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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진 종교 제도는 하루 속히 깨져야/류호준

작성자김수영1|작성시간26.06.08|조회수41 목록 댓글 0

조직이나 기구나 제도가 결성되면 자리도 여럿 생기고, 조직 내 인적 관계도 형성되고, 조직에 대한 충성 경쟁도 생기고, 자연스레 계급 구조도 생깁니다. 무엇보다 조직이나 기구나 제도는 자체를 유지하려는 내적 습성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오래되면 쉽게 관료화됩니다. 시작할 때의 목적과 기능은 세월과 함께 퇴색하고 제도화되다 종국에는 화석화됩니다.

 

구약의 제도와 조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제사장 제도”(priesthood)입니다. 어쩌다가 전국적 조직망까지 갖추게 됩니다. 처음에는 느슨한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는 각종 유형의 지방 성소(신당)들이 있었고, 저마다 지역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시골 지역에선 이방 신당들과 경쟁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우둔한 백성들은 카리스마가 있는 제사장들을 좋아했고, 그 제사장이 어느 종교에서 수련한 제사장인지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감성적 영적 유익이 되거나 복을 마음껏 하사해준다고 생각하면 최고의 신당(성소)으로 여겼습니다. 특별히 영험한 장소에 세워진 성소들은 언제나 순례 참배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길갈, 실로, 벧엘, 단, 사마리아, 헤브론과 같은 지역에 세워진 성소들은 후에 국가 종교의 센터로까지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좋은 지역에 자리 잡은 성소에서 일하게 되는 제사장은 천운이 따른 경우입니다. 게다가 제사장직은 세습이라 “아버지 찬스”로 좋은 어장을 물려받는 일도 흔했습니다. 요즘 말로 금수저 출신, 혹은 성골 출신이겠죠.

 

대표적 사례가 사무엘서 초반에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 가문입니다. 그들은 실로 성소를 책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엘리가 실로 성소의 대표 제사장이었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실로 성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서 초반부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무능력과 패악을 배경으로 어린 사무엘의 등장을 그립니다. 렘브란트의 작품처럼 명암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직업적 종교인으로 엘리는 체제 유지와 현상 유지에 관심이 많은 전형적 직장인이었습니다. 매일 성소에 출근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삼상 1:9). 그저 성소에 관한 사무적인 일이나 연례 절기에 따라 제사 지내는 일정만 관심이 있었고 정작 “사람의 일”엔 무관심한 유형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목회는 사람에 관한 것이지 제도나 행정에 관한 것은 아니지 않나요? 어쨌든 실로 성소를 여러 해 찾아온 한나라는 슬픈 여인의 사정은 안목에도 없었습니다. 한나가 자신의 애통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제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17)라고 말합니다. 정말 침 뱉고 싶은 얼굴입니다. 어떻게 저런 영혼 없는 상투적 대답을 뻔뻔스럽게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뭐하러 제사장이 되었는지 욕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 자격이 있었나요? 하기야 제사장직은 세습제도이기에 제사장직에 마땅한 자격요건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사장은 도제처럼 훈련을 받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를 숙지하고 서약을 하고 임직 예식도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짝퉁 제사장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줄을 잘 타서 좋은 성소에 배치를 받거나 아니면 엘리의 자식들처럼 “아빠 찬스”를 십분 이용하여 제사장의 권리를 무한정 확대하여 누리는 “어쩌다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평신도들을 마음껏 갈취한 나쁜 놈들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사무엘서 저자는 행실이 나쁜 엘리의 아들들에 관한 두 문단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악행을 폭로하겠습니까? (2:12-17, 22-26). 첫 번째 문단만이라도 또박또박 읽어보세요(12~17절). 혹시 길다고 느껴진다면 그들의 악행이 얼마나 관습적이고 반복적이었는지를 기꺼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도 될 겁니다. 그러니 들어보세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을 무시하였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지켜야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도 무시하였다. 누군가가 제사를 지내고 그 고기를 삶고 있으면, 그 제사장의 종이 살이 세 개 달린 갈고리를 들고 와서, 냄비나 솥이나 큰 솥이나 가마솥에 갈고리를 찔러 넣어서, 그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사장의 몫으로 가져갔다. 실로에 와서 야웨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이런 일을 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기름을 태우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의 종이 와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제사장님께 구워 드릴 살코기를 내놓으시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요!" 하고 말하곤 하였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 종에게 "먼저 기름을 태우게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원하는 것을 가져가세요!" 하고 말하면, 그는 "아니오. 당장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가져가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의 아들들은, 야웨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렇듯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였다. (삼상 2:12-17)

 

첫마디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는 것입니다. 개망나니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호와를 알 수 있었겠습니까? 개역 개정의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새 번역에는 “여호와를 무시했다”라고 좀 더 분명하게 뜻을 드러내어 번역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 배웠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신학교에서 “신론(神論)” 과목을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실제 제사장직 사역에서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실제의 목회 사역에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분이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말 못 하는 우상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신학교에서 “하나님은 왕이시다”라고 배웠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반역죄를 스스럼없이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종교적 망나니들입니다. 이런 군상들을 가리켜 “실천적 무신론자들”(practical atheist)이라 부릅니다. 이런 부류의 종교지도자들이 한국 교계에 얼마나 많은지요.

 

두 번째 문단은 읽지 않겠습니다(삼상 2:22-26절).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함을 갖고 회막(會幕)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한 혐오스러운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엘리 뿐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종교적 이유를 내세우며 성적 폭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종교위압에 의한 성범죄를 버젓이 저지르고도 신학적 합리화를 하거나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 여인들 가운데 누구도 공개적으로 저항하거나 폭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통정(通情)을 하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직급에서 승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아니면 강압에서 성폭행의 희생자가 되지만 그 사실을 알리게 되면 그 사회에선 매장되거나 거꾸로 무고죄로 처단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종교적 권위와 직함으로 못된 짓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폐쇄된 사회에서, 특별히 종교라는 배타적 제도 안에서 입을 연다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사회와 종교 제도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특한 직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납니다. 27절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직분입니다. 앞서 제사장이란 직분은 나왔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실로 성소의 제사장 엘리에게 와서 신탁(神託, oracle)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엘리 가문의 완전 멸절과 새로운 제사장을 선임하시겠다는 선언하는 신탁입니다(27~36절). 

 

여기에서 관심 있는 부분은 “하나님의 사람”의 출현입니다. 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에 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거룩한 사람”(holy man)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유랑 예언자”가 아닌가 합니다(예, 9:6,9-10; 신 33:1; 수 14:6; 왕상 13:1; 17:24; 왕하 4:9 등).

 

“제사장 제도”와 “예언자 제도”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스라엘 종교에서 제사장 제도는 언제나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졌습니다. 제사장은 신탁을 수여 받기도 하였고, 토라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고, 물론 제사를 집전하는 일도 했고, 때론 공중보건의처럼 전염병을 분별하여 사람을 격리 치료하게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성소/성전을 중심으로 삶이 구성되어 있었기에 제사장 제도는 언제나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근데 어느 기구나 제도든 견제를 받지 않으면 부패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 겁니다. 특히, 종교가 권력이나 제도를 독점하면 자연히 기득권이 형성될 것이고, 그 안에서 종교 카르텔이 형성됩니다. 

 

이것을 막아주는 또 다른 제도가 예언자 제도였습니다. 물론 예언자 제도도 끊임없는 개혁과 혁신에 실패하자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나 생활형 예언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참 예언자들은 굳어지는 제사장 제도에 대해 엄한 경고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때론 갈등이 심하게 고조되기도 했습니다(예, 암 7:10-17; 렘 20:1-6). 이른바 예언자적 목소리 말입니다. 예언자적 목소리는 언제나 두 가지 주제를 외칩니다. “우상 숭배에 관한 경고”와 “사회적 불의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한 마디로 “참 예배”를 회복하라는 것과 “정의와 공의가 뿌리내리는 사회”를 지향하라는 촉구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교회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래적 제사장직 임무를 충실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제도를 단단히 구축하고 그 안에서 서로의 안전만을 추구하고 유지하고 몰입해온 것은 아닌지? 엘리 시대의 종교처럼 한국교회가 종교 권력을 누리고 돈을 사랑하고 영혼 없는 종교적 언사를 내뱉고 온갖 더러운 일들을 자행하지는 않았는지, 달리 말해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들만 골라서 저지른 엘리 제사장 족속들의 악행들을 반복해서 습관적으로 행했는지, 깊은 성찰과 크게 뉘우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사장 제도가 제어장치 없이 폭주하는 기관차가 될 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의 경고와 제어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종교는 바닥까지 몰락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 한국교회 역시 구약의 옛일들이(예, 제사장과 예언자 간의 마찰과 갈등)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고전 10:6-11). 

 

한국교회는 예언자적 정신(prophetic spirit)을 새롭게 부여받아야 할 때인 듯합니다.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처럼 교회 역시 예언자적 정신을 부여받으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교회는 정상적인 제사장적 사역과 예언자적 사역을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수행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명예와 평판과 이름이 존중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왕권과 다스림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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