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든든한 주님 현존하심으로 인한 흔들리지 않는 기쁨!
강가를 걷다 보니 한 며칠 내린 집중호우로 산책로 곳곳에 큰 물웅덩이며 진흙탕 길이 생겼습니다. 신발이며 바지에 흙탕물이 튀지 않게 조심조심 걷다가 아주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작고, 하얗고, 귀공자다우면서도 귀여운 강아지는 처음 봤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걸음을 멈춰 서서 귀엽다, 예쁘다, 난리였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걸어 다가가 큰 물웅덩이 앞에 섰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큰 장애물이었던 가봅니다. 녀석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런 녀석을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던 견주가 이렇게 말하며 녀석을 당신 품에 꼭 안았습니다. “우리 애기, 무서웠쪄? 이제 괜찮아. 아빠가 있잖아!” 세상에 그 어떤 사랑 많은 아빠 저리가라였습니다. 아저씨 품에 꼭 안긴 녀석의 표정도 더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지상에서의 천국체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오래전 아주 어린 시절, 그 누군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부모님 품에 꼭 안겨 지내던 그 시절, 충분히 천국체험을 만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 역시 그 누군가에게 그런 천국체험을 맛보게 해줄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며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다운 사랑 한번 받지 못한 나 같은 인생이 또다시 있을까?’ 하며 실망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9-31)
함께 걸어가는 우리 이웃들을 좀 더 귀히 여기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고 한심한 ‘나’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최근 시성 시복되는 성인들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분들이 지상 생활을 영위해나가시는 동안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한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물, 만사를 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하루를 영원처럼, 영원을 하루처럼 살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분들은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생활을 지극정성으로 살아가셨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를 바라볼 때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볼 때도 아주 사랑스러운 눈으로 정중하게 바라보셨습니다.
피조물 중의 가장 으뜸인 인간을 대할 때는 더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 특히 가장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얼마나 큰 애정의 눈길로 바라봤는지 모릅니다. 더불어 더없이 나약한 허물투성이인 자신의 인생도 너그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또한 그분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짧은 생애를 더 없는 기쁨의 삶으로 엮어갔는데, 그 기쁨이 그 누군가 타인에 의해 주어진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든든한 주님 그분의 현존하심으로 인한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결과 모진 박해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도 성인들의 얼굴은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예레미야 20,10-13
로마 5,12-15
마태오 10,26-33
‘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0,26-33: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반복된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도들과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루카 2,34), 박해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동반자처럼 존재해 왔다.
1. 예레미야의 상징성과 그리스도인의 소명
제1독서(예레 20,10-13)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당한 고통과 두려움을 증언한다. 그는 동족으로부터 “공포가 사방에 있다!”라는 조롱을 받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끝내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충실함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고하며,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2.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된다. 우선, 심판 때에의 담대함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된다.(26절) 즉, 진리의 말씀은 결국 드러날 것이므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복음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감출 수 없으며, 진리를 감추는 순간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참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육신만 죽일 수 있지만, 영혼과 육신을 함께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28절) 이는 인간 권력보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 곧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일깨운다. 사람의 칼은 육신을 베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영혼과 육신을 함께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칼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섭리 안에서 확신을 갖도록 하자.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존재 전체가 아버지 손길 안에 있다는 약속이다.
3. 고백과 증언의 책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용기와 순교 신앙의 의미를 드러낸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믿고 생명을 바쳤다. 교회 헌장도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당해 왔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의 운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부활의 빛을 드러내는 표징이다.”(42항)
4. 은총이 죄를 압도한다: (로마 5,12-15)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죄보다 더 큰 것이 은총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죄의 세력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신앙인은 두려움보다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5. 신앙인의 삶에의 적용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위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용기는 인간적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증언이 된다.
6. 맺음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진리는 드러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의 섭리가 너희를 붙들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는 담대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구원과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 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오늘의 명언: 한 인간의 참된 가치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가늠된다. 인생의 행복은 하루를 어떤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6.21.연중 제12주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두려움은 줄어들고
감사가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와 우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성공이나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이미 소중하고 귀합니다.
참새는 참새로서 소중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소중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두려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두러움보다
먼저 와 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존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평가와 걱정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불안과 경쟁이
일상이 된 이 시대에
우리는 자주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과 역사 안에서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은 더 이상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6ㄱ)
'당당한 신앙인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0,26-33)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선포하여라. 너희가 귓속으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10,26-27)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10,32-33)
'당당하게 신앙생활 하자!'
'성당 안에만 갇혀 있는 신자가 되지 말자!'
'성당 밖에서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자!'
'성당 밖에서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감추지 말고 당당하게 드러내자!'
'당당하게 성호경을 긋고, 기도하자!'
'그리스도인'은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이 되려고, 복음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고 복음이 되어야 할 자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저는 그곳이 바로 '가장 작은 교회인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예수님이 되고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가화만사성'이기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겨내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며 그 사랑을 기억합시다!
(~ 시편8,10)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0,10-13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12-15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6-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