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원아, 사랑을 비교할 수 있을까?”
아기가 처음 말을 떼기 어렵듯 글도 시작이 제일 어렵다. 《특별한 날은 특별히 아프다》(책방 언덕위에)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2025년 10월에 낸 수필집이다. 내 딸 애진이와 작별한 직후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모티프로 쓴 에세이집이다. 프롤로그 ‘재원에게’만 새로 썼다. 내 아들이자 애진이 남동생 재원이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가장 어려웠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책상에 앉아도 첫 줄이 써지지 않았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빠는 사랑에도 총량이 있는 줄 알았어. 그래서 누나가 떠났을 때 내 사랑도 모두 떠났다고만 생각했어. 누나를 잃을 때 분명 나도 전부 잃었는데, 너를 보니 그렇지가 않았어. 내 전부가 있었어. 사랑에 총량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 1 더하기 1이 2가 아닌 세상도 있다는 걸 느꼈어. 무한대에 무한대를 더하면 무한대가 되는 세상이랄까. 이런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세상이 사랑의 세상이라는 걸 느낀다. 사랑이 공기를 이루고 햇살에도 바위에도 사랑이 담겨있는 세상 말이야. 누나가 있는 세상이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 되면 좋겠다.
편지는 고백의 글이 되었다. 쓸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신앙고백으로 읽힌다. 나는 신앙을 모르지만, 지금은 사랑이 곧 신앙이라는 걸 느끼며 산다.
공감이 나의 생명줄이었다
나는 애진이 아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신애진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3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애진이를 찾는다. 처음엔 애진이가 없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런 세상은 버리고 싶어서 애진이를 찾아 떠났다. 애진이와 함께 갔던 곳들을 다니며 꼭꼭 숨어있을 애진이를 찾아 헤맸다.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강물을 바라보는데 낱말 하나가 떠올랐다.
‘어디에나, 어디든’.
애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어디든 있을 거라는 느낌이, 애진이와 함께 바라보았던 풍경 속에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왔다. 유가족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태원 옆 녹사평에 설치된 분향소를 찾아갔다. 한강과 삼각지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맴돌이치는 사거리 언덕에 있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국화꽃이 꽁꽁 얼었다. 5분만 서있어도 발이 어는 곳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매정하게 시린 겨울을 났다.
그런 곳인데도 찾아오는 분들이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분들을 우리는 그저 시민이라 불렀다. 매일 청소를 하고, 따뜻한 차를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진작부터 분향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분들은 묵묵히 일을 찾아서 하다가 짬이 나면 영정 속에 있는 희생자들 얼굴과 이름을 한 명 한 명 맞춰보곤 했다. 지금까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로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듯이.
녹사평에서 겨울을 난 분향소는 서울시청 광장 모퉁이로 옮겨져 499일을 버텼다.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대신 울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손을 잡아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손의 온기가 얼어붙은 내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 낱말 하나가 둥근 달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분향소에서 ‘공감’이라는 말을 배웠다.
“감기를 치료하는 약은 없어도 감기약이 감기에서 낫는 데 도움이 되듯이, 공감이 고통을 치료할 순 없어도 고통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그날 알았다.”
“슬픔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슬픔이 있고 자기 슬픔이 가장 크다. 하지만 다른 이의 슬픔에 손을 내밀 때, 내 슬픔은 크기는 그대로여도 고통은 견딜 수 있을 만큼 줄어든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나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꺼내놓을 수 있게 된다. 꺼낸 슬픔은 다른 슬픔과 만나 더 큰 슬픔이 된다. 희한하게도 슬픔이 커지는데 고통은 줄어든다.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의 슬픔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슬픔은 제 스스로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결국엔 긍정의 에너지로 바뀌어 우리를 지탱하고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공감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다. 지금은 나를 지탱하고 이끄는 생명줄이자 동아줄이다. 그분들의 마음이 내게 분노와 원망 대신 긍정의 옷을 입혀주었다. 집에선 한없이 추락하는데 분향소에선 날개가 돋는 듯했다.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분향소에 갔다.”
1년 동안의 일기를 모은 《특별한 날은 특별히 아프다》에는 담겨있지 않은 또 다른 낱말이 지금도 매일 쓰는 일기 속에 들꽃처럼 피어있다. 공감을 말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말, ‘연대’다. 나는 연대 또한 분향소에서 배웠다. 하루도 빠짐없이 분향소를 지켜주고, 해 저문 분향소에서 노래로, 기도로 빛이 되어준 이들의 발걸음이 우리에게는 연대의 손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노래를 들으며, 함께 기도하며 신영복 선생님이 가장 먼 여행이라고 말씀하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떠올렸다. 공감하는 가슴과 연대하는 다리가 우리 사회를 바닥부터 떠받치고 있음을 느꼈다.
신애진 양을 찾은 참사 다음 날 밤에 애진 양 엄마가 그린 그림. (그림: 필자 제공)
연대하는 우리가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지운다
분향소에서의 첫 번째 겨울을 나고 맞이한 봄부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가기 시작했다. ‘마로니에 촛불’에 합류한 지는 어느덧 3년 가까이 되었다. 마로니에공원에선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문화 예술인들과 시민들이 11년째 리본을 나누고 있다. 매주 토요일 저녁, 공원 입구에 작은 테이블이 펼쳐지고, 거리에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월호 노란 리본, 이태원 보라 리본을 무료 나눔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가 그냥 잊히지 않도록 가방에 이쁘게 달아주세요.”
100일 넘게 입도 떼지 못하던 나는 이젠 능숙하게 행인들에게 말을 걸고 리본을 나눈다. 그리고 구름 없는 맑은 날이면 밤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애진아, 아빠는 매주 여기서 충전을 하고 있어. 리본을 나누는 이들의 연대, 리본을 받아가는 이들의 공감에 일주일 치 용기를 얻는단다.”
지난겨울, 계엄의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날부터는 매일같이 광장으로 나갔다.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시민들을 유가족으로 만들려는 내란의 맨얼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광장에서 만난 응원봉을 손에 든 젊은이들이 모두 애진이로 보였다. 애진이가 좋아한 노래, 〈다시 만난 세계〉의 합창 소리를 들으며 광장에 있는 애진이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애진이를 만나고 느낄 수 있었다.
광장은 광화문에서 시작되어 여의도로, 남태령으로, 한남동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남태령의 밤을 떠올린다. 여의도에서 응원봉을 들었던 청년들이 남태령으로 달려가 눈사람이 되어서는 마침내 길을 열었다. 남태령과 한남동 사이, 대통령 출퇴근길이라며 막았던 이태원 도로 또한 비로소 열리게 된 것이다. 한강진에 미리 가서 전봉준투쟁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지축을 뒤흔드는 트랙터 소리에 그걸 깨달았다. 도로 위에 눈물이 맺혔다.
이태원 참사 직후 정부는 이름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차려놓고 희생된 국민들을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오히려 책임을 지우며 놀러 간 게 잘못이라며, 희생자들뿐 아니라 축제를 즐기러 나온 청년들까지 죄인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의무를 버리고 각자도생하라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막힌 길을 응원봉을 든 청년들이 뚫어냈다. 각자도생의 벽을 허물고 〈다시 만난 세계〉를 열어낸 것이었다. 그래서 난 광장이 좋았다. 애진이는 없지만, 수많은 애진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광장이 그립다.
상처는 스스로 아물지 않는다
우리 몸에 상처가 나서 세포가 죽거나 다치면 근처에 있는 세포들이 발 벗고 나선다. 우리 사회의 상처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상처는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나눠준 ‘공감과 연대’로 아물고 있다. 그날 분향소를 찾아와 내 손을 잡아준 이의 표정, 희생된 이들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방울은 순간이었지만, 그 기억은 오래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인 내 표정, 내 말 한마디가 그 누군가에게는 오래가는 기억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가 아닌지 곱씹게 된다. 더구나 나의 얼굴은 나만의 얼굴이 아니라 이젠 애진이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애진이를 모르던 이들은 나를 보며 애진이를 떠올린다. 그러니 더욱 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참척은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무도 이르지 못한 고통이라 하여 ‘참혹할 참(慘)’ ‘슬퍼할 척(慽)’을 써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참혹하고 슬픈 감정을 완곡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한편, 참척은 자식 대신 자식의 얼굴이 되어야 하는 부모의 의무,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움을 내포하기도 한다.
나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경빈이를 만난 적이 없지만, 늘 낮은 곳에 있는 이들 곁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경빈 엄마를 보면서 임경빈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바쁜 하루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경빈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 쓸쓸함은 오롯이 경빈이와 엄마만의 이야기다. 그 마른 쓸쓸함이 낙엽처럼 쌓여서는 다른 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불씨로 피어오른다. 나는 그걸 유가족의 연대라고 부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라앉는 이들을 받쳐주는 연대.
회복은 상처가 낫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상처의 모습을 직시하는 게 회복의 시작이다. 아문 상처에 남은 상흔이 우리의 기억이 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되는 게 회복의 길이다. 회복은 상처가 아물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긴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상처를 드러낼 용기를 내본다. 나의 상처가 우리의 회복으로 바뀌기를, 우리 사회의 회복에 보탬이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지만 괜찮아
어떻게 해야 너와 함께 살 수 있을지 생각한단다. 너의 의미를 빚어 가는 삶이라면 네 몸은 비록 세상에 없지만 너는 기억으로, 의미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우리가 받은 공감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 가슴에만 머물지 않고 발로 걸으며 연대하는 삶을 찾고 있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 서로 각자의 몸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 큰 생명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어. 그 큰 생명이 먹고 사는 밥은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으로 증거하신 사랑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산티아고 어느 언덕길에서 문득 들었어. 애진아, 어느 날 네가 꿈에서 엄마에게 찾아와 말했지. 보고 싶지만, 괜찮다고. 아빠는 늘 그 말을 곱씹으며 산다. 그리고 오늘도 네게 말한다. 보고 싶지만, 괜찮아.
《특별한 날은 특별히 아프다》는 이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애진이와 함께 사는 나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회복된다는 말은 나의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상처받은 게 없으니 회복될 것도 없다. 다만, 나는 애진이 덕분에 몰랐던 세상도 알게 되고, 모르던 이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생명을 소망한다. 신앙도 없고 기도하는 법도 모르지만, 어설프게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당신이 계시기를, 꼭 계시기를 빈다. 애진이를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나의 간절함이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기에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