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일베 이즈 백’이 드러낸 혐오의 일상화와 한국교회의 책임
▲ 스타벅스 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논란은 국내를 넘어 외신에서도 다뤄졌다. PD수첩은 이 사건을 일베식 조롱 코드가 공적 영역으로 흘러나온 사례로 짚었다. ⓒMBC PD수첩 화면 갈무리
스타벅스 사태는 단순한 마케팅 실수가 아니었다. ‘5·18 탱크데이’, ‘억탁치’라는 말은 아무 맥락 없이 등장한 우연한 문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5·18민주화운동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광주의 거리로 탱크가 진입했고,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 앞에 쓰러졌다. 박종철은 경찰 조사실에서 고문 끝에 죽었고, 정권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로 국가폭력을 은폐하려 했다. 그런 역사적 죽음의 기억이 기업 홍보 문구 안에서 말놀이처럼 쓰였다.
지난 16일 방송된 MBC PD수첩 ‘일베 이즈 백 - 다시 만난 일베’가 주목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방송은 스타벅스 사태를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단순히 어느 기업의 부적절한 홍보를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으로 흩어진 일베식 조롱과 혐오의 언어를 드러냈다. 방송이 보여준 것은 “일베가 다시 돌아왔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베는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특정 사이트의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일베는 이제 밈, 노래, 손동작, 짧은 영상, 댓글 문화, 청소년 또래문화, 정치적 구호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방송 이후 온라인에서는 불편함과 충격을 호소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것은 단순히 일베라는 특정 사이트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놀란 것은, 일베식 조롱 문화가 이미 청소년들의 말투와 밈, 정치적 구호와 오프라인 행동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숫자와 노래와 손동작으로 바뀌고, 역사적 참사의 기억이 장난처럼 소비되는 장면은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방송에 대한 한국교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청소년과 청년들 사이에서 혐오가 놀이가 되고, 조롱이 문화가 되며, 죽음에 대한 냉소가 감각으로 굳어지는 현실 앞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교회의 뚜렷한 공적 응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침묵은 우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한국교회 일부가 이미 혐오와 음모론, 극우 정치동원의 언어와 너무 가까워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직설적으로, 한국교회 역시 이 혐오의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돌아온 일베가 아니라 스며든 일베
일베는 원래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베는 단순히 그 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만은 아니다. PD수첩에 등장한 청소년과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일베 사이트를 직접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베식 말투와 노래와 밈을 알고 있었고, 때로는 그것을 재미로 소비하고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일베가 더 이상 특정 사이트에 갇혀 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방송은 오픈채팅방 관찰, 청소년 대상 인지도 확인, 20명 집단 인터뷰, 호감·비호감 이동 실험, 일베 콘텐츠 반응 관찰 등을 통해 이 사실을 보여주었다. 어떤 숫자와 시간은 특정 죽음을 조롱하는 암호가 되었다. 어떤 노래는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어떤 손동작은 내부자들끼리만 알아보는 신호가 되었다. 어떤 이미지는 누군가를 조롱하면서도 겉으로는 장난처럼 위장되었다.
이른바 일베식 혐오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겉으로는 장난이고, 유머이고, 밈이고,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523이 무엇을 뜻하는지, ‘운지’가 누구의 죽음을 겨냥하는지, 부엉이가 어떤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지, “야 기분 좋다”는 말이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 특정 손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유머가 아니다.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는 조롱이다. 유머 코드가 아니라 폭력 코드다.
▲ PD수첩은 ‘5.23’, ‘부엉이’, ‘운지’ 등 일베식 은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하는 코드로 사용되어 왔다고 설명했다. ⓒ MBC PD수첩 화면 갈무리
호남을 ‘내부의 외국’으로 만든 언어
일베식 혐오의 출발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온라인 극우 문화는 서구의 극우 인터넷 문화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서구의 극우 문화가 이주민, 난민, 무슬림, 유색인종을 주된 표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면, 한국의 일베식 혐오는 처음부터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를 중심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단일민족 신화를 강하게 유지해 왔고, 그 때문에 혐오의 초기 표적은 외부에서 들어온 타자라기보다 내부에 만들어진 타자였다.
그 내부의 타자가 바로 호남이었다. 즉 일베식 혐오의 원형 가운데 하나는 호남 비하였다. “전라도에 가려면 여권과 김대중 자서전을 챙겨야 한다”는 식의 말은 단순한 지역 농담이 아니다. 이 말은 호남을 대한민국 안의 한 지역이 아니라, 마치 대한민국 밖의 낯선 공간처럼 만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호남을 공동체 내부의 적대적 외부로 만든다. 같은 나라 안에 있지만 같은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는 언어,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지만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언어였다.
여기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순한 정치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는 호남, 민주화운동, 5·18의 기억, 민주정부의 출현을 한꺼번에 상징하는 이름으로 소환된다. 일베식 조롱은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통해 호남을 조롱하고, 호남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조롱하며, 민주화운동을 통해 5·18을 왜곡한다. 그러므로 호남 비하는 단순한 지역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민주주의적 기억 전체를 공격하는 언어적 장치다.
김대중에서 5·18, 5·18에서 노무현으로
이 문법은 곧 다른 대상으로 확장되었다. 호남 비하는 김대중 조롱으로 이어졌고, 김대중 조롱은 5·18 왜곡으로 이어졌으며, 5·18 왜곡은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조롱으로 확장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호남 출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베식 조롱의 세계에서 그는 김대중 이후 민주정부의 계승자였고, 지역주의 극복을 말한 정치인이었으며,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진보적 흐름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베식 혐오의 다음 표적이 되었다.
여기서 혐오는 더 노골적인 형태로 변한다. 단순한 정치적 비판이 아니다. 죽음을 조롱한다. 고인의 말투를 흉내 내고, 생전의 연설을 뒤틀고, 서거일을 숫자 코드로 만들고, 서거 장소를 희화화한다. 이것은 정치적 반대가 아니다. 애도의 파괴다. 인간의 죽음을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폭력이다.
그리고 이 문법은 다시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로 이어졌다. 국가가 생명을 지키지 못한 사건, 유가족들이 고통 속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한 사건, 사회가 함께 애도해야 했던 죽음들이 일베식 언어 안에서는 조롱의 재료가 되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하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조롱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슬픔을 ‘정치적 이용’이라는 말로 비난한다. 그렇게 죽음은 사라지고, 책임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냉소와 조롱뿐이다.
일베식 혐오는 특정 대상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 먼저 누군가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낸 뒤, 그 사람의 고통과 죽음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대상을 계속해서 대입한다. 호남이 그 자리에 있었고, 5·18이 그 자리에 있었고, 노무현이 그 자리에 있었고, 세월호와 이태원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여성, 이주민, 중국인, 사회적 소수자도 같은 방식으로 그 자리에 들어간다. 더 넓게 보면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 역시 혐오와 조롱의 언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대상은 바뀌지만 문법은 같다.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만들고, 그 고통을 웃음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혐오는 먼저 감각으로 들어온다
PD수첩의 집단 인터뷰와 실험 장면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방송 속 일부 청소년과 청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미있어서” 한다고 말했다. “다들 하니까” 한다고 말했다. “별생각 없이” 본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성역 없는 농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혐오는 처음부터 이념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 혐오는 먼저 감각으로 들어온다. 짧은 영상으로 들어오고, 노래로 들어오고, 말투로 들어오고, 친구들 사이의 장난으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웃기기 때문에 따라 한다. 그다음에는 알아들어야 무리에 낄 수 있기 때문에 반복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은 습관이 된다. 더 지나면 신념이 된다.
방송 속 한 참가자의 말처럼, 처음에는 거부감 없이 입에 붙은 표현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인식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일베식 문화의 위험성이다. 논리를 통해 설득하기 전에 감각을 길들인다. 역사적 사실을 배우기 전에 조롱의 리듬을 먼저 익히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전에 그것을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
그 결과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죄책감이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감각, “죽음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는 감각, “유가족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감각, “역사적 고통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히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적 경계가 무너지는 문제다.
▲ PD수첩의 ‘일베 20명 집단 인터뷰’에서 참가자들은 ‘전라도’에 대한 호감·비호감 위치를 선택했다. 이 장면은 일베식 혐오의 밑바닥에 지역혐오가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 MBC PD수첩 화면 갈무리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
일베식 조롱은 거의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방패로 삼는다. “죽은 사람을 비판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 “왜 어떤 사건만 성역화하느냐”, “농담도 못 하느냐”, “불쾌하면 보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말들이 반복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타인의 인간성을 파괴할 권리가 아니다. 역사적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할 면허는 더더욱 아니다.
특히 일베식 조롱의 대상이 우연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그 대상은 반복적으로 사회적 고통의 자리에 놓인 이들이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 지역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사회적 소수자들이다. 강자를 향한 풍자가 아니라 약자와 희생자를 향한 조롱이다. 권력 비판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2차 가해다.
그렇기에 이것은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의 문제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언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회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죽음과 고통마저 아무 제한 없이 조롱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민주주의는 그 밑바닥부터 무너진다.
일베는 교회 밖에만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와 무관한가. 일베식 혐오는 교회 밖 인터넷 문화의 문제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가 이 문제를 말하려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일베는 교회 밖에만 있는가.
한국교회 안에도 이미 혐오의 언어는 깊이 들어와 있다. 반공주의의 이름으로 5·18을 왜곡하는 언어가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여성을 낮추는 언어가 있었다. 선교의 이름으로 이주민과 난민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순결과 질서의 이름으로 사회적 소수자를 정죄하는 언어가 있었다. 정치적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지역과 특정 정치인을 악마화하는 말들이 예배당 안팎에서 오갔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베를 비판하려면 먼저 자기 안의 언어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이웃을 조롱하는 말을 농담으로 넘기지 않았는가. 역사적 고통을 이념의 이름으로 지우지 않았는가. 유가족의 눈물을 정치적 선동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는가. 혐오를 신앙의 확신처럼 포장하지 않았는가.
교회가 사회를 향해 윤리를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교회 안의 언어가 회개해야 한다. 신앙은 혐오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다. 복음은 누군가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언어가 아니다. 교회는 타인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의 곁에 서는 공동체여야 한다.
죽음을 조롱하는 문화와 십자가 신앙
일베식 문화의 가장 심각한 지점은 죽음을 조롱한다는 데 있다. 5·18의 죽음, 박종철의 죽음, 노무현의 죽음, 세월호와 이태원의 죽음이 조롱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 앞에서 웃는 신앙이 아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추는 법을 배운다.
예수의 십자가는 조롱당한 죽음이었다. 군병들은 예수를 희롱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비웃었고, 권력자들은 그 죽음을 조롱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교회는 죽음을 조롱하는 언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십자가 신앙은 조롱당한 자의 편에 서는 신앙이지, 조롱하는 자의 웃음에 동참하는 신앙이 아니다.
바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윤리다. 교회는 누구와 함께 웃을 것인지보다 먼저 누구와 함께 울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강도 만난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기 전에, 그 곁에 멈춰 서는 것이 이웃의 길이다. 고통받는 이를 조롱하는 사람은 이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베식 혐오 앞에서 해야 할 말은 분명하다. 죽음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참사의 희생자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유가족의 고통을 정치적 계산으로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역사적 국가폭력의 기억을 장난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 이전에 인간됨의 문제이고, 신앙 안에서는 더욱 피할 수 없는 복음의 문제다.
▲ ‘표현의 자유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는 질문에 다수 참가자들이 동의 쪽으로 이동했다. PD수첩은 일베식 조롱이 ‘유머’와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방식을 드러냈다. ⓒ MBC PD수첩 화면 갈무리
한국 극우 개신교라는 내부의 문제
이 질문은 추상적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한국교회 일부는 혐오와 음모론, 극우 정치동원의 언어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왔다. 따라서 교회가 일베식 혐오문화를 비판하려면, 그 비판은 반드시 한국 극우 개신교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전광훈과 손현보로 대표되는 한국 극우 개신교는 교회 안에서 먼저 자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최근 서울서부지법 사태에서 보았듯, 극우 동원의 주요 인력 가운데 교회와 연결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더 이상 이 문제를 외부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교회가 극우 개신교 세력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다.
미국의 상황도 남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MAGA로 불리는 극우 정치의 중요한 기반 가운데 하나가 백인 복음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극우 개신교가 이 흐름과 정서적으로, 담론적으로 접속하고 있다면, 한국교회는 더 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혐오와 음모론, 국가주의와 종교적 열광이 결합할 때, 교회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극우 정치의 동원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 혐오와 음모론, 극우 정치동원이 신앙의 언어와 결합할 때, 교회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 동원의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최소한의 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결국 문제는 특정 사이트의 폐쇄 여부가 아니다. PD수첩이 보여준 일베식 혐오는 특정 커뮤니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놀이로 만들고, 역사적 죽음을 조롱거리로 바꾸며, 공동체의 애도 능력을 파괴하는 문화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문화가 이제 청소년과 청년들 사이에서 ‘그냥 재미’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미로 접한 혐오가 습관이 되고, 습관이 감각이 되며, 감각이 신념이 되는 순간 사회는 위험해진다.
교회는 이 문제 앞에서 침묵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이웃의 고통을 기억하는 공동체라면, 죽음을 조롱하는 문화에 맞서야 한다. 교회가 십자가를 믿는 공동체라면, 조롱당한 자의 곁에 서야 한다. 교회가 복음을 말하는 공동체라면, 혐오를 신앙의 확신으로 포장하는 언어를 거부해야 한다.
그렇기에 한국교회가 세워야 할 최소한의 선은 추상적인 도덕 판단이 아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혐오와 음모론, 극우 정치동원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흐름과 단호히 결별하는 일이다. 일베식 혐오가 타인의 죽음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면, 극우 개신교는 그 혐오와 분노를 신앙의 언어로 포장해 정치적 동원의 에너지로 바꾸어 왔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의 조롱 문화와 광장의 극우 정치, 그리고 일부 교회의 왜곡된 신앙 언어는 이미 서로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다시 물어야 한다. 교회가 지금 혐오와 분노를 신앙의 확신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춰 서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적 적대자를 악마화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건강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교회의 최소한의 선은 분명하다. 혐오를 복음의 언어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 선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교회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