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9~15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신의 조명을 위해 기도
지난 주일에 확인했듯이, 오직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리고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다”(γεννηθῇ ἄνωθεν)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새로운 출생을 강조한 것이라면,
“위로부터 난다”는 말은 그 새로운 출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다”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곧 “물과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5).
결국, 이 두 문장은 같은 말입니다. 즉,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과 성령”을 다시 번역하면, “물, 곧 성령”이 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물”이라는 단어는 빼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1) 그 이유는 8절에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처럼, 8절에는 “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5절에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라고 하셨지만, 8절에서는 “물”이라는 단어를 빼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하셨기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은 의미상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성령”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거듭남”을 위해서,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무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내가 이루어 낸 일”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2)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것을 직역하면, ‘육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영(πνεῦμα, 성령에 속한 새 생명)이다.’ 이처럼, 육은 육을 낳을 뿐입니다. 육이 “영(영적 생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갖게 되는 근본적 한계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하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해도 소용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도,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 하시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한 걸음도 내밀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예를 한 번 더 보겠습니다.
3) 마 10장(14p)을 열어보겠습니다. 10:1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여기, 열두 제자들의 명단에 가룟 유다도 포함됩니다.
이어지는, 2~4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여기 마지막에 “가룟 유다”가 나옵니다(“유다, 곧 가룟 사람”이라는 뜻).
따라서, 이 사람도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룟 유다를 두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 혹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를 두고, 마 26: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처럼,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는 것 자체가 천국행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요 6:70, “너희 중의 하나는 마귀니라”, 17:12, “멸망의 자식”)
그러니, 행여나 여러분 중에 자신의 직분과 자신의 경험과 체험에 안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사람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무엇을 들었다, 무엇을 보았다, 어떤 환상, 경험, 어떤 체험을 했다’는 사람을 누구보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정말 인격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경험과 체험을 말로 자랑하지 말고, 묵묵히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만 있기를 원한다.’ 경험과 체험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 경험입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본인에게 분명한 확신을 줄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대로 사는 삶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본”이 됩니다.
믿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이것보다 분명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4) 이제, 3:9, 10을 함께 읽겠습니다.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9절에 있듯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이에,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십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는 말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씀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된 새 언약의 내용인데,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내용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요한복음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참고로, 공관복음에는 “니고데모”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 3장을 외에도, 7장과 19장에 니고데모에 관한 이야기가 두 차례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7:50~51;19:39~40). 그 내용을 자세히 확인해 보면, 니고데모의 변화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 전승을 보면, 니고데모를 두고, “주의 숨은 제자 니고데모”(Lord’s secret disciple Νikόdēmos)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결국 그가 믿음을 가진 신자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때는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에, 두 개의 대조되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는 “땅의 일”,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입니다.
“땅의 일”을 직역하면, ‘땅에 속한 것들’, “하늘의 일”을 직역하면,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근데, 12절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만이 “하늘의 일”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13절(하늘에서 내려온 자)에 있듯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기에, 사람들에게 “하늘의 일들”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영광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엡1:17~18)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합당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12절(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일을 알게 하시려고, 땅의 일을 통해 설명하시는데,
너희 중에 아는 자가 없다.’입니다(“너희”: 니고데모를 포함한 유대 지도자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일을 설명하시기 위해, 땅의 일, 즉 “출생”을 갖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면, 사도 베드로는 노아 홍수 사건이라는 땅의 일을 통해,
장차 있을 하나님의 최종심판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6) 벧후 3장(386p)을 열어보겠습니다. 3:5~7을 함께 읽겠습니다.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6절이 노아 홍수 사건이라면, 7절은 장차 있을 최후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 땅의 일이라면, 이 땅의 일을 통해, 하늘의 일, 즉 장차 있을 최후 심판을 말씀하시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처럼, 7절에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때까지 보존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심판과 멸망의 날에는 경건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7절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10절에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처럼, 예수님은 갑자기 오십니다(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리고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동시에,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일, 모든 죄,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공개될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 홍수 사건(땅의 일)을 통해, 하늘의 일(최후 심판)을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때, 마 24:30의 말씀대로, “...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직역: 가슴을 치며 애곡) 그들이(=통곡하는 자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하나의 땅의 일을 통해, 하늘의 일을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십니다.
7) 3:14, 15를 함께 읽겠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8) 14절의 배경은 민 21:4~9(230p)에 나옵니다.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것은 광야 생활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상했던 이유는 4절에 있습니다. 에돔 왕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을 막았기에(민20:14~21), 그들은 먼 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만나)을 싫어한다”(5)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הַנְּחָשִׁים הַשְּׂרָפִים, 불타는 뱀들)을 보냅니다.
그러니, 그 뱀에 물렸을 때, 고통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불에 타는 듯한 통증).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합니다(7,“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그리고 모세는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습니다.”(9)
예수님은 땅에서 일어난 이 일을 가지고 오셔서, 하늘의 일을 설명하십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우리가 놋뱀 사건(민21:4~9)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놓고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죄로 인해 죽음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불뱀에 물려 사람들이 죽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허물로 영원한 죽음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구원의 방편을 직접 정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자되신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원의 방편을 직접 정하여 주셨습니다(사람이 구원의 방법을 정할 수 없음).
하나는 “놋뱀”, 또 다른 하나는 “놋뱀”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넓은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놋뱀이 오직 하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행 4:12).
세 번째 공통점은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놋뱀이 장대 위에 들어 올려진 것처럼, 인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4절을 직역하면, “모세가 광야에서 그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이와 같이 인자도 반드시 들어 올려져야 한다(ὑψωθῆναι δεῖ)”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과거에 있었던 놋뱀 사건(땅의 일)을 통해, 하늘의 일을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셨습니다. 놋뱀이 들린 것처럼, 인자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들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니고데모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12절에서, 예단하셨습니다(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마지막으로, 15절에 나오는 “영생”에 동그라미 하시길 바랍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안에서, 여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근데, 15절을 보시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했으니, 그 “영생”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영생입니다.
미래에 얻을 영생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 “영생”이 믿는 순간, 시작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큰 은혜이며, 기쁨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만약에, 믿는다면, “영생”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