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비폭력실천가의 눈으로 보는 도덕경:
구부러짐으로 온전해진다(曲則全)
휘어짐으로 곧아지며(枉則直)
비어있음으로 채워지며 낡아짐으로 새로워지고(窪則盈 弊則新)
적음으로 얻으며 많음으로 미혹된다(少則得 多則惑)
그러므로 온전한 이는 하나를 품어 천하의 본이 된다(是以聖人 抱一爲天下式)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음으로 밝아지고(不自見故明)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음으로 빛나며(不自是故彰)
스스로를 뽑내지 않음으로 공로가 있고(不自伐故有功)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으니 오래간다(不自矜故長)
무릇 다투지 않으니 천하가 능히 더불어 다툼이 없다(夫惟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그러니 옛말에 소위 굽으면 곧 온전하다는 것이
어찌 허언이겠는가(故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진실로 온전히 이로 되돌린다(誠全而歸之)
이 장은 앞장의 “공덕지용 유도시종(孔德之容 惟道是從, 심대한 덕이 주는 포용은 오직 도만이 이를 따른다)에 대한 진술이다. 실제로 어떻게 변화가 이루어지는 지를 하늘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삶의 법칙을 밝힌다. 그러한 하늘의 도에 따라 16장에서 말하듯 치허수정((致虛守靜)하면 위태로움이 없는(不殆)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현실인식을 넘어 실재인식으로서의 도라는 그 하나를 품음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진술이다.
자연의 이치는 굽혀서 온전함을 드러낸다. 굽어지면 펴지게 되고, 오목하면 차게 되며, 낡아지면 어느덧 새로운 것이 출현한다. 그리고 적으면 얻으나 많으면 이로 인해 어지러워진다. 이것은 인과관계로서 굽고, 오목하며 낡아질 때 펼쳐지고 차지며 새로워진다는 뜻은 아니다. ‘곡즉전(曲則全)’의 즉(則)은 인과관계의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귀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보성을 말한다. 이것은 앞서 무엇이 뒤에의 무엇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에서 그 하나가 전체성의 남은 부분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즉(則)은 원융무애의 통전성안에서 그 일부가 남은 전체를 비추고 연다는 뜻이다.
휘어짐과 곧아짐(枉/直), 비워있음과 채워짐(窪/盈) 그리고 낡아짐과 새로워짐(弊/新)은 서로 대조적이고 분리된 현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두려움과 안전하지 않음으로 인해 쉽게 전자의 상황은 거부하고 후자의 상황을 취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자세히 자연의 이치를 살펴보면 그러한 전자의 양태(왕, 와, 폐, 소;枉, 窪, 弊, 少)속에서 전체의 실재의 다른 짝(직, 영, 신, 득; 直, 盈, 新, 得)으로의 전환이 가능함을 본다. 앞에 있는 것이 뒤를 끌어온다는 시간과 차원의 인과적 귀결이기 보다는 실재의 전체성이 언제나 주어져서 실재의 한 부분인 전자는 후자를 언제나 가능하도록 상보적 가능성을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단지 겉으로는 전자가 전면(the front)으로 드러나 있고 후자들은 후방(the background)으로 감추어져 인지가 안되지만 실재는 언제나 전체성으로 있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를 이미 내포하고 있고 후자는 잠재적 현실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곡즉전’의 자연의 이치를 투철하게 이해하는 온전한 사람은 이에 따라 자기 삶도 전체성안에서 산다. 그래서 그러한 실재인식이라는 도의 하나됨을 오직 품어서 인생의 이치(天下式)으로 삼는다. 곧, 불자견(不自見, 스스로를 나타냄), 불자시((不自是, 스스로를 옳다고 함), 불자벌(不自伐, 스스로를 뽑냄), 부자긍(不自矜, 스스로를 자랑함) 이라는 자기 자신이라는 개별성을 상황의 맥락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없으므로(不自) 각각의 삶의 맥락에서 드러나는 것은 실재의 전체성이 가져오는 명(明, 내면의 밝아짐), 창(彰, 이치가 드러남), 공(功, 기여함이 있음), 장(長, 오래감)이 스스로를 펼친다. 왜냐하면 이 4불(4不)의 내적인 자세로 인해 스스로 있음(自)이라는 개별성을 전체성의 창문(窓門)으로 하는 까닭에 각각의 상황에서 전체성의 실재가 비추어지면서, 그 개별성이 전체성을 가져오는 동시성(synchronicity)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별성이 전체성의 창문이 되는 것이 바로 ‘즉(則)’이라는 마음의 인식이며, 그러한 인식론적 상태로 실재를 맞이하면 그로 인한 삶의 각종 상황에서는 ‘부쟁(不爭, 다툼이 없음)’의 상태가 된다. 맞서 싸우거나 거부하며 피하지 않는 비분리의 상태로 있기 때문에 ‘부쟁’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쟁의 상태야 말로 바로 평화의 근본적인인 상태로 내적으로 혼란(惑)이 없고 관계와 상황에서 조화를 이루어 전체성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실재의 가장 온전한 상태인 명(明), 창(彰), 공(功), 장(長)의 실재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즉(則)’의 인식 상태는 ‘부쟁(不爭)’이라는 행동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즉과 부쟁으로 인해 실재의 온전성이 스스로 작동하면서 개별성을 치유하고 교정하며 복지(well-being)의 자존성을 강화시킨다. 세상(天下)안에서 몸을 담그고 살되 자기 자신이라는 에고인식이 없으니 세상은 그와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실재와 ‘즉(則)’하고 세상과 다투지않음(不爭)의 상태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곡즉전’이라라는 말은 영원한 진실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곡(曲)’함으로 ‘전(全)’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인과관계로 구부림의 이치로 온전함으로 가는 인과의 고리로가 아니다. 오히려 ‘즉(則)’이라는 초월성의 논리로 인해 전체성을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무거움으로 구부러져 있을 때조차 우리는 이 ‘즉(則)’의 통전적 인식을 통해 온전함(wholeness)의 감각을 얻을 수 있다. ‘즉(則)’은 고전물리학의 만족하지 않은 상태인 구부려짐이라는 A상태에서 만족하고 희망하는 상태인 온전함이라는 B의 상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양자물리학의 ‘양자도약’처럼 A이면서 B인 상태, 비국소성과 얽힘의 상태를 인식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보이는 현실의 상태로서 왕(枉, 굽혀짐), 와(窪, 오목히 패임), 폐(弊, 낡아버림), 소(少, 부족함)이라는 불행의 상태에서 해방의 상태로 옮겨감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노자는 행위로서의 변화가 아니라 인식에서의 변화 곧 ‘즉(則)’이라는 통전적 인식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라는 실재만이 진실이고 실재이기 때문에 그 실재를 가시화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통해 실재가 스스로를 행동하여 명(明), 창(彰), 공(功), 장(長)의 실재성이 펼쳐지도록 제안한다. 변화라는 유위(有爲)는 실재와의 ‘즉(則)’한 관계에서 무위(無爲)로서 부쟁((不爭)할 때 나타난다.
변화는 만족하지 않은 A상태에서 만족하는 이상상태의 B로의 움직임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A가 실재의 전체성에 자신을 열 때 이미 자신안에 잠재적 가능성으로서의 B를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A와 또다른 가능성으로서의 B는 모두 전체성의 안에서 있었고 서로 포함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포일(抱一)’의 실재성에 따라 ‘세상이 따르는 법도(天下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