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바조(1571~1610), 《나르키소스》 (1600, 캔버스에 유채, 110×92cm), ⓒ고대 미술갤러리, 로마
열세 살에 시작한 도제 생활을 4년여 지낸 후 카라바조는 밀라노를 떠났다. 아마도 페테르차노로 대표되는 밀라노의 마니에리스모에 대한 염증을 느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결심한 이유로 보인다.(1) 그는 베네치아를 여행하며 티치아노(1488?~1576)와 틴토레토(1518~1594)와 베로네세(1528~1588)의 작품을 보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립시켰다. 특히 틴토레토의 작품들을 통하여 극적인 명암대비와 깊이 있는 공간감, 그리고 실재감을 눈여겨보았다.
신성은 성스러운 후광으로 표현되기보다 얼굴에 깃들 수 있음을 배웠고, 키아로스쿠로의 기초를 익히는 시기였다. 빛은 성당 천정에서 비치는 추상적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현실 속 육체에 깃든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빛은 초월이 아니라 내재이며, 홀로 존재하는 무한한 능력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개입하는 은총이다. 영광은 고통스러운 갈등의 틈새에서만 자신을 노출한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자유 분망하고 거침없는 성격은 종종 문제를 야기했다. 단검을 허리에 차고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숙식을 해결하는 떠돌이 화가는 종종 술집에서 행인들과 다투었다. 그가 로마로 간 이유도 폭력과 연관되었다는 의심은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의 방황과 일탈조차도 인간의 뼈아픈 타락을 실감하는 체험이며 은총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절망의 처지를 체휼하기 위한 신학적 순례라고 할 수는 없을까? 빛은 은총이고 인간의 어둠은 은총의 조건이라면 카라바조는 예술로서만이 아니라 자기 몸을 통하여서도 성육신 신학을 묘사하려 한 것일까?
보이는 이미지 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강조하려는, 트렌트공의회가 꿈꾼 상상은 카라바조를 통하여 그렇게 현실화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그래서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1864~1945)은 “카라바조의 빛은 회화의 구원론이다”고 했다.
1592년 스물한 살이 된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6세기 말 로마는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476) 이전의 찬란한 문화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2) 로마는 수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력만 있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성공을 꿈꿀 수 있는 사회였다.
로마는 몰려드는 사람만큼 경쟁을 치열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거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했다.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는 이런 배경에서 쓰인 소설이다.
카라바조는 어릴 때 아버지가 흑사병으로 죽었다. 십대 초반에 어머니도 죽었다. 거친 시대를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으므로 거칠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 강해야 했다. 폭력은 몸에 배인 그의 언어였다. 성장 과정이 그랬고, 시대 환경이 그랬다.
카라바조가 로마에 스며든 것이 아니라 로마가 카라바조를 부른 것이다. 그의 미술 수업은 4년여의 도제 생활과 4년여의 독학(방랑)이 전부였지만 그에게는 천재적인 재능이 숨어있었다. 로마는 호락호락한 도시는 아니었다. 로마는 예술의 수요가 많았고 공급이 수요를 초월하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다행하게도 로마에 입성하면서부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수많은 생계형의 화가는 카라바조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주
(1) Helen Langdon, Caravaggio: A Life, London: Chatto & Windus, 1998, p. 23–26.
(2) 고대 로마란 주전 8세기에 시작하여 왕정시대(B.C. 753~B.C. 509)와 공화정시대(B.C. 509~27), 그리고 제정시대(27~476)를 거쳐 476년에 붕괴된 로마 문명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