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햇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갈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존재 의미를 밝히신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사명과 정체성을 발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소금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부패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지켜내고, 진리의 맛을 더하는 역할을 가르치신 것이다.” 소금은 썩음을 방지하고, 맛을 더하며, 정결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교회 전통은 이 점에서 소금을 지혜와 순수의 상징으로 이해해 왔다. 세례 때 소금은 신앙의 지혜를 상징한다. 만약 신앙인이 그 ‘맛’을 잃는다면, 단순히 쓸모없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세상에 전해질 생명의 맛도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빛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양이시고, 우리는 달이다. 달이 스스로 빛나지 않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즉, 신앙인의 빛은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라.”(16절)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앞에서 스스로 드러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선행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교부들은 “등불을 등경 위에 놓는다.”15절)라는 비유를 교회와 연결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등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등경은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말씀은 모든 이에게 빛을 주며, 세상 속에서도 어둠을 몰아낸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0,11 요약)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가운데서 말씀의 빛을 가리는 함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이 드러남으로써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선행이다.”(Sermo 54,2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느님께 향하게 된다. 우리는 소금처럼 세상에서 부패를 막고, 맛을 더하며, 순수하게 살아야 한다. 또한, 빛처럼 어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광채를 비추며, 우리의 선행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제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우리가 다시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실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만이 찬양받으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표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영주에게 얽매여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고, 둘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 지금까지 진 빚을 탕감해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슬람교도의 땅과 재물을 약탈해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터운 신앙심 때문에 전쟁에 참전한 것 같지만, 위의 세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 4차에 걸쳐 전쟁했지만, 제1차 십자군 전쟁만 성공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슬로건을 걸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내용의 전쟁에 절대 함께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전쟁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보다 평화를 원하십니다. 힘으로 누르는 폭력보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모범적인 우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마태 5,13)
순수한 소금 자체는 짠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사해 주변에서 구하던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암염입니다. 습지에 노출되어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면 짠맛 없는 하얀 가루만 남게 되어 길가에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동화되어 복음의 가치(짠맛)를 상실하면, 존재 이유를 잃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마태 5,14)
신앙인은 세상 위로 높이 드러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거룩한 모범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 그래서 폭력까지도 합리화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분명해집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처럼 세상에 유익을 주고, 최종적으로 그 모든 선함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태양 아래 있으면 피부를 그을리지만, 성체 앞에 있으면 성인이 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09.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소금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녹여
다른 것의 맛을 살리고,
생명을 보존합니다.
자기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합니다.
소금은 말없이
모든 음식에 스며듭니다.
너무 많으면 짜고,
너무 적으면 싱겁습니다.
한 줌의 소금은
적은 양이지만
음식 전체의 맛을
바꿉니다.
내어줄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감사와 은혜라는
소금의 맛을
잊어버리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됩니다.
작은 감사가 큰 은총을
다시 살립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녹여 세상을 살리는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1열왕17,7-16 마태5,13-16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시편4,7ㄷ)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새삼 주님은 발광체요 우리는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하루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시종여일한 삶이 제일입니다. 바오로의 유언같은 다음 말씀으로 하루를 마친다면 얼마나 멋진 하루이겠는가 생각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4,7)
새 원장 취임 후 수도원 주변 환경이 많이 새롭게 청소 정리되었습니다. 어제 오전은 수도공동체 공동노동 울력의 날이었고 참여는 못했지만 배우는 바 매우 큽니다. 요즘 새로 난 반듯한 보드블록 집무실 옆길을 걸을 때 마다 마음을 바로잡게 됩니다. 이래서 평생 배우는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중 두 말마디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선거와 골프는 머리를 들면 진다, 선거는 하늘에 제사 지내듯 정성을 다해야한다” 매사 겸손히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나 깨나 마음에 새겨야할 겸손입니다. 예전 <겸손의 향기>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향기 맡고 꽃을 찾다
대추꽃향기
작기도 하고 나뭇잎과 같은 초록색이라
보이지 않는 꽃
향기 맡고 뒤돌아 찾아내는 꽃
은은한 향기, 겸손의 향기,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대추꽃
후에야 향기로 생각나는
이런 사람이 그립다, 보고싶다”<2001.6.21.>
예전에는 벌도 많아 흡사 <꽃의 향연> 같았는데 벌 하나 보이지 않는 오늘의 삭막한 현실입니다. 향기 맡고 뒤돌아 찾아내는 꽃, 대추꽃만 아니라 많은 아카시아꽃, 밤꽃, 자귀나무꽃, 찔레꽃 대부분의 나무꽃향기가 이러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겸손한 사람도 이렇습니다.
다산 어록의 6월 주제어는 전미개오轉迷開悟 불교 용어로 ‘번뇌로 인한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른다’ ‘껍질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의 중심을 세우라’라는 뜻으로 깨달음의 자유인이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지혜도 마음에 담습니다.
“수천 년을 견뎌온 고전은 평생을 머리맡에 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육경이나 여러 성현의 글을 모두 읽어야 하겠지만 <논어>만은 평생 읽기를 바란다.”
평생공부의 경전중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날마다 읽어야 고전은 <신구약성경책과 더불어 자연성경책, 내 삶의 성경책>일 것입니다. 제 책 세권을 늘 머리맡에 두고 읽는다는 순수한 열정의 <주님의 전사> 레지나 자매도 생각납니다.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좋은 예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의 주님의 산상설교 첫 부분 참행복에 이어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해 정의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떠난 소금이나, 빛이 아니라 세상속의 소금과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떠난 소금이나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 스며 들면서 음식을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과 더불어 음식의 맛을 돋우는 조미료 역할도 합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면 되는데, 사람은 맛이 가도 버릴 수 없다”
어느 자매의 탄식조 말마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변절, 변질, 변심, 변덕 없이 늘 한결같이 제 고유의 맛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바람직할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고 따뜻이 덥히는 세상의 빛입니다.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 평화의 빛, 겸손의 빛, 기쁨의 빛, 진리의 빛, 선의 빛, 아름다움의 빛, 그대로 참 좋은 발광체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의 빛입니다. 과연 나는, 내 공동체는 세상의 소금인가 세상을 밝히는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 빛인가 살펴보게 됩니다.
새삼 우리 주님이야말로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임을, 시종여일 평생 변질됨이 없이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산상설교를, 참행복을 그대로 사셨던 진짜 참사람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이요, 시종일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때 날로 예수님을 닮아 참된 그리스도인에 참 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값싼 은총도, 값싼 믿음도, 값싼 사랑도, 값싼 평화도 없듯이 값싼 소금도, 값싼 빛도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분투의 수행이 필수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노력과 더불어 하늘의 은총입니다. 바로 어제 나눈 참 행복 진복팔단의 실천이요 마태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 내용의 공부와 실천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개인이자 공동체로 살 수 있고 평생 끝이 없는 공부이자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초발심의 자세, 초보자의 자세로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삶뿐이겠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 아득한 옛날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예표입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렙다 과부 모자를 살리는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에게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었을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절망과 죽음을 밝히는 희망의 빛, 생명의 빛, 하느님의 빛, 엘리야였을 것입니다. 발광체 하느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반사체 엘리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고 무미건조한 세상을 사랑의 찬미와 감사와 기쁨으로 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세상의 차가움을 따뜻하게 하는, 발광체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다음 말씀은 주님께서 주시는 하루의 과제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늘 아버지께 찬양이 되고 영광이 되는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의 삶,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궁극의 목표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이와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7,7-16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지내던 7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