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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작성자김종필라파엘|작성시간26.06.14|조회수28 목록 댓글 0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마태 5,38-42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시며, 인간적 정의의 기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를 가르치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탈출 21,24)는 동태 복수법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장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복수 자체를 초월하는 사랑의 길을 제시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대라하신 것은 단순히 악을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고, 가해자마저 변화시키라는 초대이다.”(Homilia in Matthaeum, XVII, 4 요약) ,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능동적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이 가르침을 당신 몸으로 실현하셨다. 채찍에 어깨를 내어주셨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도 저주하지 않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먼저 당신 자신이 원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De sermone Domini in monte, I,19,58 재구성) 그분은 단순히 이상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삶과 죽음을 통해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겉옷까지 내주어라.”(40)라고 하신 말씀은 물질적 소유를 넘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더 깊은 차원의 을 가리킨다. 교부들은 이것을 세례로 입는 새 인간’(에페 4,24)으로 해석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주석한다. “육신의 옷을 잃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움의 옷, 곧 그리스도를 잃는다면 우리는 가장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교회는 이 구절을 단순한 윤리적 교훈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초대로 해석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함으로써만, 우리가 인간적인 보복 본능을 넘어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1825, 1965, 2842-2845항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의로움’(마태 5,20)을 요구한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보복의 논리로 움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용서와 자비의 논리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악을 참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오직 사랑과 자비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은총 안에서 다른 뺨을 내어주는 용기를 낼 때,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과거는 학벌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서울대 나온 판검사, 의사, 대학교수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직업, 지위, 성실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그보다 서울의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 성공의 척도이고 명함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을 다니며 전문직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어느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화에서 부의 열등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보이는가?’

 

다수가 인정해 주어야 안심합니다. 이렇게 다수에 신경 쓰니 불안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눈을 신경 써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척도를 진실로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않지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되면, 자신감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주님께서 워낙 사랑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악에 대해 무조건적인 참음과 굴종을 요구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자의 비굴한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는 폭력으로, 억압에는 분노로 대응하는 세상의 공식을 깨뜨리시며 자신 있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잡이가 마주 선 사람의 ‘오른뺨’을 치려면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이는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모욕과 멸시였습니다. 이때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은 도망가거나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나는 네가 함부로 모욕할 수 없다. 칠 테면 손바닥으로 제대로 쳐라.’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당당히 주장하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40) 역시 당당한 모습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알몸이 되고 맙니다. 가난한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채권자의 탐욕과 부조리한 법정의 민낯을 벌거벗겨 고발하는 것입니다.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 5,41)

 

이 구절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상황이 배경입니다. 로마 군인은 유다인에게 무거운 짐을 천 걸음 동안 강제로 지고 가게 할 수 있는 징발권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짐을 지고 가면서 속으로 분노를 삭이는 대신, 자발적으로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것입니다. 징발의 한계치를 넘어서서 짐을 져줌으로써, 피해자는 힘없는 노예의 자리에서 벗어나 상황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약자의 비굴한 처세술이 아닌, 능동적인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니다. 세상 기준이 아닌 주님 기준으로 힘차게 세상을 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과거를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일수록 미래도 멀리 볼 수 있다(윈스턴 처칠)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15.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8)

새벽은 밤과 싸우지 않고도
어둠을 물러가게 합니다.

어둠과 싸우는 삶이기보다,
먼저 빛이 되어가는 삶입니다.

선으로 악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악의 방식으로
악을 이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러한 삶의
모범입니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셨고,
미움에 미움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악의 뿌리까지
변화시킵니다.

지독한 악의 늪인
분노와 복수의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악순환의 끈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
복음을 실천하는
복음의 사람입니다.

악인은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악에 맞서는
증오의 방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조차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악에 맞서지 않는 사랑,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힘입니다.

악을 이기는
그 힘을 진정 믿습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1열왕21,1ㄴ-16 마태5,38-42

보복의 포기,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

“악인에 맞서지 마라”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오늘 복음 환호송이 우리 삶의 참 귀한 지침이 됩니다. 주님 말씀의 빛이 우리 무지의 어둠을 밝힙니다. 무지의 탐욕, 무지의 폭력, 무지의 보복, 무지의 잔인함, 참으로 무지의 해악이 끝이 없습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제1독서를 요약한 말마디가 충격적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입니다. 무지의 악에 희생된 나봇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나약한 아합왕이요 그의 아내 이제벨의 잔인함이 거침없이 표현됩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나봇은 죽음을 당합니다.

흡사 세례자 요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죽음을,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하게 됩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억울한 이들의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참으로 늘 무지의 악에 대한 경각심을 지녀야 함을 배웁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무저항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악인에게 일일이 맞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지혜에서 나온 처방입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악이 바라는 대로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습니다.

어떻게? 적극적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입니다. 참으로 상생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악인도 살고 나도 사는 일입니다.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됩니다. 악을 무장해제하여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약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정말 내적으로 강한 이들이요 인간 존엄을 지키는 이들이니 바로 다음 주님이 주시는 삶의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참으로 큰 지혜, 큰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대우大愚인 듯하지만 대지大智의 사람들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악을 무장해제 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일이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相生의 길입니다. 오래전 바닷가를 거닐다가 문득 발견한 <바위섬>을 보며 쓴 시가 생각납니다.

“바위섬을 배우라

대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비바람 파도에 고스란히 내어 맡겨 깎이고 닦여

자기완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기완성에!”<1997.11.10.>

온갖 풍상고초를 견뎌내고 버텨낸 성자聖者를 상징하는 바위섬입니다. 29년 전 시가 감동으로 와 닿습니다. 흡사 오래된 고목에서도 이런 성자의 품위를 배웁니다. 어디를 가든 우선 찾아보는 것이 감동을 주는 바위와 노목老木입니다. <나무로 살고 싶구나>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예나 이제나 제 나무 사랑은 여전합니다.

“나 나씨였다면
이름은 무조건 무無였을 것이다
성명은 나무無,
나없어 무아無我이니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나무처럼 넉넉하고 편안하게 늙어가면 얼마나 좋으랴!
나무처럼 싱그러운 마음 향기라면
나무 나이테처럼 영혼의 나이테 신비 그윽한
무늬와 결에 색깔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지날 때 마다 한 가슴 가득 안아 보는 늘 봐도 늘 좋은 나무야!
나 나무로 살고 싶구나”<1999.2.28>

바위섬이, 노목이 상징하는바 성자같은 참 어른입니다. 악을 무장해제시켜 무력하게 만드는 대우이자 대지의 어른들입니다. 참으로 악이 바라는 바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단斷, 끊는 참 좋은 처방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입니다. 오늘날의 국내외 현실이나 우리 서로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날 길도 참 요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늘 가르침이 답을 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 이런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비폭력적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새삼 오늘 영성체송 시편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ㄱ)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오늘 복음(마태5,38-42)은 '폭력을 포기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 곧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는 복수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방법 마저도 거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조금도 손해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인데, 과연 불가능해 보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악과 맞서 싸워 승리해야 하는데,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씀인가? 
 
이런 물음 앞에서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이렇게 다가 왔습니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욕과 상처가 너를 죽이는 증오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더 내어주는 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은 '모든 모욕과 상처를 짊어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 표지인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온전한 믿음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생명운동입니다." 
 
(~욥기37,24) 

 

복음말씀

1독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1,1-16

그때에 1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

그 대신 그대에게는 더 좋은 포도밭을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셈하여 줄 수도 있네.”

3 그러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4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제 조상님들의 상속 재산을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궁전으로 돌아갔다.

아합은 자리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5 그의 아내 이제벨이 들어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속이 상하시어 음식조차 들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6 임금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실은 내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그대의 포도밭을 돈을 받고 주게.

원한다면 그 포도밭 대신 다른 포도밭을 줄 수도 있네.’ 하였소.

그런데 그자가

저는 포도밭을 임금님께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는 것이오.”

7 그러자 그의 아내 이제벨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제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당신께 넘겨드리겠습니다.”

8 그 여자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인장으로 봉인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시오.

10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11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

12 그들이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자,

13 불량배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맞은쪽에 앉았다.

불량배들은 나봇을 두고 백성에게,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를 고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인 다음,

14 이제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15 이제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합 임금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셔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돈을 받고 넘겨주기를 거절하던

그 포도밭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합은 일어나,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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