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만 원 짜리의 행복!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고, 더 인기를 얻고, 더 대박을 내고...그러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바도 참 많습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 거부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산 상속 때문에 벌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광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쓰고 싶어도 걸어다니지를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하늘 높이 금자탑을 쌓았지만, 결국 열심히 죽 쒀서 개 주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재산이 행복 불행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안에 담겨있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저같은 경우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든 뭔가에 열심히 몰입할 때입니다. 몰입의 대상이 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보다 복음적이고 생산적일 때, 느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는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사는게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태오 5,1-12ㄴ
참행복: 존재 가치 상승 욕구의 충족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수학 강사는 “강남 아파트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왠지 약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심이 묻어납니다.
40~50억짜리 한강 경치가 보이는 강남 아파트에 아마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일 행복할 때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처음 갔을 때. 그다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잔금을 낼 때.
막상 들어가 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더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구도 80이 젤 재밌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임영웅, BTS 절대 행복하지 않아.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대학도 마찬가지야.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고 그다음부터는 행복하지 않아.
그 안에 갇혀버린 거니까. 더 갈 곳이 없어.”
이 말 안에서 ‘희망’이 행복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끊임없이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끊임없이 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결코 완전히 달성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돈, 명예, 쾌락입니까?
사실 그런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욕망이 하나 있습니다.
‘존재 상승 욕구’
그냥 인정받으려는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강남 아파트를 살 때 처음 그 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잔금을 치를 때 느끼는 맛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 상승 욕구가 있고 그것이 충족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 돈이 있는 것을 자랑할까요?
그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존재 상승 욕구를 추구하는 우리는 모두 두 종류로 나뉩니다.
나의 창조자, 부모를 닮아가며 존재 상승의 기쁨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소유와 경쟁을 통해 타인보다 높은 존재임을 증명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비가 되어 존재가 상승하려는 노랑 애벌레와 애벌레 기둥을 기어올라 더 높아지려는 줄무늬 애벌레의 차이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경쟁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신학교에 늦게나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존재가 향상됨이 자주 느껴지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예수님 가르침의 시작이고 첫 주제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해야 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부활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닮아가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행복을 좇던 것에서 지금은 주님을 닮는 것이 목적이니
마음이 조금은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을 때보다 분명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 슬픕니다.
아기보다 어머니가 행복한 것처럼 그래도 슬퍼질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 더 행복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화가 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주님 뜻이라 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내가 죽는 데서 나옵니다.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고 조금씩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사실 박해도 없지 않은데, 가장 짜릿한 이상한 행복이 그때 옵니다.
그리스도와 매우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감의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봅니다.
이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또한 끝이 아니기에 행복이 거기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부모를 닮아감입니다.
더는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을 때 행복을 잃습니다.
부모처럼 말을 하고 부모처럼 두 발로 걸으며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물 위를 걸은 베드로는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유튜브에 보니 아기가 처음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가 기뻐서 계속 “엄마, 엄마, 엄마?”라고 하고 그러면 아기도 “엄마, 음마, 암마…”라고 하며 웃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도 기쁘고 아기도 기쁩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일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나의 변화하는 모습을 행복의 이유로 삼아봅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재미를 들여봅시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오늘 우리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과 연결해 이해했다. 모세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새 율법, 곧 사랑과 은총의 법을 선포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완성하러 오셨다. 산 위에서 선포된 참 행복은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주는 헌법이다.”
참 행복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자체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참 행복은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하며, 동시에 그분의 제자들의 삶을 드러낸다.”(1717항) 다시 말해, 참 행복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닮아가는 길이자,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모습(창세 1,27)을 회복해 나가는 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산상설교에서 참 행복이 서로 단계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을 성숙으로 인도한다고 설명한다. “가난함은 출발이고, 마음의 깨끗함은 정점이며, 하느님을 뵙는 지복은 완성이다.”
세상은 부유함, 권력, 성공을 복이라 하지만, 주님은 그 반대의 사람들이 복되다 하신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드러내는 선언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불행하고, 가난한 이는 하느님만을 희망으로 삼을 때 복되다.” 이처럼 참 행복은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자유롭고, 온유한 이는 폭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에 자신을 맡기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참 행복은 결국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가난한 이”: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비우신 주님, ★“슬퍼하는 이”: 인류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신 주님, ★“온유한 이”: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조차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주님,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 아버지 뜻에 충실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말한다.
참 행복은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초대이다. 닛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참 행복을 사는 이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새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다.” 참 행복은 “예수님의 얼굴”이자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교부들의 해석처럼,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하나 계단처럼 오르며 하느님과의 친교에 나아가야 하겠다. 오늘 우리 각자가 세상의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을 선택하는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아이가 콧물을 흘립니다. 이를 보고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한 선천적 결함을 의심할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감기의 증상으로 생각할까요? 이런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두통이 있습니다. 이때 뇌종양과 같은 심각한 질환의 신호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피로 등의 단순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까요? 만약 콧물이나 두통을 가지고 심각한 병으로 의심하고 있다면 아마 주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몇 년 전에, 우리 교구에서 병원에도 암을 감별하는 펫시티(PET CT)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미리 모든 암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교구 신부들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으며, 이 펫시티 검사를 했습니다. ‘나에게 암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발견되신 분은 없었습니다.
불필요한 가정을 통해서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제와 맞닥뜨리는데, 그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며 산다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생각들로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어리석음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십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옛 율법(십계명)을 받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규칙과 금지 조항을 넘어선 ‘사랑과 은총의 새로운 율법’을 산 위에서 직접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옛 율법은 ‘무엇을 하지 마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전혀 다른 행복이었습니다. 세상은 부유함, 웃음, 권력, 인정받는 것 등을 행복이라 부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 슬픔, 온유, 박해받음을 행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나의 외부적 조건이나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눈에는 결핍과 고통으로 보이는 상황조차도,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은 옛 율법으로 인해 힘든 상태였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조항으로 인해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 조항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만 생각했습니다. 이 모두를 지킬 수 없기에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특히 사랑의 관계 안에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것에 대한 걱정보다 하느님께 집중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불행은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키에르케고르)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08.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흐려진 우리 마음을
다시 맑게 비추어 보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먼저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집니다.
마음의 정화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며,
하느님을 뵙는 것은
그 여정의 완성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힐수록
우리는 현재의 진실을 놓치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세상 한가운데서도
욕심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맑은 마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세상의 욕망과 두려움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해질수록
사람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맑은 마음의 행복한 여정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그분을 따라나선 우리들이
참 행복과
참 사랑과
참 지혜를 살아가는 기쁜 소식을 외면하고
아합 왕의 기름진 식탁과 화려한 옷에 기웃대는 일은
참으로 부질없는 허세이며
아무 소용없는 짓거리이며
전혀 하느님께서 주시는 방법이 아닌 까닭에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행복은
소박한 음식
감사의 마음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1열왕17,7-16 마태5,1-12
참 행복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나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문제의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지어야합니다. 바로 오늘 산상설교의 첫 부분 참 행복이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성인이,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삶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길 잃은 AI 문명 시대에 궁극의 답은 산상설교의 참 행복뿐입니다. 레오14세 교황은 6/6일-6/12일까지 스페인 사목 방문 여정중입니다. 스페인 젊은이들을 향한 첫날 강론 일부를 나눕니다.
“참으로 사람이 되라(Be truly human). 외형보다는 살과 피의 사람이 되라. 그분은 이 현대 세계에 ‘복음의 선교사들’이 되도록 모든 젊은이들을 부르신다. 가톨릭의 믿음은 애덕에 의해 완성되는 삶임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다른 무엇보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이 덕이다. 여러분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 그것을 하라(Do it through love).”
문제의 답은 하느님이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없이, 사랑 없이 인간이 되는 길을 없습니다. 어제 신심 깊은 자매와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수도원 뜨락에 철지난 제비꽃이 혼자 외롭게 있어 제가 사진 찍었습니다. 신부님 예쁜 시 하나 지어 주세요.” 문득 예전 <제비꽃>이란 시가 있어 지체 없이 나눴습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제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산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 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진리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25년 전 여기서의 자작시가 여전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요 사랑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이자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참사람 성인을 상징하는 제비꽃입니다. 오늘 산상설교의 참행복은 그리스도교를 넘어 온 인류에게 주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인도의 성자 간디, 불가의 성철 대선사등 모든 영성가들이 열광하며 사랑했던 진복팔단의 참 행복입니다.
탈출기의 모세의 십계명을 능가하는 새 모세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 진복팔단의 참 행복입니다.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평생 과제는 이 참 행복뿐입니다. 십계명의 준수로는 착한 신자. 좋은 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성인은 되기 힘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참 행복의 문이자 길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보면 참 행복의 중심에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참 행복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하느님을 닮게 되고, 참으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살 때 저절로 참 행복한 사람이겠습니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이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참사람 참행복의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거울처럼 내 성덕을 비춰주는 진복팔단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한 빛을 발하는, 결코 AI가 줄 수 없는 진복팔단의 참 행복입니다. 평생과제로 평생 묵상하고 공부하며 수행할 덕목입니다. 참으로 자발적 기쁨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보람과 가치가 있는 참 행복의 수행입니다. 바로 이들의 배경이,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분, 이들의 결핍을 채워 주시는 분,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으로 충족되며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때 저절로 자발적 기쁨과 감사 중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수행자 삶>을 살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도전 의식을 일깨우며 분투의 노력을 다 하게하는 진복팔단의 참 행복이요,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한 참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하늘에서는 물론 이에 앞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어지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요 평화요 행복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행복의 사람들은 지금부터 이렇게 하늘 나라를 삽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열왕기 상권의 주인공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 옛날에 하느님 중심의 참행복을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바알을 섬긴 아합과 이스라엘에 기근의 심판을 예고한 엘리야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이들 무지한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바알 이방 우상을 섬김으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약속의 땅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이 가뭄으로 목마르고 굶주리는 동안 참 행복의 사람 엘리야는 별세계에서 하느님의 보호와 섬김을 받으며 독야청청합니다. 마지막 대목의 묘사가 지극히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사막의 오아시스의 구원을, 지상 천국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참 행복의 가난과 정의를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구원하시어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멀리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주님 계신 꽃자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함으로,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때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행복을 실천함으로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너를 지키시는 주님,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시편121,4).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참행복을 위하여!'
오늘 복음(마태5,1-12)은 산상설교의 시작인 '참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오르셔서 참행복에 이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참행복 선언은 '아홉 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참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행복 선언은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홉 가지 행복 선언 중에서 첫 번째 선언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라는 말씀이 더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이 선언의 의미는 '하느님께로 향해 있는 온전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는 강한 열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큰 열정'입니다.
이런 마음과 열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마침내는 죽음 저 너머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참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 세상 떠날 때에 결코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참행복의 원천'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께로 향해 있는 단순한 믿음'입니다.
(~ 욥기18,21)
복음말씀
제1독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7,1-6
그 무렵 1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4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
5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6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7,1-6
그 무렵 1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4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
5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6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