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벤담의 일생
1748년 2월 15일 런던 출생.유복한 집안 출신.
4세: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 받기 시작
5세: 성격이 상당히 조숙하여 '철학자'라는 애칭을 얻음
7세: 웨스트민스터 스쿨 입학
12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15세: 옥스퍼드 대학 졸업
18세: '정치적 단편'저술
21세: 변호사 자격 취득
1832년 84세로 사망.
상대적으로 몸은 약했고, 사냥과 낚시보다 식물채집을 좋아한 소년. 불합리한 영국의 법의
개혁과 사회보장제도 정착에 노력. 선한 것은 쾌락,악한 것은 고통이라 생각.도덕과 윤리의 중요성 강조.
교육의 필요성 강조.
2. 당시 영국의 시대적,사회적 배경
18세기 후반은 산업혁명의 시대,영국은 무역자유화로 통상이 활발하고 국부를 키워 나감.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으로 산업의 발전이 촉발 됨. 세계 국가로 나아가게 됨.그러나 사회적 조건은 매우 열
악하여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고 계급간의 갈등이 심화 되어 감. 자본가의 착취가 통제되지 않고
열악한 노동 조건(어린이 노동,올리버 트위스트-소설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으로 국민다수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최고의 범죄율,공해,보건위생의 미비등 사회적 문제들이 심각한 상태였다.
3. 쾌락과 공리주의
벤담은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했고 그 행복은 바로 쾌락이며 쾌락은 바로 선(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했다. 쾌락에는 단순한 쾌락(돈을 많이 버는 것),은혜의 쾌락(조건없이 남을 도와 주는 것),사랑의 쾌
락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사랑의 쾌락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자신이 속한 단체등 모든 것이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중 최고의 쾌락은 은혜의 쾌락으로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힘든
일을 조건없이 대신 해 주는 것등이 그 예라 한다.쾌락과 고통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중을 따
져 고통을 최소화하야 겠지만 궁극적으로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
다.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의무와 인내를 요구하는 것 같고 사회적으로는 분배의 정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 같다. 벤담은 의무와 분배의 정의를 체현하는 시민을 만들기 위하여 도덕과 윤리의 중요성
을 강조하였고 이를 위한 학교 교육에서의 도덕교육을 강조했다.
( 도넛이론: 한사람이 100개의 도넛이 있고 네명은 그것도 없어 굶고 있다.도넛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도넛 4개를 뺏아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이들은 굶주림에서 행방되지만 도넛을 뺏긴 사람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없는 사람의 쾌락보다는 적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익이 더 커진 것이다.)
4. 법에 있어 공리주의
당시 영국의 법은 왕이 만든 법,국회의원이 만든 법,각 지방대표들이 만든 법으로 구성되어 있어 판사들
이 내키는 대로 법 조항을 적용하여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법조항이 너무 엄격해 실제 적용에 있어 현실
성이 없었다. 예를 들면 죄의 경중에 관련없이 돈을 훔친 사람은 코를 베거나 소매치기는 사형을 시키는
조항이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판사들은 법조항이 너무 엄격해 실제 집행되지는 않았다 한다. 그럼에도 당
시 영국은 범죄율이 최고로 높았던 시절이였다 한다. 이러한 현실인식하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 생각
하지 말고 의무를 함께 생각할 때,행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벤담은 영국 법을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법으로 고치자 생각하였다.(공공의 이익,최대 다수의 최대행복,공리주의).
개인이 한 일이 본인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공공에는 고통을 준다면? 역으로 본인에게는 고통을 주지
만 공공의 행복이 되는 일이라면?-어떻게 할 것인가?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만
법을 만드는 사람은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에게 ‘의무’를 강조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더 큰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의 이익은 결국 개인의 이익과 행복
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는 없으므로 되도록 많은 사람
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법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도둑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본인에게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안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
이다.)
5. 유용성의 개념
그렇다면 공공의 이익을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벤담은 유용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 수 * 유용성 = 개인이 느끼는 쾌락의 양
(예: 마을에서 숲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으려 할 때 학교앞에 놓을 것인가? 교회앞에 놓을 것인가? 학
생들은 50명이고 교회에는 목사님 두분이 있다. 일견 생각해서는 학교앞에 다리를 놓아야 하겠지만 학
생들이 다들 마을에 살고 숲으로 건너갈 일이 한달에 2번이고 목사님이 건너갈 일이 100번이라면 그
유용성에서 목사님들이 더 크므로 다리는 교회앞에 두는 것이 타당하다.)
이 공식이 제기된 배경: 당시 영국에서는 사회기반시설 및 법과 제도의 제정과 정비가 많았던 시기.공공
부문의 일에 많은 결정을 해야할 때였다.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창
안한 계산법
단점: 그 유용성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는 것.
6. 쾌락의 계산법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 강도: 쾌락이 얼마나 강한가?
- 지속성: 쾌락이 얼마나 오래 가는 가?
- 확실성: 쾌락이 얼마나 확실한가? 불확실한가?
- 근접성: 쾌락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가? 아니면 먼 곳에 있는가?
- 다산성: 쾌락은 또 다른 쾌락을 낳는가?
- 순수성: 고통이 전혀 없는 쾌락이 있는가?
- 범위: 쾌락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가?
예) 도서관에서 공부하기 vs 밖에 나가서 데이트하기
도서관에서 공부하기의 잇점: 지속성,다산성,범위에서 우위.
밖에 나가서 데이트하기의 잇점: 강도,확실성,근접성,순수성에서 우위.
7. 도덕론의 두가지 견해: 의무론과 결과론
1) 의무론
- 대표적인 견해: 칸트의 윤리론,크리스트교 윤리
예) "친구에게 빌린 도끼를 오늘 돌려 주기로 했다"면 오늘 돌려 줘야 윤리적으로 옳다는 견해. 만약
그 친구가 흥분해서 다른 사람을 해할려는 의도가 있을 때조차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도끼를 돌
려 주었다고 해서 그 친구가 꼭 살인을 저지른다고 단언 할 수 없는 것이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도덕
적으로 돌려준 사람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할머니의 짐을 대신 들어 준 선행은 '노
약자를 도와 주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행할 때만이 도덕적인 것이다. 할머니가 기뻐할 것
같아서 도와줬다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도와줘서 기분이 좋아서 도아주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경향성 때문이므로 꼭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 그의 기질이 그러하므로 그렇게 행동한 것 뿐이기 때
문이다.오히려 하기 힘들어도 확고한 의무감으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 칸트를 위한 변명
칸트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고 믿었다.그래서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
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 의무로 부과하고 이 의무만을 지킬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한다.(서울
에서 부산까지 1시간내로 걸어 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것.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도덕적인 책임을
물어야) 결과나 경향성은 통제권밖에 있는 것이므로 그 것을 가지고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 의무론의 문제점:
: 미국에서 애완고양이의 털을 말리려고 전자레인지에 넣은 일,위안부누드화보집발간사건,성희롱의
판단기준 - 의무론자들은 지성 또는 능력,그리고 당하는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현명하지
못한 행위를 비난하지 못한다.
: 강한 의무감은 도덕적 광신으로 나아간다.
아돌프 아이히만- “나는 전 생애를 칸트의 도덕 규율에 맞추어 살아왔으며 특히 의무에 대한 칸트의
정의에 따라 행동했다.”
2) 결과론
- 대표적인 견해: 공리주의
친구가 흥분해서 도끼로 살인을 할 것 같으면 비록 오늘 도끼를 돌려 준다는 약속이 있었어도 돌려
줘서는 안 된다는 것
#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그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이다.
- 공리주의 문제점
예)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는 대신 건장한 성니 남자 한 명과 성인 여자 열 명을 원한
다면? 공리주의자의 선택은? 열한명의 회생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회생을 막고 안정을 이룬다면 사회
전체로 이익일 터 받아들일 것이다.또한 가장 공리적으로 공물로 받칠 사람을 선정할 터.아마 사고무
친 고아나 어차피 죽을 사형수등을 선택할 것이다.이것도 공리적으로 말이다.고아라고 해서 살 권리,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없을까? 사형수라고 해서 법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가?
북한에서 무고하게 공개처형을 자행하는 것이 범죄 예방과 국민의 단합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공리주
의자 입장에서 적극 옹호해야 되는 가? 대다수 사람들은 직관적으로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
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는 우리들의 직관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쾌락주의의 입장에서
옳다면 도덕적인 상식으로도 이를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는 도덕감정이라는 것이 있
다.그것은 절대 틀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예,성에 대한 도덕기준)그러나
현존하는 도덕적 직관이 잘못이 있다는 합리적 근거가 제시될 때가지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그리고 자
신의 주장이 도덕적 직관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증명할 책임은 도덕적 전문가인 공리주의자에게 있다.
사실 합리적인 공리주의자라면 사람들의 도덕 감정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규칙들간에 충돌이 일
어난 경우는 비판적인 수준에서 이익 계산을 엄정하게 하여 더 좋은 결과를 낳는 쪽으로 선택할 것이
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의 판단근거가 확실하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직관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실제로는 많게 된다.따라서 공리주의자 헤어(1919-2002)는 도덕추론을 비판적인 수준과 직관
적인 수준으로 구분하여 일상생활에서는 다소간 넒은 윤리적 원칙을 채택하자고 이야기 했다.
: 너무나 높은 공리주의자의 원칙
우리가 한끼를 안 먹으면 북한 어린이 1주일을 굶주리게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세끼 밥만 먹
고 안해도 되는 취미생활은 다 포기해야만 할까? 분명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천사같은 사람이다. 그
러나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인가? 우리가 지켜야야 할 공리주의적 수준은 어느정도 어야
하는가?
: 변명으로 이용될 수 있는 공리주의
빌린 사람에게 돈을 갚지 않고 더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부자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면?(홍길동)
너무나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 않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면?(그러니 실제로는 시내에서 여친과
놀고 있었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인생
1806년 5월 20일 런던 출생. 당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1773-1836년)이 아버지.당시 아버지 친구인 벤담,리카르도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에게 지적 훈련을 받음.
3세: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
8세: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아버지의 지도하에 다양한 분야와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행함
12세: 논리학,철학을 공부함.
13세: 당시 신지식에 해당하는 리카르도의 경제학을 배움
14세:프랑스에서 1년간 머무름. 프랑스의 지성들과 교류함.
16세: 공리주의자협회라는 학회를 만듬.이때 utilitarian라는 말을 처음 사용함
17세: 동인도 회사에 취직함. 이 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지적훈련의 시간을 유지함
자신의 견해를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 함. 당시 벤담과 아버지 밀의 주축하에 급진주의적 경향인 웨스트민스터평론을 창간. 당시 자유당기관지 '에드버러평론',보수당 기관지'계간평론'에 대응하여 그들을 써 냄.
25세 평생의 친구 테일러 부인을 알게 되다.
27세 밴담의 철학에 비판적 글을 처음 쓰다
28세 급진주의를 대변하는 런던평론의 사실상 주필을 맡다.34세에 평론 주필을 그만두다.
29세 밀의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가 사망하다. 1835년
45세 결혼. 이 시기 전후해서 경제학 우너리,논리학 체계를 집필하다.
49세 자유론 집필 시작. 58년 겨울 부인의 급작스런 사망.
1865년 59세로 하원의원에 당선. 당시 여성의 선거권부여,비례대표제 도입,아일랜드 토지제도 문제해결,망명자 인도 법안등에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그러나 사형제폐지반대,중립국선박의 적국의 화물에 대한 몰수권리에 대해 찬성을 표하기도 함.
1873년 67세로 사망.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리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세상의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갔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대하여 '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기면서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쾌락의 질을 따지면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쾌락을 경험해 보면 인격의 성숙을 지향하는 정신적 활동을 더 선호할 것이라고 밀은 주장하였다.
10대 후반에 들어서서 이미 밀은 공리주의자의 대표 주자로 널리 세상에 인지되게 되었다.그러나 20세때 밀은 사상적 방황에 빠지게 된다.즉,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세계의 개혁자'임을 분명히 하였으나 이에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밀은 마르몽뗄의 '회상록'을 통해,시와 음악과의 교감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하였다.밀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 행복이 모든 행동의 시금석이요,인생의 목적임은 분명하다.그러나 자신의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인류의 진보,어떤 예술이나 추구를 행복의 수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이상적인 목적으로 삼아야-을 위해 사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당시 공리주의는 소수의 철학적 주장이였고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급진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밀은 직관적 철학을 거부하였고 미신과 종교의 위선을 혐오했다. 관찰과 관념연합에 의한 사색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공리적인 이익을 추구했다. 밀은 말년에 하원의원이 되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펼쳤다. 당시 영국은 세계 1위의 제국이였다. 정치는 보수당인 토리당과 자유당인 휘그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밀은 소수의 개혁주의자의 대열에 서 있었다.
밀의 유명한 저작물인 '자유론'에서 자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 우리가 타인의 행복을 탈취하려고 시도하거나,행복을 성취하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자유이다. 각자가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각 개인을 타인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인류에게 큰 혜택을 준다."
밀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설파하면서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무오류성의 위험성을 다양한 각도로 접근한다. 의견의 자유와 의견의 발표의 자유가 인류의 정신적 복지에 필수적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댄다.
첫째,만일 어떤 의견이 강제적으로 침묵될 경우,그 의견은 진실일 수 있다. 둘째,설령 침묵된 의견이 오류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말의 진리를 가질 수 있고 대체로 가지고 있다. 세째,설령 일반적인 사회 통념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 것이 반대되는 토론의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 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의 합리적인 느낌이나 이해 없이 편견의 형태로 지지할 것이다. 네째,자유토론이 없다면,교리자체의 의미가 상실하거나 약화되고 개성과 행위에 대한 활력있는 효과가 상실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사회의 개인에대한 통제에 대해 거의 극단적으로 혐오감을 가진 밀은 개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성을 논하는 장에서는 일반적인 개인의 사회적 의무를이기적 무관심이라고 논하면서 타인의 선을 증대시키려는 사심없는 노력이 고양되고 선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하였고 현자들에 의해 교육된 각성된 시민에 의해 추대된 현자들의 정치를 갈망하였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은정 작성시간 10.07.05 ㅋ 생명과 환경에서에서 읽어본 공리주의는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상적 주장으로서 여러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라 하네요
-
작성자겨냠(장윤성) 작성시간 10.07.16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나도 소수가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겠지요. 그래서 님비 현상을 무조건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
작성자임창석 작성시간 12.03.24 도덕론 (윤리론)에서 의무론 과 결과론은 절대적 도덕율이 있다고 가정하는것이고 , 절대적인 도덕율은 없다고 가정하는 도덕론도 있다 착하게 살았는데 복받지 못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현실을 보면 절대적인 도덕율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