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워싱턴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 교수의 글입니다
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한번 리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토색한 물건,,,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엑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 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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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한번 리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사람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토색한 물건,,,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엑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 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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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호> 말라기書가 익명으로 기록된 이유
또 다른 신학 박사님이시자 교수목사님이신 분의 글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의 저자가 ‘말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LXX 역에서 1:1은, “Oracle; the word of Yahweh unto Israel, by the hand of his messeng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使者)입니다. ‘말라기’는 ‘말라비’ (Malabi)에서 온 말로 아비(abi = 아버지, 왕하 18:12)로서 “여호와의 사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몇몇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익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편집자에 의해서) '말라기'가 인명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3:1 가운데서 예언자가 자기에게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 데서 온 것입니다.
탈굼(Targum)역은 말라기를 “서기관 에스라라고 불리워지는 나의 사자” (my messenger whose name is called Ezra the Scribe)로 이해 하고, 제롬도 에스라가 썼다고 주장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페카(Pehah)라고 불리는 총독이 다스리는 나라(말 1:8; 느 5:15) 이었음을 보아서 포로기 이후인 450년을 전후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오늘날 교회에서 십일조를 갹출할 때 말라기서를 인용하지만, 사실 말라기서는 그 당시 십일조를 거두어 그것으로 배를 채우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한 글입니다.
이런 글을 실명으로 발표하게 되면 권자에 앉아 있는 그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감춘 것은 (다른 선지서 저자들처럼) 생명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명제 4<십일조와 십분의 일>
교회 성장의 초석이며 신앙의 척도인 십일조, 한국교회의 불문율인
십일조에 대하여 이제는 올바른 성경 해석으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이 철저히 무시되고, 기복과 전통
적인 것에 너무 익숙한 십일조를 건드린다는 것부터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부패, 심지어 기독교의 부패 뒤에도 마귀의 미끼가 돈이
었다는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라는 위기 의식을
갖고 개혁의 선봉대인 우리 숭사리들이 순수하고도 냉철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자 이제 십일조에 대해서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까지만 우리가
살펴 보도록 합시다.
1.십일조의 뜻
십일조(十一條)의 조(條)는 법 시행에 따른 세부적 규정으로 조항, 조례,
조규, 조문처럼 법적인 용어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근거법
입니다. 십일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법에 해당하는 강제적인 십일조
와 감사의 발로인 헌금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드린 것은 십분의 일의 감사헌금이었
습니다. 이것은 복과 저주의 강제적인 성격을 띤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원하는 헌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십분의 일을 드리면서 우리처럼 복을 달라하지 않았
습니다.
아브라함의 십분일(十分一) 찬송->honor and thanks(영광과 감사)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十分一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20) ↓
야곱의 십분일(十分一)
“야곱이 서원하여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먹을 식량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주신 것에서 十分一을
드리겠나이다”(창28:20∼22)
아브라함의 십분의 일의 감사헌금과 달리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제정된
하나님의 법으로서 강제적 회수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자원하는 감사의 헌금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
님께 당연히 돌려드리는 세금 같은 납세의 의무로 보아야 합니다.
2.율법의 십일조
율법 시대의 신앙이 성전 중심이었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존재목적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시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장소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성전은 항상 거룩하게 관리하고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유일한 성전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를 택하여 일체의 노동을 금지시키고, 오직 성전에서만 제사와
봉사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업이 없이 성전 관리만을 위해서 일하는 레위인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겠습니까? 바로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한
지파에게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한
절대필요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자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거하실 곳(성전)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드리고”(신12:5,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18:24)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히7:5)
“레위인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성전 庫間(창고)에 두어야 제사장들이 성전을
버리지 아니함”(느10:37∼39)
▶십일조는 율법의 제사 제물에 해당하는 거제입니다.
거제(擧祭)->구약의 제사 예물 중에서 단상에서 불사르지 않고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기 위하여 높이 드는 제물을 말한다. 첫 열매도 거제에
해당한다.(민15:2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고로”(민18:24)
십일조는 거제라는 제사 제물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제사는
폐지되었는데 십일조라는 거제의 제물만 살아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모순됩니까?.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부여된 세금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내는
세금은 국가의 재정이 되고 공무원의 보수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이 내야할 세금은 국가의 것이고 세금을 낸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반면 세금을 내지 않은 사람은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을 받음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십일조 역시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친 자는 복을 받고 도적질 한 자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를 시험하여 너희에게
복을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3.율법에 속한 십일조의 폐지
십일조 폐지라는 지엽적인 것보다 십일조의 근거법인 율법의 폐지에
주목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십일조는 분명히 율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히7: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엡2:15)
율법의 폐지에 따라 벽돌 성전도 없고, 동물 속죄 제사도 없고, 거제라는
제물도 없으며, 레위인의 제사장도 없다면 레위인을 위한 거제의 제물인
십일조도 당연히 함께 폐지되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시대는
율법적인 십일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덮어 버리고 돈이기
때문에 무조건 십일조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 내지는 금전
만능 주의자 또는 복에 눈 먼 무속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은혜와 감사의 십분의 일 헌금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결코 헌금의 폐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동기와 목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구원받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율법의
십일조를 한 흔적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처럼 십일조로 믿음의 대소를
판단하고, 십일조가 직분을 부여받는 절대 조건이라 할만큼 중요한 신앙의
요소였다면 사도 바울도 최소한 한 번쯤은 십일조에 대해 긍정적 언급을
했어야 합니다.
교회론의 잣대가 되는 바울 서신에서 볼 때 십일조 제일주의의 우리
신앙은 복음과 분명히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복과 저주 때문에 벌벌
떨며 액막이 식으로 그냥 넘길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두렵다면 진정 그리스도인인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 받는 것이라면 예수, 부처, 공자를 따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인들까지도 축복이라면 구약과 신약을 가리지 않고 아전인수격
으로 적용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4. 십일조의 변천
▣ 사도시대-> 바울을 중심으로 한 사도시대는 십일조를 바친 기록이 없음
(행15:1∼21)
▣ 교부시대-> 사도 요한의 2대 제자 이레니우스가 보기 드문 언급을
했는데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십일조의
의무가 없다”라고 선언함.
-> 순교자 저스틴도 헌금은 각자 마음에 정한대로 바치라고 하였음.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에는 기독교 안에 십일조 제도가 없었음
(한국 교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 1995, 대장간, P81)
▣ 카톨릭시대-> 주후 585년 마콘회의에서 십일조를 교회법으로 제정함.
지금은 폐지됨.
▣신성로마시대 -> 샤레망 황제(742∼814)때 십일조를 나라의 법으로
제정한 후 프랑스는 1789년에 폐지하고 영국은 1868년에 폐지함.
☞ 라투렛(K.Latourette), 기독교사 참조
▣ 루터시대-> 그리스도인에게 모세법의 십일조가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통찰력을 통하여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중에서)
5. 복음시대의 헌금
◑ 인색함이나 억지가 아닌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고후9:7)-> 헌금 동기
◑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함(고후9:7)-> 헌금 자세
◑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함(고후9:5)-> 헌금 방식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6:20)-> 보상 시기
◑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둠(고후9:6) -> 보상 방식
▶ 시대별 헌금의 동기와 목적
6.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명하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관하여 유일하게 언급하신 부분인데,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오늘날 율법적 십일조의
존재유무가 결정됩니다. 복음서를 볼 때 꼭 분별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의 분별이며, 또한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과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의 분별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과 폐지의 분기점이 십자가의 성취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생애 3년 동안이 율법이 아직 폐지되지 않은 시기였다면
십일조뿐만 아니라 다른 율법도 함께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 폐지는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공생애 기간은
아직 율법이 살아있던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다른
율법을 충실히 지켰음에서 증명됩니다.
◐성전 존속 ->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 세금을 바침(마17:24∼27)
◐제사 존속 -> 예수님이 제사와 제사장 그리고 제사 예물을 허락하심(마8:1∼4)
◐십계명 존속-> 예수님이 영생을 얻으려면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심(마19:16,17)
◐율법 존속 ->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지키라고 말씀하심(마23:2,3)
◐할례 존속 -> 예수님도 할례를 받으심(눅2:21)
◐유월절 존속->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키심(눅2:41,42)
이상에서 보듯 예수님께서 율법에 준하여 바리새인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심은 그 시대가 율법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의 십일조를 지키라는 대상이 우리가 아닌 유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율법의 더 중한바” 에서 보듯 이미 십일조도
율법 속에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또한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신
대상을 볼 때도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는 사실은 그 시대가 바로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가 무조건 지켜야 한다면 우리 역시 위에 열거한
사항을 다 지키면서 십일조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십일조를 포함한 위의 사항을 전혀 지키지
않았을까요?
바울 시대는 이미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지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바울과 같은 복음 시대가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은혜에 대해 감사에 근거한 십분의 일,
또는 그 이상의 헌금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열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값없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내 모든 물질을 다 드려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7.말라기의 십일조
우리는 말라기의 말씀을 붙들고 복의 밑천처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우리가 정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도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마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것처럼 하늘의 복을 달라고 한다면
우리가 오히려 강도가 아닐까요? 좀더 겸손한 마음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면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말라기의 십일조를 내가 정한 십일조로 변개 시키지 말고 나의 밖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찾는 것이 말라기의 의도임을 찾아야 합니다.
말라기의 온전한 십일조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율법이 예수님의 그림자이기에 율법의 십일조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말라기의 주제 : 이스라엘의 종말과 예수님의 오심
말라기의 배경: 예수님이 오시기 400년 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까지 건축하였으나 제사를 무시하여 구원을
스스로 포기하는 풍조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패망하고,
진정한 구세주 예수님이 오신다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
☆온전한 십일조의 의미
▶ 말라기의 십일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느헤미야
총독이 성전을 완공하고, 속죄제사를 드릴 제사장을 인친 다음 백성에게
십일조를 성전 창고에 채우라고 명령함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는
제사장을 성전에 존재케 하는 간접적 수단이므로 결국 십일조는 성전의
제사를 유지시켜 백성의 죄를 사함 받게 만드는 것에 귀결됩니다.
(느10:37∼39)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은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예수의 상징)
▶ 예수님 자신이 의로운 제물로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로 드려졌기에 오늘
우리는 십일조라는 물질이 없어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돌아와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십일조가 필요 없습니다.
▶ 그러므로 종말의 개념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 물질의 십일조가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인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게된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를 조명하는 말라기
☞ 말라기는 마지막 예언서로서 율법의 종결과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모세에서부터 요한까지 오직 십자가만을 향하여 달려왔음을
보여 줍니다.
말라기의 십일조는 종말에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수단으로써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말라기의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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