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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작성자김종필라파엘|작성시간26.06.09|조회수45 목록 댓글 0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 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룹니다. 큰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헌신하고 있는 작은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일상 안에서 자주 만나는 작은 사람들, 결코 작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조력자요,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태오 5,17-19 
 
완벽에 덧칠하는 사람들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뒤흔드는 아주 엄중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조차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조작하는 아주 위험한 풍조에 빠져 있습니다.
귀에 쓴 약은 뱉고 달콤한 사탕만 삼키려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고해소 안팎에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신부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지옥 이야기를 하십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설마 사람을 그런 곳에 던지시겠어요? 지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팍팍한 세상에 십일조가 웬 말입니까?
마음이 중요하지 꼭 물질을 바쳐야 하나요?
화가 날 때는 참지 말고 터뜨려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가짜 복음의 실체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하느님의 법을 교묘하게
지워버리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판관이 되어 하느님의 법을 재판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조작 성향이 초래하는 영적 파국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문학적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입니다. 독재를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이 처음에 피로 써 내렸던 위대한 칠계명을 하나씩 교묘하게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어기고 자기들이 침대에서 자고 싶어지자, 밤중에 슬그머니 글자 몇 개를 덧붙여 고칩니다.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라고 말이죠.
술을 마시고 싶어지자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 뒤에 "지나치게"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도달한 최종 수정안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기괴한 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글자 한두 개를 고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타협과 조작이 결국 농장 전체를 처참한 노예 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영혼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 화는 내도 되겠지.", "이 정도 십일조는 안 바쳐도 하느님이 봐주시겠지."라며 한 자 한 획을 고치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의 법전은 순식간에 사탄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설계도에 인간의 속된 손을 댈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사건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바로 스페인 보르하 성당에서 일어난 예수님 벽화 복원 사건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고귀한 얼굴을 담은 19세기의 명작 『에체 호모』가 세월이 흘러
조금씩 떨어져 나가자, 히메네스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좋은 의도로 붓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예쁘게 고쳐놓겠다는 생각이었죠. 결과가 어땠습니까?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선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위대한 작품에 손을 대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무서운 교만이 명작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율법을 내 입맛대로 수정하려 드는 행위가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자비라는 이름으로 지옥을 지우고, 형편이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빼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원숭이 모양으로 짓밟는 영적 히메네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율법은 단순한 규칙의 모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이자 사랑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처럼 보입니다.
획 하나가 삐져나오고 안 나오고에 따라 단어의 뜻이 '하느님'에서 '우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를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으로 빚어내기 위한 신성한 틀입니다.
이 틀을 내 육신의 편안함에 맞추기 위해 찌그러뜨리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닮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조작하는 것은 하느님보다 내가 더 지혜롭다고 믿는 영적 교만이며, 스스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혹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로 낙인찍는 자해 행위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지키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한 자 한 획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명하여 영원한 승리를 거둔 위대한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머스 모어입니다. 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의 결혼 인연을 전면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 했을 때, 영국의 모든 권력자와 주교들까지 국왕의 뜻에 맞추어 교회의 법을 적당히 수정하고 타협했습니다.
"왕의 결혼 하나 눈감아 준다고 나라가 망하겠느냐,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서약서에 서명 한 줄만 하면 만사가 편하다."라며 모두가 한 획을 지우고 타협의 붓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단 한 줄의 서약도, 단 한 자의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융통성 없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단 한 획도 조작하지 않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양심의 성인으로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 삶의 형편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는 뷔페가 아닙니다.
율법의 완벽한 설계도에 내 핑계와 타협이라는 인간의 가짜 붓칠을 더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침몰할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다 지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말씀의 한 자 한 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처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 순명과 경외심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완전한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안아 주실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율법을 존중한다는 차원을 넘어, 그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당신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충만히 드러내셨음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은총의 도래를 예고하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은 마치 교사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Contra Faustum, 19,7 요약) , 율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따라오신 이들을 은총 안에서 충만히 채워 주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작은 계명조차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서도 충실하다. 그러나 작은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큰 계명도 가볍게 여길 위험이 있다.”(Hom. in Matth. 16 요약)라고 경고한다. 작은 계명 안에도 하늘 나라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역시 이와 일치한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계명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랑 안에서 계명을 지켜야 한다.”(40, 42항 참조)

 

율법은 억압을 위한 족쇄가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외적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내적 정신, 곧 사랑과 자비를 살아내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작은 계명 안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작은 친절, 작은 희생, 작은 순종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성 베네딕토 규칙서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작은 시작이라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점차 완전함에 이른다.”(Prol. RB 요약) 우리는 작은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작은 계명도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기에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교부들은 작은 것의 충실함이 큰 것의 충실로 이어진다고 가르쳤다. 교회의 가르침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언젠가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나는 순간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터진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지가 터졌다고 이제 쓸모가 없다며 벗어 던지고 팬티만 입고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터진 부분을 가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옷핀을 사다가 터진 부분을 메웠습니다. 이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이 바지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실과 바늘로 터진 부분을 꿰맸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고가의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어느 날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장 났다고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현재 잘 고쳐서 잘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잘 쓰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구원의 길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의 그리스어는 원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듯 ‘가득 채우다’,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그릇을 깨뜨리러(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진정한 의미를 가득 채우려 오셨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규정 준수에 얽매여 있는 율법을,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율법을 원래의 목적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큰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 노력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용감한 사람에게 행운과 불운은 왼손과 오른손과 같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성 시에나의 카타리나)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10.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오늘도 주님께서는
미완성의 자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삶을
일깨워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결코 형식과 구분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라도
실제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지 못한다면
불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율법의 참뜻을
완성하셨습니다.

계명에 머물면
울법이지만,
사랑이 되면
완성입니다.

더 많은 규칙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형식에 갇힌
우리들을
다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마음의 중심이 되면
계명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삶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미완성의 자리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이끄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참된 완성은
날마다 사랑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1열왕18,20-39 마태5,17-19

영적전쟁
“영적승리의 삶; 순수와 열정의 사랑”
“주님께 아뢰오니,
‘당신의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또 없나이다.’”(시편16,2)

해마다 6월 이맘때쯤이면 수도원 곳곳 어디나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줄기차게 끊임없이 담벼락, 나무, 바위 타오르고 위로 하늘 향해 뻗어나갑니다. 자주 인용했던 오래전 담쟁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28년전 시이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담쟁이는 여전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기쁨이자 행복이요 충만이자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영적전쟁입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 역시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생존경쟁 치열한 전쟁터요 좌절하고 절망한 이들의 자살도 끊임없이 이어지니 흡사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담쟁이가 상징하는 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전사로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우리들이요 바로 이를 상징하는 담쟁이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구체적으로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제 평소 지론인 “주님의 전사는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다. 사고사, 객사, 병사가 아니라 싸우다, 즉 기도하다 일하다 공부하다 전사하는, 준비된 선물같은 죽음이면 좋겠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 450명 즉 1:450의 치열한 대결인 싸움은 그대로 영적전쟁을 상징합니다. 소년 다윗과 거인 골리앗의 전투도 연상됩니다. 참으로 중과부적의 비관적 상황이지만 이 치열했던 전쟁은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의 승리로 끝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나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양자택일의 선택의 요구에도 비겁한 백성은 묵묵부답입니다. 450명 바알 예언자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어 엘리야가 등장하여 간절한 기도로 전쟁에 돌입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새삼 영적전쟁의 승리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 무기인지 절감합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되어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립니다. 묵묵부답 눈치만 보단 백성들도 승복하여 얼굴을 땅에 대고 부르짖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마침내 바알 예언자들은 죽음을 당하니 1명대 450명의 대결은 엘리야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끝납니다. 우상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길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영적승리의 비결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하느님 향한 일편단심 순수와 열정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표현이 바로 기도와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순수와 열정의 온전한 사랑을 암시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비결은 무엇이겠는지요?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와 열정의 샘솟는 사랑입니다. 탓할 것은 남도 아닌 내 사랑부족입니다. 율법 따로 사랑 따로가 아닙니다. 율법은 사랑의 표현이요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판단의 잣대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율법하나 손상됨이 없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래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늘 평생 바치는 공동시편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도 영적무기도 없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그러니 주님의 전사는 기도의 전사, 사랑의 전사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가 되어 주님과 함께 백절불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나이다.”(시편16,11ㄱ).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ㄴ) 
 
'본질을 살자!' 
 
오늘 복음(마태5,17-19)의 제목은 '예수님과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5,17-18)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이 예수님께 적용한 죄목은 '율법 파괴죄'와 '하느님 모독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율법을 파괴하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 '안식일 규정'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율법 파괴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은 이 중요한 사랑을 간과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본질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식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형식만 지키는 것에 머물면서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착각 할 때가 있습니다.
미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필사하는 것으로만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의 본질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고,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했네 안 했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본질을 지키고 본질을 사는 것입니다. 
 
'미사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기도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말씀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불릴 수 있도록 날마다 사랑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욥기24,25) 

 

 

복음말씀

1독서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8,20-39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29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

32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34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35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36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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