가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수취인들이 파로이코이(paroikoi)와 파레피데모(parepidemoi)라는 것을 통해 설명한다. 이 용어들은 그레코-로만 사회 안의 외국인이나 나그네의 제한된 신분과 권리들을 묘사하는 사회법학적 용어로 “파로이코이에는 노예들, 농노들이 포함되었으며, 그들이 전에 살던 고국이나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시민권이 없는 떠돌이 이방인과 계층 하강한 자의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John Elliott, A Home for the Homeless, 68).

 

베드로가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 이방인, 뿌리 내리지 못한 객, 위험한 반골이었다. 베드로전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오이코스는 집 없는 사람들에게 가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이제 “자비를 받은 자들”(벧전 2:10)이다. 하나님의 인자함과 선함에 의하여 신분과 재산의 유무와 관계없이 오이코스의 일원으로 편입을 경험한다. 인간의 여러 고통, 특히 차별의 고통은 하나님의 플레로마(pleroma)에 의해 퇴색된다. 하나님의 플레로마는 하나님의 인자함과 선함으로의 초대인 동시에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연민을 회복할 책임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초대한다.

 

깊은 차원에서 교회가 영적으로 깊이가 있지만 도덕적으로 빈곤하다는 표현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러한 표현은 영성과 도덕성 간의 치명적인 분리의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비례관계이기 때문에 영성과 도덕성의 분리는 양쪽 모두에게 위험하고 자기 파괴적이다. 이러한 분리는 복음을 빈약하게 만들고, 복음이 지닌 보편적 경험의 기초를 축소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패커는 기독교 복음의 영적 차원과 도덕적 차원의 관계를 아주 예리하게 설명한다. “도덕성이 결여되면 영성이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신의 은총만 강조하며, 도덕률 폐기론자로 전락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보다 그분의 임재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성이 결여되면 도덕성마저 무너진다. 이렇게 되면 기계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거만하고 세속적인 상태로 전락한다”(제임스 패커, 거룩의 재발견, 143). 영성과 도덕성 사이의 ‘과’라는 의미는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과’는 영성과 도덕성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실천 없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인지적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일부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한 고백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행동과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정직하고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힘을 부어 줌으로써 우리 안에 존엄성과 성실성을 심어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연민을 경험할 때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한 연민은 강화된다.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 발흥에 대한 탁월한 사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가 성장한 이유는 저잣거리에서 기적을 많이 행사해서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가 성장해야 한다고 천명해서도, 심지어 순교자들이 신뢰도를 높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로 뭉쳐 의욕적으로 친구와 친척, 그리고 이웃을 초대하여 복음을 나누려고 노력했던” 신자들 때문이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311-12). 바로 영성과 윤리, 신앙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는 건전한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플레로마, 즉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충만한 연민을 이웃에게로 흘려보내는 삶의 방식이었다. 사실 로마 사회에서 예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운동 또는 선교를 평가한 기준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예수에 관한 주장들이라기보다는 바로 눈앞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이었다. 다시 말하면, 로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민으로 가득한 삶,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플레로마를 보았다.

 

기독교 복음은 영적 차원뿐 아니라 윤리적 또는 도덕적 차원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회적이고 참여적이므로 비사회적 또는 비윤리적 신앙과 신학은 바른 것이 아니다. 비사회적 복음은 있을 수 없다. 복음에 충실한 개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윤리적 의무로써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참여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의 질서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적 관심, 특히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은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부산물이 아니라 필수 요소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시대를 초월하고 하나님과 영혼만을 말하며,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복음을 축소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시대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세상을 등지고, 이별하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자 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깊은 차원에서 세상의 자기 파괴를 이미 용납한 것이며 그 불충분함으로 인해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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