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법3장39절] 어떤 사람이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을 묻기에 상제께서 이렇게 이르시니라.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
[교법3장40절] 상제께서 어떤 사람이 계룡산(鷄龍山) 건국의 비결을 물으니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 그자가 다시 “언어(言語)가 같지 아니하니 어찌 하오리까”고 묻기에 “언어도 장차 통일되리라”고 다시 대답하셨도다.
[예시1장65절]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 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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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께서 사시던 시절에는 <비결> 에 관하여 관심들이 많았었던 모양이다....
<비결> 에 관하여 관심이 많을 때는 民草 들의 삶이 곤궁해졌을 때이다...그러니, 이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요새는 더 나아가서, <무당>들이 기를 펴고 사는 세상이 된 듯하다.... <무당> 을 주제로 하는 TV 프로그램도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위의 전경구절에 의하면, 성사께서는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建國하여) 도읍하는" 비결서의 내용에 관하여 부정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
[교법1장30절] 천지 안에 있는 말은 하나도 거짓말이 없느니라.
[교운1장36절] “모든 일을 있는 말로 만들면 아무리 천지가 부수려고 할지라도 부수지 못할 것이고 없는 말로 꾸미면 부서질 때 여지가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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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建國하여) 도읍하는" 비결은 성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지 안에 있는 말이어서, 천지가 부수려고 할지라도 부수지 못한다......
그래서 성사께서는 (아래)와 같이 뭔가를 하신다...
(아래)
[권지2장29절] 김 경학이 무신년 五월에 고부 와룡리 문 공신의 집에 가서 상제를 뵈오니 상제로부터 “내일 일찍 태인 살포정에서 만나자”는 분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조반 후에 살포정에 이르니 그 주막에서 행객 두 사람이 싸우고 있고 상제께서는 큰길가의 높은 언덕에 돌아앉아 계시기에 올라가 인사를 드리니 인사만 받으시고 여전히 돌아앉으신 채 언짢게 계시는도다. 그는 까닭을 모르고 송구한 마음으로 모시고 서 있노라니 잠시 후에 상제께서 싸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만 두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싸움을 그치고 제 길을 가는지라. 그때에야 경학이 “어떤 사람들이 싸웠나이까”고 여쭈어 보았더니 상제께서 “우리 겨레에서 정 감(鄭堪)을 없앴는데도 세상에서 정 감의 노래가 사라지지 아니하기에 혹시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이제 그 살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 일러 주시니라.
(1) 천지 안에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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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경에 소개되어 있는 10개의 유가서적이 <천지 안에 있는 말> 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
[교운1장6절]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에 정 남기를 따르게 하시고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과 함께 지내셨도다. 이때 김 형렬과 김 보경이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 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 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
(2) 鷄龍(山)
병신년 三월에 박 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철규·박 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雞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 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데 이날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화실(拈花室)에서 이레 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교운 2장 57절)
계룡산의 유래는 조선 시대 초기 무학대사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 이성계가 신도안(현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에 도읍을 정하려고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당시 동행한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 주체인 계(鷄) 자와 용(龍) 자를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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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鷄抱卵形> 과 <飛龍昇天形> 은 기억해두면 좋을 듯 싶다....
(3) 짚으로 만든 계룡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 - 대순회보 235호 전경 성구
상제님께서는 계룡산 건국에 대해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고 말씀하시며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속담을 통해 그것의 허망함과 무가치함을 일깨워 주셨다. 우리 수도인들은 “대인의 말은 구천에 이르나니 또 나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니 잘 믿으라.”16라고 하신 것처럼 세상의 시세와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상제님의 말씀을 잘 믿으며 대순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에 힘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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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싸이트의 저자는 <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속담을 통해 그것의 허망함과 무가치함을 일깨워 주셨다. > 라고 결론을 내고 있는데, 얼핏 그럴 듯하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짚으로 만든 것이 '鷄龍' 만 있는 것이 아니다.....
(4) 짚으로 만든 신 (=짚신)
[공사2장1절] 상제께서 정미년 三월 초에 광찬을 대동하고 말점도(末店島)에 들어가시려고 (광찬의 재종이 말점도에서 어업을 경영하고 있었음) 갑칠과 형렬을 만경 남포(南浦)에 불러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지금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됨이니 너희들은 성백(成伯)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四十九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라. 그 신을 천하 사람에게 신게 하고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 하셨도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성백의 집에 가서 그대로 시행하였도다. 그 후 상제께서 말점도로부터 나오셔서 그 짚신을 원평 시장에 가서 팔게 하시고 그 종이등에는 각기 “음양(陰陽)” 두 글자를 쓰셔서 불사르시니라.
[교운1장12절] 김 병욱은 계묘(癸卯)년 四월부터 남원(南原)의 세금을 거두는 관직에 있게 되었도다. 이때에 박 영효(朴泳孝)가 일본(日本)에 망명하여 혁명을 도모하고 병욱이 또 그에 연루하였도다. 관은 그 당원을 체포하기로 정하고 八월에 포교가 서울로부터 남원으로 내려와서 병욱을 찾았도다. 전주 군수 권 직상이 병욱의 거처를 알기 위해 포교를 전주에서 남원으로 보냈도다. 그 전날 미리 상제께서 남원에 가셔서 병욱을 숙소의 문 바깥에 불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수합한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보관시키고 가죽신 대신에 짚신을 신게 하고 밭둑과 언덕을 걸으시니 병욱은 묵묵히 뒤만 따랐도다. 한 주막에서 점심을 끝내시고 다시 걸어가시다가 그의 선산 밑에 이르니 때는 이미 저물었도다. 그제서야 상제께서 그를 돌아보시고 묘소를 물으시니 바로 이곳이라고 그가 아뢰니 상제께서 또 묘형을 물으시니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여쭈는지라. 말씀하시되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 아래서 소 우는 소리가 나는도다. 병욱이 소의 울음소리를 아뢰니 상제께서 “먼 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 하시고 한참 있으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소가 크게 우는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혈음(穴蔭)이 이미 동하였도다” 하시고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이곳에서 그날 밤을 새우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어 형세를 알아보게 하셨도다. 그는 남원에 갔다 와서 서울 포교가 병욱을 수색함을 아뢰니 이때 비로소 병욱이 깨닫고 크게 두려워하여 몸 둘 곳을 모르도다. 상제께서 다시 묘지기에게 여자가 타는 가마를 마련케 하고 병욱을 거기에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에 이르러 병욱으로 하여금 먼저 서 원규의 집에 가서 정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시니라. 그가 먼저 원규의 집에 들어서니 원규가 몹시 놀라면서 “그대가 어떻게 사지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처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하는 중이니라”고 말하는도다.
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하고 상제와 자기가 남원을 벗어나온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밖에 되지 않는 것을 원규로부터 듣고 상제께서 천신이심에 탄복하여 마지 아니하는도다. 포교는 남원에 이르러 병욱을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고 전주에 되돌아와서 군수 권 직상을 조르고 각처에 게시하거나 훈령을 내려 병욱을 잡아들이게 하는 중이었도다.
[교법1장39절] 상제께서 어느 날 부친에게 “일생을 살아오시는 중에 잘못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시라” 하시므로 상제의 부친은 낱낱이 기록하여 유 칠룡(兪七龍)을 시켜 올리니 상제께서 받고 일일이 보신 후 불사르시며 “이제 잘못된 과거는 다 풀렸으나 짚신을 더 삼아야 한다”고 하시더니 부친은 종전대로 임자(壬子)년까지 八년간 신을 삼았도다.
[권지1장12절]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동곡으로 가시는데 길이 진흙으로 심히 험하거늘 치도령을 내리시니 질던 길이 곧 굳어지니라. 마른 짚신을 신고 동곡에 가실 수 있었도다. 그 당시 쓰신 치도령은 “어재 함라산하(御在咸羅山下)”의 여섯 글자인바 상제께서 이것을 불사르셨도다.
[예시1장43절] 또 이르셨도다.
“부녀자들이 제 자식이라도 비위에 맞지 아니하면 급살 맞으라고 폭언하나니 이것은 장차 급살병이 있을 것을 말함이니라.
하루 짚신 세 켤레를 닳기면서 죽음을 밟아 병자를 구하러 다니리니 이렇게 급박할 때 나를 믿으라고 하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러므로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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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로 만든 신 (=짚신) 이 관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 "짚으로 만든 계룡" 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래 구절에 의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아래)
[행록3장31절] 상제께서 어느 날 류 찬명(柳贊明)과 김 자현(金自賢) 두 종도를 앞에 세우고 각각 十만 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 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 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5장10절] 이때에 경학의 형이 아우를 오라고 사람을 보내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낸 후에 발을 당기고 가라사대 “속담에 발복이라 하나니 모르고 가는 길에 잘 가면 행이요 잘못 가면 곤란이라” 하시고 곧 그곳을 떠나 최 창조의 집에 독행하셨도다. 그곳에 머무시다가 다시 혼자 그 앞 솔밭을 지나서 최 창겸에게 이르러 잠시 몸을 두시니 상제께서 계시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