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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작성자김종필라파엘|작성시간25.07.08|조회수34 목록 댓글 0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요셉의 인생관!

한때 K-드라마 열풍이 엄청났습니다. 비결이 대체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오랜 세월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 쌓여 한도 많고 탈도 많고, 사연도 많고, 자연스레 스토리도 많아졌겠구나, 생각합니다.

별의 별 사건들, 고통과 수모를 겪다보니 이야기꺼리가 많아진 것이 아닐까요? 그런 과정에서 내공도 깊어지고, 회복탄력성도 생겨나고, 사람이나 사물을 깊이 있게 관조하게 되고, 그런 측면들이 뜨거운 한류 열풍의 배경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나 시련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주간 계속 봉독하게 될 첫번째 독서의 주인공인 요셉의 스토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요셉 스토리를 다시 펼쳐서 읽고 묵상하다 보니, 웬만한 인기 드라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요셉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시기심으로 이글거리던 형들로부터의 철저한 응징을 당했습니다. 어둡고 깊은 수렁 속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요셉은 순식간에 머나먼 이국땅 종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던 요셉이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삶이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가운데, 마침내 그는 대제국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평생 꿈꾸어오던 장면, 형들과의 재회 순간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대기근을 견디다 못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까지 오게 되었는데, 마침 식량 판매의 결정권자가 요셉이었습니다.

제가 요셉이었다면 그래, 정말 오랜 세월 내가 참아왔다며, 그간 참아왔던 서러움과 분노를 형들 앞에서 있는 데로 다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형님들! 내 얼굴 기억 안 나세요? 형님들이 죽일 작정을 하고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 요셉입니다. 형님들! 대체 그때 왜 그러셨어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실 수 있나요? 그러고도 밤에 잠이 오던가요? 밥이 넘어가던가요?”

그러나 요셉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 4~5)

형들의 만행으로 인해 그 어린 나이부터 갖은 고생 다 겪고 숱하게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크게 용서합니다. 오히려 형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형들은 엄청난 불안감에 쌓이게 됩니다. ‘이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으니, 그간 참고 있었던 요셉이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철저하게 보복하고 응징하겠지?’ 하는 생각에 요셉을 찾아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건넵니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창세 50, 18)

형들의 태도에 깜짝 놀란 요셉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들 하지 마시라고 만류합니다. 그리고 형들을 따뜻이 위로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 50, 19-21)

자신에게 닥친 크나큰 불행과 역경조차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바라봅니다. 혹독한 시련과 십자가를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참으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요셉의 인생관입니다. 그 어떤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항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참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매사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하늘 나라가 왔다가 아니라 '다가왔다'고 선포하라는 의미>

 

복음: 마태오 10,1-7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늘 나라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하늘 나라가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현실의 문턱을 넘어섰고, 그 도래하는 힘 앞에서 모든 이가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야만 하는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알리는 가장 긴급한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포는 마치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서, 마녀의 저주로 영원한 겨울 속에 갇혔던 나니아에 “위대한 왕 아슬란이 오신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은 여전히 매섭습니다. 그러나 왕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 얼었던 강이 녹고, 눈 속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미세한 변화 앞에서 나니아의 모든 존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다가오는 봄의 소식을 기뻐하며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들과, 오히려 녹아내리는 눈과 얼음을 보며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겨울의 질서에 집착하려는 이들로 갈라집니다. 한쪽은 생명을, 다른 한쪽은 익숙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 갈림길의 본질을 이렇게 꿰뚫어 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이 선택의 드라마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종살이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집트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십니다. 나일강의 신, 태양신 라, 생명의 주관자 파라오의 권능이 하느님의 힘 앞에서 차례로 무너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파라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보며 진정으로 기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파라오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자유의 희망에 가슴 벅차했던 이들만이, 눈앞의 홍해를 건널 용기를 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며 불평하던 이들은, 결국 자유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이 영적 전쟁은 동일하게 벌어집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C.S. 루이스는 ‘신은 없다’는 지성의 성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차가운 어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 J.R.R. 톨킨은 끈질긴 우정 속에서 참된 신화이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루이스는 훗날 자신의 회심을, 오랫동안 지켜온 자기 생각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무너짐을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쁨’과 ‘안도’로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어둠의 차가운 안정감보다, 자신을 무너뜨리러 오신 빛의 따뜻함을 더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갈망이 있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를 이 선택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이유는 우리 논리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어둠을 선택했는데, 자꾸 빛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선택을 강요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 미세한 행복을 누리며 빛을 선택하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고. 이것에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다가오심입니다. 신명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신명 30,19)

 

슬프게도,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이 생명을 선택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과 성공이라는 우상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불안해하고, 자존심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우리를 교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의 겨울이 아니라 자유의 봄에 있습니다. 세.육.마.를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요 종살이임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행복을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환경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맛만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고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0,1-7: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사도를 부르신다.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 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 하셨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변화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므로 복음이 전해지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매일의 삶이 똑같아서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신학생 때 그런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틀에 맞춰진 생활을 하다 보니, 새로운 것 없이 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과연 신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었을까요? 특별한 삶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의 연속이라는 생각만 가득했고, 잘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월 피정 중에, 똑같은 반복으로 매일을 똑같은 반복으로 여겨서 힘들게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일이 다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을 똑같이 한번 살아보자.”라고 다짐했습니다. 똑같이 매일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루만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은 결코 똑같을 수 없다.”

 

오늘 하루는 오늘만의 유일함으로 온전하고 완벽합니다. 즉, 우리는 매일 특별하고 완벽한 하루를 주님께 선물 받았고, 그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소중한 하루를 대충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당연히 여기서 지루함이 느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 특별함과 소중함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을 따르는 추종자로 보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보다 당신의 사명을 함께 나눌 동반자로 제자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서 나오는 고유 권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권한을 나눠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이유는 특별하고 소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권위를 나눠주면서 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사도단은 12명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열둘은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새 이스라엘,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 역시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아들이면 분명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서, 매일 특별하고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세상의 틀 안에서, 세상의 것만을 쫓으면서 계속 특별한 것만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장은 뜻밖의 어둠 속에서도 도약할 때 이루어진다(헨리 밀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나에게 하느님의 영이 스며있어야 
악한 영과 선한 영을 식별하여 
악한 영을 멀리할 줄 알게 됩니다. 

그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입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영이 스며있어야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이 무너지고 
겸손이 자리하고 타인을 섬길 줄 알게 됩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영이 스며있어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된 
가식과 위선이 빠져나갑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영이 스며있어야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사라지고 
배려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영이 스며있어야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가난의 예수그리스도로 채우게 됩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영이 스며있어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먼저 돌보고 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이 깃들어 있는 영혼은 
내가 먼저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살아있는 이들의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예수님의 제자는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그들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능력으로
그들은 사명을
수행합니다.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부르심을
완성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가장 약한 이들을
먼저 향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무질서가 아닌
사랑의
우선적인
질서 속에서
실현됩니다.

길 잃은 양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가까이 있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또한
길을 잃었던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은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않고
사랑으로
기억하십니다.

먼저
찾아오시어
기쁨으로
다시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단 한 마리의
양에게만
국한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 자비의
마음입니다.

잃은 이를
향한 우리의
사랑 안에
이미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길 잃은 이의
마음 곁입니다.

그 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하루 되십시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상대를 미워하고 상대를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곧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우 요셉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괴롭혔던 형들의 마음에서

지옥의 괴로움을 봅니다.

 

지옥은 누구에게 떠밀려 가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도달하는 곳이라는 것은

작은 생각 하나가 일으키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증명됩니다.

 

스스로 양심이 찔려서 겪게 되는

그 괴롭고 편찮은 상태가

바로 내가 선택한 지옥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창세41,55-57;42,5-7ㄴ.17-24ㄱ 마태10,1-7

 

미완未完의 내 고유한 삶의 성경책

“렉시오 디비나 하기”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당신의 자애를 베푸소서.”(시편33,22)

 

어제 피정자들을 위한 미사 강론시, 밤새 하느님과의 싸움에 승리한 야곱을 설명하면서 덧붙인 말씀에 모두들 웃었습니다만 제 기분은 몹시 흐뭇했습니다. 

 

“야곱은 하룻밤 주님과 싸워 승리했지만 저는 매일 밤마다 주님과 싸워 이깁니다. 바로 12:30분 기상하여 01시부터 04시까지 하느님과 치열한 싸움 결과 탄생되는 매일 강론이기 때문입니다.”

 

동터오는 아침 야곱은 햇빛을 받으며 절뚝거리며 걸었지만, 저는 새벽 배밭사이 오솔길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습니다. 요즘 창세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이사악, 그리고 어제는 야곱의 고향집으로의 귀환과 더불어 에사우 형을 만나기 앞서 하느님과의 치열한 싸움에 승리하여 이스라엘 이름을 얻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되시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대로 인물 하나하나가 그대로 고유한 주님의 성경책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많은 내용이 생략되고 오늘은 야곱의 아들들의 가족사가 펼쳐집니다. 어제 그렇게 하느님과 치열히 싸웠던 힘이 넘쳤던 야곱은 늙었고 이제 그 아들들, 요셉의 형들과의 가족사가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임을, 또 인명은 재천임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꿈쟁이 요셉이 형들의 질투로 구덩이에 던져 졌다가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불운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만 요셉은 오늘 말씀에서 보다시피 이집트의 최고 재상이 되어 흉년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역할을 하니 하느님의 오묘한 구원섭리가 놀랍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늘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의 보호자가 되셨음을 깨닫습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 역시 하느님의 은총과 죄가  굽이굽이 점철된 고유의 성경책임을 깨닫습니다. 흉년으로 죽어가는 이집트인들은 물론 가나안의 요셉 형들까지 흉년으로 굶어죽게 되자 모두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의 요셉을 찾습니다. 이런 사태까지 미리 알아 대책을 세워두신 하느님의 심모원려가 놀랍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 동생에게 절한다는 꿈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흉년으로 세상이 몹시 흉흉하던 그 때 요셉은 파라오의 신뢰를 받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요셉이었습니다.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요셉에게 고스란히 해당된다 싶습니다.

 

“벼슬을 초개같이 여기고, 군주의 과실을 지적할 수 있어야 군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군주를 섬길 때에는 군주에게서 존경을 받아야지, 사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분명 파라오 왕과 통치자 요셉의 관계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요셉은 매몰차게 대한 후 사흘동안 감옥에 가뒀다 풀어준후 엄중하게 행할 바를 알려줍니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못박듯이 말씀하신후 형제들중 하나를 남겨두고 귀가한후 막내 아우 바로 요셉의 동생 벤야민을 데려 올 것을 명령합니다. 형제들의 뉘우치는 말들이 오고가는 상황을 그대로 보고 듣는 요셉이요, 요셉을 살리려 노력했던 르우벤 형이 동생들을 꾸짖는 말도 듣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통역자를 거칠 것 없이 요셉은 이 모두를 들었고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합니다. 회개하는 형들에 요셉의 마음의 앙금은 풀렸고 형제애가 살아나 울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지혜롭고 너그러운 통합적 인물이 요셉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경외한 요셉을 시종여일 함께 해 주시며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그대로 요셉의 삶 역시 고유한 한 권의 살아 있는 성경책임을 봅니다.

 

무명의 존재감없는 삶에서 하느님께 불림 받을 때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인생이 펼쳐집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세 종류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첫째는 신구약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둘째는 자연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셋째는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자연스런 신구약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확장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시니 바로 이들이 열두 사도입니다. 주님께 제자로 불림받아 사명을 지니고 사도로 파견받는 사도들 하나하나가 고유의 성경책 인생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 불림받지 않았더라면 무명의 존재로서 이름없이 살다가 사라졌을 제자이자 사도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삶의 중심을, 삶의 방향을 찾습니다. 바로 교회의 사람으로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 바로 우리의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이중신원이자 삶의 의미요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하나하나 성서의 인물들처럼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처럼, 하나하나 각자 고유의 삶의 성경책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한쪽씩 써내려가야할 아직은 미완의 내 삶의 고유한 성경책이요 신구약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와 더불어 내 삶의 성경책도 하루하루 날마다 렉시오 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한 번뿐인 내 인생인지! 하루하루 선물인생을 되는 대로, 생각없이 막 살 수는 없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덕이 갖춰질 것이며 삶도 날로 풍요롭고 자유롭고 충만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때로 길이 보이지 않고 답답할 때 주님의 십자가 앞에 고요히 머물러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다 보면 주님 은총의 빛이 우리 길을 열어 주심을 체험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참나를 발견하는 은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10,5) 
 
'가장 가까운 이웃을 먼저 사랑하자!' 
 
오늘 복음(마태10,1-7)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열두 사도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10,5-7)  
 
'제1대 베드로 교황'에 이어 현재 교황은 '제267대 레오 14세 교황'입니다. 교황은 이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로마의 주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고,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때문에 회칙이나 칙서나 권고 등을 통해 신자들에게 하시는 교황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황은 현재 이 시대의 여러 상황(시대적 징표)들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모든 복음 선포자들에게 권고한 '복음의 기쁨'은 '오늘날 복음 선포의 사목 방향'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신자가 '새로운 복음화'를 하여야 하고, 새로운 복음화는 '세 분야'로 이루어진다고 천명하셨습니다. 
 
첫 번째 분야는, 성령의 불로 활력을 얻어 신자들의 (미지근한)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분야는,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냉당교우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분야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4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권고가 바로 오늘 복음을 구체화하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이 되고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과 복음이 가장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복음말씀

1독서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1,55-57; 42,5-7.17-24

그 무렵 55 이집트 온 땅에 기근이 들자,

백성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파라오는 모든 이집트인에게 말하였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56 기근이 온 땅에 퍼지자,

요셉은 곡식 창고를 모두 열고 이집트인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57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6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17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22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23 그들은 자기들과 요셉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24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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