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별 볼 일 없어. 다 개돼지야. 조지 오웰의 말입니다. 공산혁명이 성공하면 이상적인 공산사회가 만들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러시아혁명은 공산주의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혁명을 주도했던 트로츠키와 그의 세력들이 스탈린에 의해 암살되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당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지 오웰은 그 점을 뼈아프게 통찰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혁명과 그 이후에 나타난 스탈린 독재체제의 모순에서 인간에 대해 이렇게 탄식합니다. ‘인간도 개돼지하고 다를 게 없구나.’ 그 탄식으로 쓴 소설이 ‘동물농장(Animal Farm)’입니다.
러시아혁명 이후 벌어진 정치적 비극을 풍자한 또 하나의 소설이 있습니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의 ‘한낮의 어둠(Darkness at noon)’입니다.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의 독재체제에서 자행된, ‘모스크바 재판’을 모델로 한 소설입니다. 혁명의 전위에 서서 온몸을 불살랐던 주인공(루바쇼프)이 혁명이 끝난 뒤 오히려 반동으로 몰려 재판받고 사형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한 심리묘사로 풀어낸 소설입니다. 이상을 꿈꾸던 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자기 욕망을 위해 이상을 배신하고 동지를 짓밟는 일이 혁명 이후에 나타납니다. 혁명이 성공한 한낮 같은 시대에 권력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운 사태를 그는 ‘한낮의 어둠’으로 묘사합니다. 혁명은 이상사회를 꿈꾸지만 혁명 권력은 개인의 양심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흐루시초프, 트로츠키, 마오쩌둥, 폴 포트, 김일성 들은 모두 공산주의 사상의 창시자이거나 공산주의 혁명가, 또는 신봉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펼친 공산주의는 오히려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념보다 권력이 우선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자연계의 최고 권위로 여기고 인간 우위의 세계관(서구 백인 중심의)을 구축했던 계몽주의의 이상은 몽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조지 오웰의 통찰처럼 인간은 그거밖에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윤석열이 탄핵되고 감옥에 가면 모든 게 다 정상화되고 정치는 의로워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일부 이루어졌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질 기미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뻔뻔하고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는 내란 세력에 있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것들은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됩니다. 충청도 말로 하면 하나씩 조져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 된다는 게 역사의 경험입니다. 문제는 항상 내부에서 옵니다. 사냥이 끝나면 분배를 다투는 논공행상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진하게 정치를 공학적으로 보려 합니다. 1 더하기 1은 2가 되어야 한다는 수학적 논리로 정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순진하게도 정치를 인간으로부터 떨어뜨려 놓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는 인간의 오장육부에서 오욕칠정이 들끓어 분출시키는 용암 같은 것입니다. 온갖 욕망이 귀신같이 눌어붙은 바닥에서 피어나는 꽃이 정치입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속성을 매우 순화시킨 말입니다. 정치적 이상은 고결하지만 정치를 담당하는 인간은 욕망의 화신입니다. 비겁하고 음험하며 간사합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하이에나처럼 몰려다니며 산 사람을 물어뜯기도 합니다. 음험한 공작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사적 욕망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는 게 민주주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지저분한 사건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진보정당 역시 이러한 욕망의 용광로입니다. 다만 그 욕망을 통제하고 제어하여 질서를 만들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모럴입니다.
그런데 정치를 고결한 이상으로만 나이브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와 정치인을 혐오합니다. 정치인에게 거룩한 성자의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지지하던 정당이나 정치인의 작은 논쟁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느 한편에 서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공격하던 적의 자리에 자기 진영의 논쟁자를 세우고 공격합니다. 이런 내부의 논쟁들은 사실 인생이 끝장나거나 나라가 망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끝장내 버릴 것처럼 서로를 공격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지겹고 지겹게 듣고 말하지만 그 말은 필할 수 없는 진보의 숙명입니다. 지금 민주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분열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나는 종교인으로서 모든 사회 현상과 정치적 사건의 밑바닥에 인간의 모순과 한계, 무능과 부조리가 있음을 봅니다. 거기에서 종교적 심성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고,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각성이 종교적 심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싸워야 합니다. 싸울 때 변증법적 순환고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모순이고 숙명입니다. 하지만 더럽게 싸우지 말고 좀 격이 있게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김어준의 싸움의 기술과 태도를 좋아합니다. 그는 자기가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설정하고 그 대상만을 향합니다. 우리 진영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같은 바닥(언론?)에서 굴러먹다 서로 비위 상하고 틀어져서 자기를 비난하고 뒤통수를 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우리 진영에 속한 사람이면 절대로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습니다. 저열한 논평으로 내부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그의 큰 태도를 나는 좋아합니다.
요즘 SNS에서 소위 민주당 지지자들끼리 저열한 공격을 퍼부으며 계파 싸움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어질어질합니다. SNS에서 파도처럼 밀려다니는 계파 분열의 정치 언어를 보면 멀미가 날 것 같습니다. 재래식 언론 기사의 스크랩이나 AI로 합성한 짤들, 앞뒤 다 잘라먹고 욕부터 싸지르는, 본때없이 저열한 말들이 피로감을 줍니다. 학력 수준은 높아졌는데 사람들은 더 저급해져가고 있습니다.
정치의 타락보다 정치를 대하는 대중의 타락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 타락한 대중은 정치인 욕하면서 자기는 올바르다는 착시가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 자기의 정치적 식견과 판단력, 자기의 프레임이 특별한 지혜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견해가 다른 입장에 대해 혐오와 욕설을 배설할수록 더 큰 쾌감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정치적 선민의식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대중의 정치적 선민의식은 허위와 망상 위에 지어진 누각입니다. 혁명이 끝난 한낮의 밝음 아래 권력 다툼과 계파 전쟁의 어두움이 이렇게 찾아옵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독재 권력에 종속된 독일 시민의 모습에서 인간과 사회의 불행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당신이 필요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를 우리 시대의 정치 상황에 빗대어 말하면 우리가 민주적인 방식을 사랑해야만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독재체제가 만들어낸 가짜 정보나 이미지를 퍼나르며 혐오를 유발한다면,
우리는 윤석열을 탄핵시키고 난 뒤 윤석열을 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