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예수님의 격려 말씀!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나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연자매라는 표현까지 쓰신 것입니다. 연자매는 큼지막한 맷돌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7,1-6
용서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라
찬미 예수님!
우리가 '용서'라는 주제를 만날 때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절망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데'라는 현실의 벽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가능한 용서'에 대한 당신의 가정사를 이렇게 나누어 주십니다.
한 신부님의 아버님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으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옆을 지키는 '아내'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매일같이 성전을 찾으셨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성전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습니다.
'환희의 신비'였습니다.
1단, 2단, 3단을 지나, 4단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함"
어머니는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성껏 아기를 바치는 성모님의
마음을 따라가던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묵상 중에,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술에 취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편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나 '웬수'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 저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큰아들'이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원망할 수 있고, 지치면 이혼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병든 '아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낳아준 자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맡기신 '큰아들'임을 깨닫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은 원망에서 '연민'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변했습니다.
'상처받은 아내'가 '기도하는 어머니'로 변하자, 놀랍게도 그 가정이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평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용서에 이른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1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복수'가 법이자 명예였던 시대였습니다.
가문의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를 갚는 것(Vendetta)은 아들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귀족 기사였던 '요한 구알베르토'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가 정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그는 복수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원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침내 1028년, '성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외곽의 좁은 길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와 마주쳤습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외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승리에 찬 복수심으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저 자의 심장을 찌르면, 가문의 명예도, 자신의 분노도 모두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무기도 없이 홀로 있던 원수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팔을 벌려 '십자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온 교회가 "보라, 십자가 나무"를 노래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던 바로 그
성 금요일에, 원수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형상화하며 그의 '믿음'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칼을 든 요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복수하는 자'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자'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차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를 찌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 앞에서,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칼을 칼집에 꽂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원수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로 이 '불가능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가 하루에 일곱 번 너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일곱 번'이라는 것은 '무제한의 용서'를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나를 한 번 속인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일곱 번이나 나를 배신하고 돌아와 "미안해, 회개할게"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합니까?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나'로서는 '용서하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놀라운 통찰입니다.
그들은 "예, 주님. 저희가 더 노력해서 용서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그것은 저희 힘으로 안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다른 힘, 즉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은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이 '겨자씨'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체'입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질겨서 도저히 뽑히지 않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용서할 수 없는 증오심'이 바로 이 뽕나무와 같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절대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이 작은 겨자씨가 내 안에 심기면, 즉 내가 그분을 받아 모시고 '그분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불가능해 보이는 증오의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은 11살의 작은 소녀에게서도 똑같이 증명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입니다.
그녀는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의 추행을 거부하다가 14번이나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소녀에게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마리아, 너를 찌른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압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압니다.
하지만 이 11살 소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네! 저도 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가 천국에 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 고레티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녀는 '성체'라는 겨자씨를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알레산드로의 구원을 바라며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가 용서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겨자씨'를 받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용서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시는 성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증오의 뽕나무를 뽑아내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오늘이 되시기를 빕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7,1-6: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말씀하신다. ① 다른 이를 죄에 빠뜨리지 말라. ② 회개하는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 ③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에 의탁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1-2절)라고 단호히 경고하신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하지만 다른 이의 발목을 잡아 죄로 이끄는 것은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죄로 이끄는 것은 자신의 죄보다 더 큰 죄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Hom. in Matthaeum 5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행동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신자의 삶이 공동체에, 교회의 증언이 세상에 어떤 본보기가 되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여기서 “일곱 번”은 수학적 횟수가 아니라 끝없는 자비를 뜻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용서는 사랑의 최고 증거이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네가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 닿지 못한다.”(Sermo 114) 우리가 받은 용서가 크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쉽게 단죄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이미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만 탈렌트”(마태 18,24-28)의 빚을 탕감받았음을 기억한다면,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응답이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신다. 믿음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힘의 문제이다. 가교리서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153항) 믿음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동시에 우리가 날마다 응답하며 자라나야 하는 은총의 길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다른 이를 죄로 이끄는 걸림돌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끄는 디딤돌이 되고 있는가? 나는 받은 자비를 기억하며,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는가? 나는 믿음을 내 힘으로 키우려 애쓰기보다, 하느님께 의탁하며 은총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처럼 작아 보여도, 그것이 진실로 하느님께 뿌리내린다면,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용서와 자비의 길, 믿음으로 사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산책하다가 귀여운 강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어디에 있는 보이지 않았고, 강아지만 잔디밭 위에서 킁킁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이 강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1) 최대한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2) 도망쳤다.
맞습니다. 2번, 도망쳤습니다. 만지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그 귀여움을 사진에 담으려고만 했을 뿐인데도 도망쳤습니다. 그렇다면 도망쳤다고 제가 화를 내며 강아지를 쫓아갔을까요? 아닙니다. 도망치는 것은 동물의 본성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왜 도망치면 비겁하다고 말할까?’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보았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서일까요? 도망치면 ‘비겁하다, 못났다, 쓸데없다’ 등의 부정적인 말이 쏟아집니다. 모든 동물의 본성은 도망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도망쳐도 본성에 맞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닐까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본성 이상의 지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성만을 유지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로 가득 찬 상태로 들어갈 수 없어서 영혼이 정화되는 시간, 또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본성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우리 본성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죄짓게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단호한 경고(‘불행하여라’)를 하십니다. 특히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하시지요. 이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또 용서도 그렇습니다. 한 번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라고 말씀하시지요.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용서 모두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냥 본성을 따르면서, 남이 죄짓든 죄짓지 않든 상관없이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주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뛰어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란 아주 미묘해서, 열리기만을 고대했던 문을 이미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브리아나 위스트).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1.10.월.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내려놓고
털어내고
비워내는
나무처럼
용서는 더 깊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관계 안에서의
회복이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들까지
사랑하십니다.
서로의 죄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이며,
서로의
상처를 껴안는
자비입니다.
형제를
꾸짖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용서는
약함이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강함입니다.
꾸짖음과 용서는
존재의 관계성을
완성하는
두 날개입니다.
용서를 통해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깊을수록
용서는 더 넓어지고,
용서가 깊을수록
믿음은
더 단단해집니다.
작은 믿음이
큰 사랑을 이루고,
그 사랑이
세상을 다시
일으킵니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하는
회개입니다.
용서가
회개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은총으로 가능하고,
은총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
드러납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사랑으로 실천할 때,
그것은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현존이
됩니다.
회개하고
용서하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와 믿음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믿음은 정확히 계량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앙의 길에는 자주,
막연하고 모호한 느낌에 사로잡혀
긴가민가하는 의구심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내 기도가 진심이기를
정말로 내 마음이 간절하여
하느님의 어좌를 흔들 수 있기를 고대하며
주님께서 내 원의에 모두
응답해주시기를 기대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제아무리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더라도
믿음이 없다면
밤을 새도록 줄기차게 기도를 이어갈지라도
형제를 향한 마음이 굳어 있다면
우리 기도는 꽝입니다!
주님의 기준은 늘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용서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럼에도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곁을 지킬 때
결코 우리의 간절함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마음이 꺾여 절망하는 순간,
그분을 향하는 가녀린 의탁의 마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이 작은 믿음으로
맹렬히 기도할 때
하느님 나라의 은총이 임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지혜1,1-7 루카17,1-6
배움의 여정
“선택, 사랑, 훈련, 습관”
“주님, 나쁜 길을 걸을세라 보아 주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입니다. 날마다 배워야할 것이 참 많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수도영성 대가 장 레크레르크(Jean Leclercq)의 책 제목인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이란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책 제목일뿐 아니라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자에게 필수적 자질입니다. 공자의 호학好學 사상에서 보다시피 아마 공자의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능가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 만난 네 경우 분들 에게도 감사와 존경과 더불어 여러면에 걸처 크게 배웠습니다. 만남의 은총, 만남의 축복입니다. 매일 공동전례를 통해서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끊임없이 새롭게 회개하며 배우는 수도자들입니다.
1.고등학교 졸업후 50년간 계속 만났다는 한 형제와 세부부와 일곱분이었습니다. 검증된 우정의 사랑이요 참사람들이라 격찬했습니다. 납골당도 같은 곳으로 결정했으니 죽어서도 함께 하게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50년 우정이니 멋지게 익어가는 가을 인생처럼 참 아름다웠습니다. 70대 세 부부에게는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찬사를 보냈습니다.
2.십여년 이상 모임차 격월로 주일에 앞서 수도원을 방문하여 만남후 떠나는 두 자매의 우정과 성실함입니다. 한 자매는 지극한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운전하며 참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봉사하며 구김살 얿이 한결같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분입니다. 이 의로운 분에게는 하느님 친히 보호자 되어 주심을 깨닫습니다.
3.거의 혼자된 불우한 처지에도 온갖 성실함으로 교회에 봉사하며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뒷바라지 하는 어느 자매도 한결같은 사랑의 노력도 정말 장합니다. 어제 처음으로 모녀 셋이 방문하여 단풍 화려한 정원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4.초등학교 옛 제자들로부터 해마다 받는 쌀 10kg 짜리 12부대를 택배로 선물받았습니다. 13살 때 제자들이 지금은 61세가 된 48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9명이 수도원에 보내준 쌀 선물을 어제 받았습니다. “선생님,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 카톡도 받았습니다. 10여년 동안 매가을이면 이렇게 수도원의 옛 스승에게 쌀 선물을 하는 착하고 성실한 제자의 사랑에서도 크게 배웁니다.
이런 순수한 자랑은 팔불출에서 면제되리라 봅니다. 어제 소개했던 두 예술가 수녀의 치열한 성미술에 대한 항구한 열정의 노력에도 크게 배웠습니다. 얼마전 “아펙의 성공을 위해 ‘영혼을 갈아 넣을 정도로’ 총체적 노력을 다했다”는 대통령의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이들어 세월 흘러 갈수록 배울 것은 끝없이 늘어납니다. 이런 배움에 대한 노력과 더불어 저절로 겸손도 따라 붙기 마련입니다.
제가 강론 쓰는 시간은 배움의 시간이자 공부의 시간입니다. 오늘은 성 대 레오 교황 기념일입니다. 만 61세 선종하기 까지 말그대로 명품인생을 사셨던 명품교황입니다. 이런 명품성인들이 명실공히 가톨릭교회를 명품종교로 만듭니다. 노년에 접어들수록 명품종교 가톨릭교회가 고향집처럼 참 편안하게 생각된다는 이구동성의 고백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 레오 성인교황에 대한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언급입니다. 현재 레오14세 교황이니 역대 교황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레오1세 교황입니다. 제45대 교황으로 재위 기간 동안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가톨릭교회를 넘어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로 거론됩니다. 대교황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으로, 1754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민족 대이동 시대에 국가 질서가 전반적으로 와해되고 오랜 제국의 수도가 몰락했을 때 유럽을 구하고 교회를 구한 성인의 활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비가톨릭 사람들에게 까지 이 교황이 널리 알려진 것은 교황의 재위기간중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맨몸으로 용감히 나서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위엄을 크게 떨친 일입니다. 반달족의 침입이 로마 시내의 약탈은 막지 못했지만 로마의 파괴와 살육만큼 막아냈습니다.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코와 맺은 합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그리스도교 교회와 관련 시설은 손대지 않고,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2.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3.포로를 고문하지 않는다.
정통신앙의 옹호로 고대 교회 초석을 마련했고,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로마시민들은 레오 1세 교황에게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바쳐서,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로마교황들이 아비뇽으로 유수 이전까지 정치 영역에 영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교황은 173편 서간과 100여편 강론등 방대한 저술로 교회학자로 선포되니, 그 엄혹한 내우외환의 시기 이런 신학적 위업을 통해 성인의 믿음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명실공히 하느님의 사람이었음이 입증됩니다. 레오 교황은 반달족의 로마 약탈 이후 461년 선종합니다.
이처럼 배움의 여정중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습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어느 고승이 제자 승려들에게 주었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오늘 말씀은 신자들의 공동생활에서 공통적으로 ‘훈련의 필요성(the need for discipline)’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지혜서의 시작 주제는 ‘하느님을 찾고 악을 피하여라’로 시작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 한다. 지혜는 다정한 영, 온 세상에 충만한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공동체 수행생활의 훈련에 주님의 영, 성령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게 됩니다. 정의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우선 덕목의 선택과 사랑, 훈련, 습관에 이르기까지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거룩한 영, 성령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주님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덕목을 선택했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겸손을, 정의를, 침묵을, 고독을, 순결을, 공부를, 자연을, 전례를, 미사를....이처럼 사랑해야 할 것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라 선사되는 날들입니다. 사랑에 이은 자발적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날마다의 한결같은 영적 훈련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평생 배움에 평생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될 때 진정한 덕이요 영성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 단락의 가르침입니다.
1.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대목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하며, 형제들에게 스캔들이 되지 않도록 ‘훈련된 깨어 있음(disciplined vigilance)’을 요구합니다. 스캔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깨어 경계하는 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2.“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회개의 훈련, 용서의 훈련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회개의 훈련, 용서의 훈련에 깨어 의식적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제 김수환추기경의 삶에 감명받아 70대 나이에 회개하여 세례 받게 된 형제의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의 “신자생활의 요점은 무엇이겠느냐?” 구두 시험에서 “회개와 구원”이라 대답했다는 말에 모두 성령의 은총이라 하며 감탄했습니다.
3.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이 진짜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청해야 할 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제자들처럼 믿음을 청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돌무화과나무도 복종하여 바다에 심겨질 수 있다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회개와 믿음뿐입니다. 벼락공부를 통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역시 항구한 훈련 결과 은총의 열매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훈련을 위해 날마다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훈련의 수행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온마음을 다해 참여하는 미사전례 수행보다 믿음, 희망, 사랑의 영적훈련에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필리2;15,16).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17,1-6)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고 하시고, '나의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4)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8)
어떻게 너를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잘못한 너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완전의 의미를 지닌 일곱 번씩이나.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입니다.
믿음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그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한 아주 작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단순하고도 작은 믿음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마침내는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너를 죄짓게 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고,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 2열왕9,29)
복음말씀
제1독서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 지혜서의 시작입니다.1,1-7
1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2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3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4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5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6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7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