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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삶

토마스 테일러 서언

작성자LOVE-IS-ALL.|작성시간26.06.18|조회수19 목록 댓글 0

서 언

 

피타고라스가 “철학의 아버지”였다고 불렸을 때, 그분의 삶에 대한 진정한 회고록이 지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특히 그분의 모든 제자들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최고인 플라톤의 가르침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암블리코스가 쓴 다음의 피타고라스에 대한 회고록들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모든 비평가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것들 대부분이 분명히 매우 고대의 자료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전기 작가의 위대한 가치와 존경심으로, 그 정보가 완벽하게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믿을 만한 모든 이유가 있다.

 

진실로 전기 작가인 이암블리코스에 대하여, 그의 뒤를 이은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이 그를 ‘신성한(divine)’이라는 별칭으로 위엄 있는 칭호를 주었다는 것이 플라톤주의의 모든 초심자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예리한 황제 율리우스가 "그는 시간에서 플라톤에 뒤에 있지만, 천재성에서는 그렇지 않다"[1] 찬사를 전한 후에, 그에 대한 더 많은 칭찬을, 어떤 근대 비평가들이 그에 대하여 말한 중상이 경멸스럽고 한심한 것처럼,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난쟁이들 혹은 왜소한 사람들은 그의 지성의 위대성이 아니라, 스타일 면에서, 그의 부족함 만을 보면서 작은 흠집들만 인식할 뿐이지, 능가하는 그의 탁월성에 대하여 흘끗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천재성의 태양 광선 속에 흩어져 있는 티끌들을 미세하게 알아차리지만, 그들은 그것이 기운을 돋우는 온기를 느끼지 못하며, 그것의 눈부신 광채를 보지 못한다.

 

매우 비범한 이 사람에 대하여 에우나피오스가 남긴 현존하는 전기가 있으며,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을 내가 플라톤 신학의 복원사에서 제시하였으며, 독자가 그것을 참조하길 바란다. 현재는 그 작품에서 우리의 이암블리코스에 관한 다음의 전기상의 세부사항들만 선택할 것이다:

 

“그는 저명하며, 마찬가지로 운 좋고 부유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나라는 시리아의 도시, 칼키스였으며, 이것이 바로 코엘레로 불렸다. 그는 포르피리우스에 버금가는 아나톨리우스와 교류하였지만, 그가 성취에서 훨씬 뛰어났으며, 철학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아나톨리우스와 얼마 동안 관계를 맺어온 후에, 그리고 아마도 그가 그의 혼의 방대한 욕망을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 그는 포르피리우스에게 지원하였다. (에우나피오스가 말한다) 그가 문장 구성의 구조와 힘을 제외하고, 포르피리우스에게 아무것도 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저술들은 포르피리우스만큼 그렇게 우아하고 기품이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쾌활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았다; 또한 단어 선택의 불순함에서 자유롭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완전히 결함이 있지 않더라도 전적으로 모호함 속에 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이전에 크세노크라테스에 대하여 말하였듯이, 그는 머큐리의 우아함의 신들에게[2]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그의 용어 선택을 유심히 보는 독자를 기쁘게 붙잡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독자의 관심을 피하고 무디게 할 것이며 그의 기대를 실망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개념들의 표면이 웅변의 꽃들로[3] 덮여 있지는 않더라도, 그럼에도 그것들의 깊이는 감탄할 만하고, 그의 천재성은 진정으로 숭고하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에는 비평가들이 주목해온 그런 결함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포르피리우스의 서신에 대한 그의 답변에[4] 관한 익명의 그리스 작가의 결정이 그의 다른 모든 작품들에 어느정도 적용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답변에 있는 그의 용어 선택은 간결하고 분명하며, 그의 개념들은 효능으로 가득 차 있고, 우아하며, 신성하다"고 그가 말하기 때문이다.[5]

 

아임블리코스는 정의를 배양한 것 때문에 신성의 호의를 탁월한 정도로 나누었다; 그리고 수많은 동료들과 제자들을 얻었다. 그들은 그의 놀라운 종류의 성스러운 샘에서 너무 풍부하게 흘러나오는 지혜의 시냇물에 참여할 목적으로 세계의 모든 부분에서 찾아왔다. 이들 중에는 말하기와 쓰기 모두에서 가장 능숙했던 시리아인 소파테르,[6] 카파도키아인 유스타티우스, 그리고 그리스인 중 테오도루스와 유프라시우스가 있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미덕과 성취에서 탁월하였으며, 웅변에서 크게 뒤지지 않았던 다른 많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암블리코스가 계속해서 보여준 것처럼 상냥한 품행과 인자한 성향으로 그들 모두를 어떻게 살폈는지 대단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성에 대한 경배와 관련하여 동료들과 제자들 없이 혼자서 몇 가지 세부사항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작업에서 그와 익숙한 사람들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는 식단에서 가장 고대 시대의 검소한 단순함을 본받았다; 그리고 만찬 동안에, 참석한 사람들을 그의 행동으로 유쾌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담론의 단맛으로 그들을 넥타르로 가득 채웠다.

 

변증법에 깊이 능숙한 알리피우스라는 저명한 철학자는 이암블리코스와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그는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피그미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능력들이 이 사소한 결점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다. 그의 신체가 거의 혼 속으로 녹아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위대한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신성한 체들이 유한한 것들과는 달리 혼들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그가 혼 속으로 이주하였고, 그는 인간보다 우월한 성질에 포함되었으며 지배된 존재같다고 알리피우스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다. 이 알리피우스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으나, 그가 철학하는 방식은 그의 교리를 글로 남기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대화와 논쟁으로 제한되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기쁘게 이암블리코스에게 전념하였으며, 고갈될 줄 모르는 그의 마인드의 풍부한 흐름에서 많이 끌어내기를 바랬다. 그래서 각자의 명성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찬란히 빛나는 두 별처럼 우연히 만났고, 엄청난 군중으로 둘러싸여서 그것이 마치 거대한 무세이온(학당)과 닮았다. 이 기회에 이암블리코스가 질문을 제안하기 보다 질문을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알리피우스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철학적인 논의를 포기하고, 자신이 관람객들로 둘러싸인 것을 보고, 이암블리코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말해 보시오, 오 철학자여, 부자는 부당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부당한 사람의 상속자인가요? 이 경우에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암블리코스가 그 질문의 예리함을 싫어하면서 대답하였다: “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멋진 분이여, 어떤 사람이 외적인 것에서 탁월한가를 고려하는 이런 방식은 우리의 철학 방식에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가 소유하기에 적합하고 철학자에게 적합한 미덕이 풍부한지 묻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한 후에 자리를 떠났고, 동시에 주변의 모든 군중도 즉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아임블리코스는 그가 혼자였을 때 그 질문의 예리함에 감탄하였고, 종종 개인적으로 알리피우스에게 호소하였으며, 그의 예리함과 명민함을 매우 많이 칭찬하였다; 그래서 알리피우스 사후에, 그가 그의 삶에 대하여 썼다. 이 알리피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그의 나라에서 고령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아임블리코스가[7] 뒤에 철학의 많은 원천과 뿌리를 남겼다; 후대의 플라톤주의자들의 육성을 통해서 이것이 상당히 다양한 왕성한 가지들과 수많은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이암블리코스의 신학 저술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독자는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 신학의 복원의 역사; 그리고 그의 모든 저작에 관한 정확한 비판적 정보를 위해서, 파브리키우스의 그리스 문헌집을 참조하길 바란다.

 

다음 작품인 “피타고라스의 삶”에 대하여, 원본이 매우 불완전한 상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본문에 많은 언어적 오류, 서술된 것들 사이에서 연결 관계의 부족 때문이고, 그리고 같은 단어들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언급된 많은 세부 사항들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독일 편집자 중 한 명인 쿠스터가 추측하였듯이, 이 작품이 이암블리코스의 마지막 손길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의 사후에, 그의 원고에서 발견한 혼란스러운 자료들로부터 이 논고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의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하였듯이,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의 전파가 만들어낼 것으로 계산된 그 혜택이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독일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비평가들 중에 두 명인 쿠스터와 키슬링이 이 작품의 두 가지 훌륭한 판본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확신에 깊게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 뒤에 있는 피타고라스의 윤리 단편들에 대하여, 그것들에 대한 모든 찬사가 불필요하다. 그것들이 매우 초기의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쓰여졌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이 단편들을 비교함으로써 명백하듯이 도덕에 대한 그의 완전한 지식을 이끌어온 어떤 원천들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그렇기 때문이다.

 

본서에 수록된 피타고라스 문장들의 모음에 관하여, 그것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을 거의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섹스투스의[8] 문장들의 그리스어 원본이 소실되었기에, 루피누스 사제가 쓴 라틴어 버전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깊이 유감스럽다. 나는 그것을 사기 버전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루피누스가 이 문장들이 식스토스라는 이름의 주교에 의해서 쓰였다고 독자들을 설득하고자 많은 곳에서 원본의 의미를 왜곡하였고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선택한 문장에서, 나는 루피누스의 야만적이고 오염된 삽입 문장들과 뒤섞이지 않은 채, 섹스투스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만약 독자가 데모필루스의 문장에 대한 나의 번역본, 그리고 브리지만 씨의 데모크라테스의 황금 문장 번역본, 그리고 데모필루스의 비유집(Similitudes)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 그는 매우 불순하고 가짜 상태이기에 내가 번역하지 않은 섹스투스 것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모든 피타고라스 문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려진 피타고라스의 삶이 현재 상태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미덕과 지혜에서 가장 위대한 완성의 표본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은 어리석음으로 섞이지 않은 경건함, 악으로 오염되지 않은 도덕적 미덕, 궤변으로 얼룩지지 않은 학문, 자만이 동반되지 않는 마인드와 예절의 품위, 실행에서 어떤 타락 없는, 이론에서 숭고한 장엄함, 그리고 지성의 활력이며, 이것이 그것의 소유자를 신성의 비전으로 들어 올려서, 이렇게 칭송하면서 신으로 만든다.

토마스 테일러

 


[1] 유명한 불리알두스도 그의 스미르나의 테오에 대한 메모에서 이암불리코스를 가장 예리한 천재성의 인간으로 말한다: “나는 위대한 플라톤을 알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시대상으로는 뒤에 태어났지만, 본성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칼키스 사람, 즉 이암블리코스를 말하는 것이다.”

[2] [참고] 머큐리(헤르메스)와 세 명의 우아함의 여신들로, 말과 글의 우아함, 명료함, 수사적 세련미를 상징한다. 그래서 수사적 세련미가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3] [참고] 웅변의 꽃들(flowers of elocution)은 화려한 어휘 선택, 우아한 문장 구성, 수사적 기교, 듣거나 읽을 때 느껴지는 미적 즐거움으로 이것 모두를 부르는 것이다.

[4] 이암불리코스의 이집트의 신비 의식(비의)에 대하여라는 제목 하에서 그리스판과 라틴판의 갈레의 훌륭한 작품이 있다. 원제목은 “아네보에게 보낸 포르피리우스의 편지에 대한 아바몬의 대답과 그 안에 포함된 난점들에 대한 해명”으로 간략하게 “포르피리우스에 대한 대답” 혹은 “이집트의 신비 의식에 대하여(De mysteriis Ægyptiorum)로 알려진다.

[5] “위에 언급한 작품의 서문에서 갈레가 서문에 쓴 찬사를 참조하라: “또한 표현의 절제됨과 단정함, 그리고 개념들의 사실적이면서도 우아하고 열정적인 성격...”

[6] 이 소파테르가 그의 철학 학파에서 플로티노스 뒤를 이었다.

[7] 이암블리코스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날짜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콘스탄틴 황제의 통치 기간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정확한 파브리키우스에 따르면, 크리스트의 해 333년 이전이었다. 그리스 도서관(Bibliotheca Graeca) Tom. IV. p. 283. (**이 그리스 도서관은 그가 고대 그리스, 라틴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로, 총 14권으로 구성된 대백과사전적인 정리이다. 그래서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참고].)

[8] 이 섹스투스가 아마도 세네카가 엄청 칭송한 똑같은 사람이며, 그는 그의 저술에서 풍부하게 있는 많은 훌륭한 문장들을 가져왔다. 세네카: 서신들, 59, 64,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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