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온 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통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그 누구도 천상잔치에 소외되거나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평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축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언젠가 한 수녀원 본원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참으로 잘 준비된 전례였습니다.
모든 성가는 장중한 그레고리안 성가였습니다.
빛의 예식에 이어,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었는데, 일곱 개 독서를 모두 봉독했고, 독서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성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사제석에 앉아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이겠지.
성삼위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을 비롯한 천상의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둘러 계시고,
거룩한 무리에 든 사람들과 함께 끝도 없이 말씀이 선포되고,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그러니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들, 그저 세상 좋은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천상잔치 그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겠구나, 정말 지루하겠구나,
거기 있는 그 자체가 지옥이겠구나.
그러니 지상에 있을 때부터 거룩한 전례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오늘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살짝 설명해주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야 예언서 11장 6~8절)
보십시오. 혼자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독식(獨食)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에 없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분노하고 무력을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침묵 속에 헌신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0,21-24
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법: 네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아버지 손을 잡아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세상과 단절된 채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손바닥에 글씨를
썼습니다.
인형을 주며 'D-O-L-L'이라고 썼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장난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데리고 펌프가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헬렌의 한 손에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다른 한 손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썼습니다.
'W-A-T-E-R' (물) 바로 그 순간, 헬렌의 영혼에 번개 같은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생생한 단어가 내 영혼을 깨웠다. 그것은 빛과 희망과 기쁨을 주었고, 나를 자유롭게 했다."
헬렌이 언어를 깨우친 것은 머리로 고민하며 땅을 팔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도하심(손)과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앎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빛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루카 10,21)라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논리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체험되는 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무신론적 지식인 형 이반과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가 등장합니다.
이반은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논리정연하게 나열하며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마이거나
무능한 거야." 이 차가운 지성의 공격 앞에서 동생 알료샤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는 논쟁으로 형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형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 단순한 사랑의 행위, 논리가 아닌 온기(입맞춤)가 닿는 순간, 이반의 견고했던 무신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논쟁이 아니라 입맞춤으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비게이션을 끄고,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는 내 땀과 노력으로 땅을 파서 소출을 얻는 행위입니다.
대신 하느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안해서(내비게이션) 몰래 많이 거두어 저장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썩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농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줍는 '거룩한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파는 것을 멈출 때, 하늘의 양식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 지식의 기쁨은 겸손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굴을 파듯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영적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에서 공중그네의 비밀을 말합니다.
공중그네에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플라이어(Flyer)'와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가 있습니다.
곡예사는 말합니다. "플라이어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공중에서 제가 맞은편 봉이나 캐처를 잡으려고
팔을 뻗어 발버둥 치면, 둘 다 손목이 부러져 떨어져 죽습니다.
제 할 일은 그저 팔을 뻗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캐처가 내 손목을 정확히 낚아챕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공중그네에서 내가 행복을, 내가 구원을 잡으려고(Digging)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공중에서 힘을 빼고, 위대하신 캐처(하느님)가 나를 잡아주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 하면 추락하고, 잡히기를 원하면 비상합니다.
이 모습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한 모습입니다.
작아집시다. 그러면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의 성과를 들으시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신다. 그 기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21절)
하느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드러나신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Adversus Haereses IV,20,7)이라고 표현했다. 곧 하느님은 인간의 교만한 눈에는 감추어지지만,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에는 드러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셨다.”는 말씀을 주석하며, “철부지들이란 단순히 배우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순수함이 계시의 문을 연다.”(Homilia 38,3) 말했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안다.”(22절 참조)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친밀한 일치이다. 그리고 그 친교 안에 성령께서 사랑의 끈으로 계신다.”(De Trinitate, I,4,7)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길은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만 열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들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다.”(23-24절 참조) 선언하신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옛 계약의 예언자들은 오실 분을 희망 속에서만 보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다.”( 63,2)라고 강조했다. 교회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구약의 모든 예언과 기다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계시 헌장도 “예언자들과 율법은 모두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15항)라고 가르친다.
대림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첫째, 겸손과 단순함의 태도를 회복하라는 초대이다. 하느님은 학문적 논리보다 겸손한 마음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듯, “하느님을 알기 위한 가장 큰 지혜는 겸손히 무릎 꿇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6) 둘째, 은총의 행복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고 듣는 은총을 받았다. 이는 과거 제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의 눈은 복되고, 우리의 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과 성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받은 은총을 삶의 제물로 드리는 일이다(로마 12,1).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오랫동안 특수 사목을 하던 신부가 정말 오랜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사원처럼 사무 업무만 하다가 드디어 사목자가 된 것 같다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당의 사무적인 일들은 전문가처럼 처리할 수 있었지만, 강론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강론을 하지 않았었기에 신자들이 원하는 강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강론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혀 반응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고, 또 원하는 강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이 신부는 어떨까요? 누구보다 기쁘게 본당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니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전혀 문제없고 상대방에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불평불만 등의 부정적 마음으로 후퇴하는 자기를 만들게 될 뿐입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문제점은 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의 안테나를 세워야 합니다. 겸손해야 자기 문제점을 알고 또 해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직후에 이어지는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대의 율법학자, 바리사이, 그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배움이 짧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겸손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려는 마음보다는 철부지들처럼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될 만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파울로 코엘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2.02.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가장 맑고
참된 지혜는
철부지의
마음에
깃듭니다.
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길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이 깊다고
하늘 나라를
더 빨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이들과
겸손한
이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철부지의 마음은
욕망과 계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큽니다.
꾸미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억지로
부여잡지도
않습니다.
이 대림 시기는
세속적 지혜를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낸
철부지 같은
정직함이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낮추고
단순해지면
감사와
은총의 길이
열립니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은총은
교만과 지식의
많음이 아니라,
우리의
낮고 비워진
마음 속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오늘의 삶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신비는
지식이나
계산이 아닌,
마음의
순수함 속에서
드러나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그 즐거움이 감추어졌다고 이르십니다.
세상의 누구나 행복하고 즐겁기를 바라지만
내내 행복하고 즐겁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천상의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터득했다고 자부하는
자신만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나라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실 분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철부지가 되기를 청하는 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앎으로
가득한 지혜인이 되기를 소원함으로
“성령 안에서” 천상의 기쁨을 누리시길.
온 마음으로 청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루카10,21ㄱ)
'우리도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0,21-24)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님에게 드러났다는 '계시(드러남)'와 제자들에게 하신 '행복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감사기도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라는 일흔두 제자의 보고를 받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10,21)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시 하느님의 법인 율법에 능통했던 사람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철부지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부터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체가 곧 율법이요 계명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철부지들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두고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삶으로 재육화시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기도를 바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