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예수 성심과 한 쌍인 성모 성심!
시골에서 살다 보니 도시에서는 절대 못볼 광경을 목격합니다. 어젯밤 해루질을 다녀올 때는 갑자기 제가 모는 자동차 불빛을 보고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나왔는데, 아직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 고라니였습니다. 제가 천천히 달리니 안심이 되었던지, 제가 비춰주는 불빛의 도움으로 300미터 이상을 달리고 나서, 저를 한번 돌아보더니,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면사무소를 지나오게 되면, 그 뒤로 피정 센터까지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입니다. 분교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예쁘게 생긴 어미꿩의 인도에 따라 열마리나 되는 아기꿩들이 줄줄이 차도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녀석들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진풍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녀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나쁜 사람 아니란다. 내가 지켜줄테니 다른 차들 오기 전에 빨리들 건너가거라!’
제가 갑자기 나타난 돌발 상황 앞에 어머 꿩은 엄청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도로 중간쯤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생각을 바꿔서 아기들을 이끌고 나름 초스피드로 건너갔습니다. 부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끼 꿩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어미 꿩을 따라갔지만, 보폭이 짧은 탓에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끼 꿩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미 꿩의 모습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성이라는 것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어미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신 이후의 삶, 보통 어머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순간 지켜보신 성모님은 혹시라도 나로 인해 아기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은 늘 묵묵히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런 마리아의 거룩한 마음이 곧 성모 성심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향해 지니셨던 똑같은 마음으로 오늘 우리 각자를 굽어보십니다. 어린 새 같은 우리가 걱정되서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런 탈 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기를,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떠나 방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 성심과 한쌍을 이루신 성모 성심께서는 한 마음 한 몸으로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2,41-51
성모 성심 :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되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
(‘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면서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
『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 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그때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는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너무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1. 축일의 유래와 의미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에 의해 신심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온 세상을 마리아의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안에 뿌리내렸다. 이후 예수 성심 대축일 바로 다음 날을 성모 성심을 기리는 축일로 자리 잡았다.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성모 마리아의 깨끗한 마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마음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되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모 성심은 단순히 ‘감정적 차원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일치된 사랑의 마음이다.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마리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어떻게 결합하여 있는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되새긴다.
2. 복음의 신학적 의미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본문에서 마리아의 신앙 여정을 보여 준다.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장면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사흘간의 고통: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예시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사흘의 고통을 묵상하며,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당하신 고통을 이미 성전에서 맛보았다.”(Sermones 의역)라고 한다.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라고 하신 말씀은 그분의 하느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며, 마리아는 그 신비 앞에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 간직하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 준다.
“간직하였다.”(συνετήρει)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되새기는 신앙의 태도를 나타낸다. 오리게네스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말씀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Homilia in Lucam 의역)라고 말한다.
3. 교회의 가르침
교회 헌장은 마리아의 성심이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동정녀는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믿음과 순명의 모범이 되었다. … 그러므로 성모는 믿는 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서 제시된다.”(53, 58항 의역)
성모 성심은 그리스도의 성심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구원의 동반자로서 마리아가 지니는 사랑과 고통의 참여를 드러낸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너희는 기쁨으로 물을 길어 올리리라.”(Haurietis Aquas, 1956)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의 깨끗한 성심은 인류 구원의 제단 위에 예수님과 함께 봉헌되었으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불가분의 표징이 되었다.”(의역)
4. 신앙의 길: 성모 성심 본받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하느님을 잃어버릴 때: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예수님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주님을 자주 잃어버린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다시 성전으로, 하느님의 뜻 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찾게 된다.
묵상의 태도: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 위에 서야 한다.
깨끗한 마음: 성모 성심은 ‘티 없는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도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지향해야 하겠다.
5. 삶에 적용
말씀을 간직하기: 매일 복음을 읽고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주님을 찾기: 어려움과 방황 중에 세상적인 해결책만 찾지 말고, 성전으로 돌아오듯이 주님 안에서 해답을 찾는다.
사랑의 마음 닮기: 마리아처럼 깨끗한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대하며, 특별히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6. 결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단순한 신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마리아의 온전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도 성모 성심을 본받아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다시 찾으며, 깨끗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마리아의 성심은 교회가 거울로 삼아야 할 완전한 성소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배운다.”(성 요한 바오로 2세, 1986년 성모 성심 강론 요약)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인간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쓰지 못한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일까요?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의 15%를 써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뇌의 1%만 더 써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아마 지금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손상하는 뇌가 10~2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뇌의 부분이 80~90%나 되는데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 뇌의 100%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뇌의 10% 정도만 사용하게 된다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잠재력입니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뇌를 100% 활용하고 있습니다.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잠재력은 뇌의 활동량과 상관없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은 얼마나 쓰고 있을까요? 한 10%는 쓰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일 것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철저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습니다. 성모님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보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의 뜻이 우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순명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모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그분의 신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사건을 기도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거룩한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완벽한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슬픔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행복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시선입니다. 회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기는 일, 눈길을 살짝 들어 올리는 일이면 충분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13.토.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오로지
깨끗한 마음입니다.
참된 지혜는
깨끗한 마음 안에
깊이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품고
세상에 전해 준 마음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모 성심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는
인간 마음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절망에 머물지 않고
고통을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원망보다 감사로,
조급함보다 기다림으로,
집착보다 내어맡김으로
살아가는 삶어
성모 성심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맑은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이나 욕심을
결코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가장 큰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를 품으시는
하느님으로 가득 찬
마음이십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마음에서
모든 관계는 새로워집니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말씀을 익혀 가는
믿음의 밭입니다.
성모 성심과 함께
신뢰와 희망의 길을
걸어갑시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1,9-11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내 백성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