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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작성자김종필라파엘|작성시간26.06.11|조회수61 목록 댓글 0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몸은 편안하나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한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자매님이었는데 집도 넉넉하게 잘 살고 자녀들도 말썽 안 부리고 성당 잘 다니며 남편도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도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무슨 일로 밤에 혼자 앉아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허한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해서 다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편해야 합니다.
몸은 잠을 자면 되고, 영혼은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음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물질로 되어 있어 물질적인 환경에서 쉴 수 있고, 영혼은 정신적이라 정신적인 환경 안에서 쉴 수 있지만, 마음은 영적이라 영적인 관계 안에서만 쉼이 가능합니다. 
 
영은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고백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큰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 주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누구도 나의 쉼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차 안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호흡이 멈춘 할머니를 구 강대 구강 호흡법으로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자는 100% 자신도 바이러스에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구강 대 구강 호흡으로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 줄 알았을까요?
그만큼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을 취하시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처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스승이셨습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항상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고 상대가 더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입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셨고, 우리는 또한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심판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내가 먼저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마음 쉴 곳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1. 예수 성심의 의미

 

초기 교회로부터 예수 성심(聖心)에 대한 언급은 이미 존재했다. 성심은 단순히 신체적 기관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가운데 사랑의 중심이자 구원의 샘으로 이해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심장은 교회의 탄생을 낳은 샘이며,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사들의 기원이 되었다”(Tractatus in Ioannem 120,2 의역)라고 말한다.

 

이는 요한 복음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에 대한 교부적 해석으로, 교회가 성체와 세례성사로부터 태어남을 드러낸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너희는 기쁨으로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195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상한 구세주의 심장에서 구원의 샘이 터져 나와 온 인류에게 은총이 흘러넘친다. 성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다.” 따라서 성심 공경은 단순한 감정적 신심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사랑,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응답이다.

 

2. 역사적 전개

 

13세기 이후 독일 신비가들과 시토회 전통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묵상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신심이 보편 교회 안에서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17세기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을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파레이 르 모니알에서 성녀에게 발현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인간들로부터 받은 냉담과 배은망덕에 찢어지고 있다. 너는 이 마음을 공경하게 하고, 보속의 첫 금요일을 바치게 하여라.”

 

이 요청에 따라 교회는 성체 성혈 대축일 후 첫 금요일을 성심 공경의 날로 정했고, 후에 비오 9세 교황이 보편 교회의 대축일로 선포하였다.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랑에 대한 감사의 날로서 더욱 깊은 전례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한다.

 

3. 복음 묵상: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오늘 복음(마태 11,25-30)은 예수 성심의 핵심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25)라고 하신다. 철부지 어린이들은 세속적으로 무력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순명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 이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셨으며, 이제 그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은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방식이다. 그분은 힘이나 권세로 다스리지 않고, 사랑과 겸손으로 구원을 완성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초대는 곧 그분 사랑의 방식을 배우라는 부르심이다.

 

4. 성심과 성체성사의 연관성

 

예수 성심 대축일이 성체 성혈 대축일 직후 금요일에 지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체는 곧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실체이며, 성체 안에서 우리는 상한 심장의 사랑을 체험한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듯이, 지금도 우리는 성체와 세례의 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성사적 표현이며, 우리의 성체성사 참여는 곧 성심 안에 들어가 그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다.

 

5. 오늘의 실천과 성찰

 

예수님의 성심은 단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아야 할 마음이다. 사제들에게는 성심을 닮아 사랑으로 봉사하는 마음, 평신도들에게는 가족과 이웃 안에서 그 온유와 겸손을 실천하는 마음이 요청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이며, 성체성사와 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사랑의 표현이다.”(478)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랑의 도구가 된다.

 

6. 결론

 

예수 성심 대축일은 단순히 신심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한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소서. 우리도 당신의 사랑 안에 평화를 누리며,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예수 성심 기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는 전축을 사 오셨습니다. 전축은 ‘전기축음기(電氣蓄音機)’의 줄임말로, LP(레코드판)를 재생하는 턴테이블, 라디오, 앰프, 스피커 등이 하나로 통합된 오디오 시스템을 가리키는 옛 표현입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려야만 했습니다. A면을 다 들으면 B면으로 뒤집어서 세심한 손길로 바늘을 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또 내구성이 약하고 먼지에 대한 취약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compact disc)가 등장했습니다. 간편한 데다 음질도 깨끗하고 선명했습니다. 이 CD가 음악시장을 완전히 평정할 줄 알았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CD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음원의 등장과 인터넷을 이용한 음원 스트리밍으로 전체 음반 시장이 급격한 속도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예전의 엘피판이 자연스럽고 풍부한 소리를 낸다며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또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인 분이시기에 그분께 집중함으로 인해 사랑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 바로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또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 직무를 더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을 윽박지르는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이를 어루만지는 온유함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는 겸손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멍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농경 문화에서 ‘멍에’는 보통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었습니다. 어린 소가 멍에 메는 법을 배울 때, 힘센 어미 소와 한 멍에를 매게 하여 어미 소가 사실상 모든 짐을 감당하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는 것은 새로운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한 멍에를 매시고 내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시겠다는 사랑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삶 안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결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거룩하신 예수님 성심 안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편하고 내 짐은 분명 가벼워집니다. 특별히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사제직이라는 멍에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에 무척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을 동정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신과 같은 일입니다(호러스 맨)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12.금.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29)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복음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불안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깊은 갈증에 대한
참된 해답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니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성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언제나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을 만납니다.

사제 성화의 원천 또한
바로 예수 성심에 있습니다.

예수 성심은 사제의 마음이
머물러야 할 자리이며,
사목의 출발점이자
성화의 샘입니다.

사제 성화는 신앙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며,
교회 쇄신은 무엇보다도
사제의 성화에서 시작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품으셨고,
겸손함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셨고, 십자가는
그 사랑이 이룬 완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사제 성화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듣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예수 성심을 닮아 갈수록
교회는 새로워지고,
세상은 더욱 따뜻해집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착한 마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사제들과 전 세계 교회의 사제들은

주님의 성심께

사제로써의 각오를 새로이 다지고

그분의 성심을 닮아 살아갈 것을 모여 맹세합니다.

 

사제들의 삶에서

힘이 드는 때에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힘에 부치는 일에서 그분께 의탁하도록

삶의 구비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쁘게 힘을 내도록 청합니다.

 

황폐한 세상에게

질식해 가는 영혼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외로움과 슬픔을 보여주는

사제가 되기를 원하고 보여줄 뿐 아니라

느끼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청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분께서는

온 사랑을 쏟아 채운

그분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세상을 위해서 주신 마지막 은혜의 수단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뜻에 순명하고

성령의 오심을 예언하였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48장에 걸친 마지막 기록을

“야훼 삼마”라는 표현으로 마감합니다(에제 48,35).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그 말씀은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져

이제 세상에는 그분께서 머무시는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들은 모두 그분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은혜에 큰소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라고

외치겠습니다.

모두 한 마음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간절히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6.12) -사제 성화의 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9)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1,25-35)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는 말씀'과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제들을 기억하는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인 예수 성심을 다시금 기억하고 이를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직무대리자'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제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축하하고, 사제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내'입니다.
... ... ...
예수님의 마음은 '완전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오늘 제1독서 신명7,6-11 참조)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오늘 제2독서(1요한4,7-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4,7.10)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1.16ㄴㄷ)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성령님도 사랑이십니다.
때문에 사제들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들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됩시다!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욥기30,31) 

 

복음말씀

1독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를 선택하셨다.>

신명기의 말씀입니다.7,6-11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7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 없이 직접 갚으신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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