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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와 주식 그래프로 전쟁의 종식을 계산할 때/장준식

작성자김수영1|작성시간26.06.12|조회수34 목록 댓글 0

사진출처=pixabay.com

 

아침 7시, 출근길 주유소 앞에서 한 남자가 잠시 멈춰 선다. 어제보다 오른 가격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그의 하루는 여기서부터 이미 흔들린다. 점심값을 줄일지, 아이 학원비를 미룰지, 아니면 카드값을 다음 달로 넘길지 계산이 시작된다. 전쟁은 아직 화면 속 이야기지만, 그 여파는 이미 그의 식탁과 가계부에 도착해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 아이가 무너진 건물 잔해 옆에 앉아 있다. 학교는 사라졌고, 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폭격은 멈추지 않았고, 어른들은 더 이상 아이를 보호할 힘이 없다. 이 아이의 하루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이 두 장면을 동시에 살고 있다. 하나는 불편함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문제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이 둘을 같은 언어로 다루지 않는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를 묻는 자리에서, 아이들의 죽음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유가와 주식시장이다. 이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고, 동시에 분노하게 한다.

 

국제사회는 오래전부터 전쟁 속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세워왔다. 유엔 아동권리협약과 제네바협약 추가의정서는 분명히 말한다. 아동은 특별히 보호되어야 하며, 민간인을 향한 공격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학교와 병원은 보호 대상이며, 아이들은 전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국제법의 언어로 명시된 약속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약속을 반복해서 배반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제법은 문서 속에 남고 아이들은 폐허 속에 남는다. 그리고 세계는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해 움직일 때조차, 그 출발점을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경제적 압박에서 찾는다.

 

이것은 특정 지도자의 악의가 아니다. 이것은 구조(system)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한 가치로 환산한다. 전쟁도, 생명도, 아이의 울음도 결국 비용-편익의 언어로 번역된다.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라 불렀던 것, 즉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물 사이의 관계로 대체되는 것은 오늘도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의 죽음에 분노하기 전에 스마트폰을 열고 유가와 주식 앱을 먼저 확인한다. 이 순서 자체가 이미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자본의 언어를 내면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환율과 주식이 오르내리겠구나"일 때, 우리는 이미 그 질서 안에 깊이 앉아 있는 것이다. 분노하기 전에 계산하고, 슬퍼하기 전에 손익을 따진다. 이것은 나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의 언어를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내면화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유가가 오르고, 물가가 상승하고, 금융시장이 흔들릴 때 비로소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기업의 비용이 증가하고, 소비가 위축되고, 정치적 부담이 커질 때 협상이 시작된다. 전쟁은 인간의 비극으로 시작되지만, 전쟁의 종식은 종종 경제적 계산으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다. 오늘의 세계 질서는 생명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용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아이들의 울음은 전쟁 종식 협상의 속도를 높이지 못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은 유가와 주식 시장의 그래프다.

 

권력은 언제나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질서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전쟁을 통해 유지되는 질서, 시장을 통해 조정되는 질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늘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이다. 아이들, 난민, 노동자, 서민. 그들은 질서의 대상이 아니라, 질서의 비용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주식시장인가, 유가인가, 아니면 어린아이와 같이 무고한 자들의 생명인가.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는 다른 경제를 상상한다. 희년의 법은 빚을 탕감하고 땅을 돌려주었다. 초대 교회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 예수의 오병이어는 결핍의 경제 앞에서 나눔의 경제를 실연했다.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것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자본의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다른 상상력이다.

 

오늘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상상력을 지키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할 때, 교회는 가격 없는 것들ㅡ생명, 존엄, 아이의 웃음ㅡ을 끝까지 중심에 두는 공동체여야 한다. 세상이 유가와 주식 그래프로 전쟁의 종식을 계산할 때, 교회는 아이의 얼굴로 평화를 상상해야 한다. 그것이 "다른 질서"를 꿈꾸는 가장 구체적인 방식이다.

 

전쟁을 멈추게 하는 이유가 경제가 아니라 생명이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다른 질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질문은 계속 남는다. 누가 이 질서를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서의 대가는 누가 치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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