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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6월 14일 연중 제11주일

작성자김종필라파엘|작성시간26.06.14|조회수124 목록 댓글 0

출처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왕곡성당 카페마리아사랑넷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살레시오회

 

복음: 마태 9,36–10,1-8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 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 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태오 9,36-10,8 
 
착한 목자 되기: 행복한 성체 되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찬미 예수님!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에르리메노이'는 단순히 의기소침한 상태가 아니라,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처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처받고 길을 잃어 쓰러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채찍질도, 훌륭한 설교도 아닙니다.
그들의 찢어진 상처를 보듬고 기를 살려 일으켜 세워 줄 '착한 목자'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를 보십시오.
그는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싸리나무 아래 쓰러진 채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1열왕 19,4 참조).
위대한 예언자도 기가 꺾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시어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두 번이나 다정하게 깨우셨습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1열왕 19,7 참조).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기가 꺾인 이를 먼저 먹이시고, 완전히 회복시킨 다음에야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 19,6).
그렇다면 세상을 살리는 사제, 즉 목자란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 주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가르칩니다.
"먼저 자신이 정화된 다음에 남을 정화시키고, 먼저 자신이 거룩해진 다음에 남을 거룩하게 하며,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된 다음에 남을 하느님이 되게 하여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89항 참조). 
 
그렇습니다. 순서가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이, 그다음에 남입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진 사람만이 타인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꺼진 초가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심지에 불이 활활 타고 있어야, 나는 내 불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백 개의 초에 빛을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타인의 기를 살려주는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인의 기를 살려주고 상처를 끌어안으려면, 아주 명확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먼저 뼛속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아, 내 기가 우주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어떻게 남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원리를 가장 뼈저리게 증명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얼굴의 절반을 덮은 붉은 모반과 상악동 암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목자가 된 방송인 김희아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얼굴의 모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는 조롱과 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얼굴에 암까지 찾아와 뼈의 절반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이라는 깊은 어둠의 동굴에 자신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하느님께 제발 이 붉은 점을 없애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바라보시며, 자신보다 더 아프게,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주님의 모습을 가슴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끔찍이 사랑하시는구나! 이 점은 흉터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사랑의 표식이구나!' 
 
자신이 우주의 창조주께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바닥났던 자존감은 하늘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의 모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아 행복해지자, 그녀는 비로소 다른 이를 살리는 완벽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야단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이를 안아주며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딸! 이만하기 다행이네.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하네. 그치?"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도, 엄마의 그 굳건한 평화와 감사의 태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먼저 넘어져 피가 나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감사하지요?" 
 
야단치고 걱정만 하는 세상의 보통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기가 꺾일 뻔한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작은 일로 행복을 뺏길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감사를 통해 증명함으로써 아이의 영혼을 강인하게 세워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주교님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파견되는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의 피와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적 존재로 격상되고 그 압도적인 행복을 누려야만, 세상에서 기가 꺾인 이웃들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제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한 사람은 결코 기쁨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 안의 기를 살리고, 그 행복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이 입증하고 모든 성인이 실천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망상활성계(RAS)라는 정보 필터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핍과 불만에 집중하면, 뇌는 온 세상에서 불행한 증거들만 수집하여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반대로 "이만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뇌는 즉시 내 삶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들을 찾아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이미 감사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씨앗을 키우기만 합니다.
이 감사의 근육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훈련이 바로 '잠들기 전 감사 일기 쓰기'입니다.
인간의 뇌는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입력된 감정과 정보를 수면 기간 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고 영혼의 무의식에 새겨넣습니다.
하루 종일 남을 흉보고 세상의 뉴스를 보며 분노하다가 잠이 들면, 우리 영혼은 밤새도록 독극물에 절여집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 내 삶에 주어졌던 감사의 조건 5가지를 손가락을 꼽으며 찾아보십시오. 
 
'오늘 아침 무사히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어 감사합니다.
미운 사람을 향해 한 번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할 때, '가엾다(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자를 끊어내듯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이 성체의 사랑을 매일 먹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작은 상처에 기가 꺾여 주저앉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이 성체의 사랑을 내 삶의 현실로 번역해 내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한 성체가 되었음을 믿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찢겨진 세상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거룩하고 행복한 목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성체로 살아가십시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36–10,1-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파견하셨다. 
 
1. 하느님의 백성: 계약과 거룩한 부르심
탈출기 말씀은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사랑과 충실성’에 기초한 계약으로 드러낸다.(탈출 19,5-6) 이는 단순한 법적 구속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살도록 초대하신 사건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너 없이 너를 창조하셨지만, 너의 협력 없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신다.”(Sermo 169,11 요약) 즉, 하느님의 은총은 철저히 무상이지만, 그 은총이 열매 맺으려면 인간의 응답과 협력이 필요하다. ‘사제들의 나라’(탈출 19,6)로서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았듯,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계약의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야 한다.(1베드 2,9 참조) 
 
2. 예수님의 동정과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마태 9,36)을 가엾이 여기신다. 여기서 쓰인 동사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깊은 연민”을 뜻한다. 예수님의 사도 파견은 바로 이 자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을 청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추수의 주인님께 청하라’라고 하셨다.”(In Matthaeum hom. 32,2) 즉, 사도직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명이며, 그분의 자비로운 뜻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이다. 
 
3. 사도의 파견: 삶과 선포의 일치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사도”(ἀπόστολος, 파견된 자)로 세우시고, 당신이 하신 구원 활동을 이어가게 하신다.(마태 10,7-8) 그들의 선포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병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말만 하고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침묵하면서 존재 자체로 사는 것이 낫다.” 이는 오늘날 사목자들과 신앙인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복음은 삶 속에서 증거될 때만이 진정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4. 교회의 사명과 보편성
예수님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마태 10,6)에게만 사도들을 보내시지만, 부활 후에는 “모든 민족들”(마태 28,19)에게 파견하신다. 이는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이다. 교회 헌장은 이를 이렇게 선포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이 백성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불려 나와,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성령의 성전이 된다.” (9항)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존재하면서, 단순히 종교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민족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파견된 선교 공동체이다. 
 
5. 오늘의 적용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교회는 늘 일꾼 부족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일꾼은 단순히 성직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모든 신자가 일꾼이다. 우리는 말과 삶이 일치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는 기도와 삶으로 ‘추수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청해야 한다. 
 
6. 맺음말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우리를 부르셨듯, 우리도 거저 주는 삶으로 복음을 살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삶으로, 우리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마태 9,36 참조)라고 고백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람들이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성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를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학교에서는 배운 다음에 시험을 치지만, 인생에서는 시험을 치르면서 배우게 된다(톰 보뎃).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구속주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 질병을 낫게 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얽매고 있는
어둠과 집착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 가까이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상처 또한 치유됩니다. 
 
성찰 없는 힘은
폭력이 되기 쉽지만,
사랑으로 정화된 힘은
치유와 회복의 도구가 됩니다. 
 
제자들을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뜨겁게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신들의
상처와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치유받은 사람이 치유자가 되고,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의 전달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바꾸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마음을 닮아 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처럼 부르심과 치유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부르심은 곧 치유의 시작이며,
정화와 성장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치유받은 사람이
다시 세상을 치유하도록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넘치는 초대입니다. 
 
부르심은 하느님의 몫이고,
응답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 초대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능력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신뢰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뢰는
모든 부르심의 시작이며,
모든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치유받은 사람이 되고,
동시에 세상을 치유하는
은총의 사람이 됩니다. 

 

카톡 신부님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탈출19,2-6ㄱ 로마5,6-11 마태9,36-10,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옛 현자 다산의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내가 당당한 것은 어제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가르쳐서는 안 되는 두 글자가 있다. 바로 소일消日, 그럭저럭 한가롭게 보내는 세월이다."

레오 교황의 스페인 방문 중 마지막 카나리아 제도에서 한 강론 중 네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교회는 나라가 없는 곳에서도 존재한다.”

나라는 사라져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영원합니다.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그들의 존엄성은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민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자비는 작은 몸짓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놓는 것이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작은 것부터 자비를 실천해야함을 배웁니다.

“여러분, ‘열린 성서처럼 되십시오(Be like an open Bible).’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얼굴, 삶, 사랑, 실로 모두가 편히 느낄 수 있는 말에서 발견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아니 우리는 성인들은 물론 주변에서 자주 열린 성서 같은 착한 형제들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 첫 대목에서 예수성심의 사랑이, 하느님의 자비하신 연민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대로 살아 있는 자비의 성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요약이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인간 현실은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제자들인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현실은 역시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첫째 일꾼이 예수님입니다. 청할 것 없이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사야처럼, “제가 여기 있으니 저를 보내소서.”(이사6,8)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열두제자이자 사도들은 그대로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유다의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언급입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존재에서 주님께 선택 받아 참으로 존재감 충만한 제자이자 사도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열두 사도가 다 다르듯 우리들 역시 다 다릅니다. 비교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각자 고유의 모습 그대로 주님을 따르면 다양성의 일치요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성립입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민족들 가운데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처럼, 독수리 날개에 태워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당신 계약의 파트너이자 당신 소유임을 확인하는, 또 우리의 귀한 성소를 새롭게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부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화해를 자랑하라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뤄진 것입니다.”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를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우리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은혜로운 신원을, 그리고 우리의 고귀한 사명을 확인하는 우리들이며, 성령을 통해 더러운 영들에 관한 권한도 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믿는 이들의 사명은 예나 이제나 똑같으며 우리들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3.나병환자들을 깨끗이 해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우리가 하는 것 같으나 우리를 통해 주님 친히 하시는 일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치유입니다. 도대체 이 4개 병든 현실에 해당되지 않는 온전한 자들은 몇이나 될까요? 죄도 많은 세상이기에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더불어 평화로운 공동체 삶 자체도 <산들은>이란 다음 시에서처럼 위로와 치유의 좋은 복음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산들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등을 기대거나 바라보면서
늘 제자리에
평화롭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1997.10.4.>

알게 모르게 앓는 병자들이요, 희망과 꿈, 길과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아 있다하나 죽어 있는 자들, 죽어가는 자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며, 깨끗해져야할 영적나병환자들도 참 많을 것이며, 세속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 양극단의 맹신과 광신의 이념등 헤아릴 수 없이 온갖 종류의 마귀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입니다. 오늘날은 범세계적으로 마귀들의 창궐시대라 함이 옳은 진단일 것입니다.

요즘 각광받는 AI시대! 종말을 앞당기지 않겠나하는 우려도 듭니다. 편리하고 신속할수록 바빠지고 복잡해지고 여유를 잃고 조급해지는 역설입니다. 느리고 불편하고 힘든 것이 사람에게는 득이자 약일 수 있습니다. 식자우환, 아는 것이 병입니다. AI시대와 더불어 자연이, 인간이 망가지면 미래도 없습니다. 깨어 분별력의 지혜를 지니고 진리의 연인이 되어 정진하면 AI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AI는 우상이나 사탄이 되어 인간을 조종하고 지배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수확할 밭의 주님의 참 좋은 일꾼이,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사도가 되어 살 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자비하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ㄷ).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루카2,51ㄴ) 
 
'예수님의 마음!' 
 
오늘 복음(마태9,36-10,8)의 제목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와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꺽여 있는 군중을 향해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 
 
그러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을 사도로 명하시어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가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7-8) 
 
예수님께서 뽑으시어 세상 안으로 파견하신 열두 사도는 오늘날 사제들이라고 할 수 있고, 넓게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세상 안으로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먼저 하느님과 화해하고,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너를 향해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5,10) 
 
함께 노력해 봅시다!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생명운동입니다." 
 
(~욥기35,16) 

 

 

복음말씀

제1독서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19,2-6ㄱ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은
2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3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하게 되었다면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6-11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6-10,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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