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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의 철학이야기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같은가?

작성자원진호|작성시간13.03.28|조회수1,113 목록 댓글 1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같은가?

(이 간과 한 원진)

발표: 2013년 04월 01일 7시

 

I. 충청도 노론과 서울 노론

 조선 유학의 역사에 유명한 두 개의 논쟁이 있었다. 하나는 사단칠정론. 다른 하나는 인물성논쟁이 그 것이다.

 사단칠정론은 이황,기대승,성혼,이이로 이어졌다. 이 논쟁의 핵심은 사단의 순수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황은 사단이 본성(性),즉 이(理)로부터 직접 드러난 것이기에 가장 순수하다는 것으로 보았다. 이이는 사단도 기(氣)와 관련된 것으로 절대 순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순수한 동기로 시작된 학문적 논쟁이 점차 변질되어 학연,지연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황의 제자들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동인(東人)으로 집결하였고 이이의 제자들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서인(西人)으로 집결하였다.

 동인의 강경파인 대북파가 임진란을 거치고 광해군 집권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년)을 통해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들은 숭명배청 정책을 취했고 이로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외침을 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란이후에도 소중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선 후기 사회를 지배하였다.

 서인들은 숙종때 남인처벌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다. 당시 강경파인 노론이 주도권을 쥐는데 이들의 대표격인 사람이 송시열이다. 그는 충청도로 낙향하여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낸다. 이 시점으로 노론은 지역적으로 충청도 노론과 서울 노론으로 구별되기에 이른다.

 

II.인물성 논쟁

 인물성(人物性)논쟁은 충청도 노론에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의 두 제자인 이간(1677~1727)과 한원진(1682~1751)사이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서울 노론이 개입하면서 노론계 전체로 전개되었다. 서울 노론이 이간을 지지하는 쪽으로 흐르고, 충청 노론이 한원진을 지지하면서 이 논쟁은 결국 사단칠정론 논쟁처럼 학연,지연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자는 서울을 상징하는 낙하(洛下)라는 표현에 근거해 낙론으로, 후자는 충청도를 상징하는 호서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호론으로 명명하였다. 그래서 인물성논쟁을 호락논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물성논쟁의 핵심은 사람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이다. 이간과 한원진은 충청도 노론으로 주희를 추종하는 유학자들이다. 각 자의 주장은 다르나 그 전거는 주희의 주장에 근거한다. 같은 스승 다른 주장인 셈이다.

1. 이간: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

 먼저 이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이가 비록 하나의 근원이라고 할지라도 기는 고르지 못합니다. 음양오행중

바르고 소통하는 것을 얻어서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어서 동물

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추세입니다. 사람과 동물사이에 바르고 소통하는 기

와 치우치고 막힌 기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람만이 홀로 이를 완전히 얻었고 동물의 경우는 반은 얻고 반은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런 논리의 오류에 대해서는 논할 여유가 없습

니다.(외암유고)”

이간이 전거로 삼은 주희의 주장은 이러하다.

“ 본성은 곧 이이다.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낳아 기로써 형체를 이

루면, 여기에 이고 또한 부여된다.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의 본성은 각각

하늘로부터 받은 이를 얻어서 건순과 오상의 덕을 갖추게 되니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중용장구)”

2. 한원진: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다”

한원진의 주장은 이러하다.

“ 인의예지신이라는 오상은 오행 가운데 빼어난 기의 이이다. 반드시 빼어

난 기를 얻은 다음에야 그 이를 비로소 오상이라고 말 할수 있다. 만일

빼어난 기를 얻지 못했으면 비록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를 모두 얻었으므로 오상의 덕을

모두 갖추었으나, 동물은 혹 하나의 빼어난 기만을 얻을 수는 있어도 오

행의 빼어난 기를 모두 얻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호랑이나 이리의 인,벌이나

개미의 의같은 것은 다섯가지 덕 가운데 겨우 하나의 덕만을 가진 것이니,

그 나머지 덕은 가질 수 가 없다.(남당집)”

한원진이 전거로 삼은 주희의 주장은 이러하다.

“ 본성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이이다. 삶이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

는 기이다. 본성은 형이상이고 기는 형이하이다. 사람과 동물이 태어날 때

이 본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이 기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지만 기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지각과 운동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지

않다. 반면 이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하늘로부터 받은 인의예지를 어찌 동물

들이 완전하게 실현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 선

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이다.(맹자집주)”

III. 해석

 주희는 理란 실체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라 보았다. 세상 만물의 다양한 모습은 음양오행이라는 氣가 만든 것이고 여기에 이가 부여 되어 건순과 오상이라는 덕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간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기의 차이이지 이에 부여된 이의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주희의 주장을 옹호한 것이다.

 한원진은 인간은 오행의 빼어난 기를 모두 갖추었으니 그러지 못한 동물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수양을 통해 오상을 실천하고 궁극적 이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물은 그러하지 못 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한원진이 전거로 삼은 주희의 주장에도 동물은 인의예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했으니 유학자로서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된다.

 주희의 이론은 이일분수(理一分殊)와 수양론으로 정리된다. 태극-음양-오행-세상만물의 변화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일분수고 사물에 대한 격물치지와 마음의 수양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理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수양론이다.

 이간은 이일분수라는 존재론속에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은 것이라 한 것이고 한원진은 수양론의 관점에서 근본적 이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으니 본성상 동물과 다르다고 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간이 이야기한 ‘바르고 소통하는 기’나 한원진이 이야기하는 ‘빼어난 기’는 분명 같은 의미를 갖을진대 그 기가 갖는 방향성이 아래로 향할 때 이간의 말이 맞는 것이고 위로 향할 때 한원진의 주장이 맞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잔잔한 물에 비추어지는 달과 흐르는 물에 비추어진 달에 있어 이간은 본질상 하늘에 떠 있는 달은 하나이니 두 가지 물에 비추어진 달은 같은 것이라 하는 거고 한원진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온전히 표현해 낸 잔잔한 물은 찌그러진 달을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흐르는 물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IV. 왜 이들의 의견이 이렇게 다른 것일까?

 이간과 한원진의 논쟁이 처음 시작이 그러하지 않았겠지만 서울노론과 충청노론의 논쟁으로 비화된 상황에서는 이렇게 변질되었을 것이다. ‘근거와 증거가 있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이 그러하기에 근거와 증거를 들이대는 것’으로 말이다.

 노론은 기본적으로 청을 오랑캐로 보았고 자신들은 명의 후예로 중화주의를 계승한 적자로 보았다. 그러나 서울에 살면서 청의 문물을 접한 노론들은 은연중에 청이 본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 있던 충청노론들은 여전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인물성논쟁을 통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조선과 청은 다르다고 생각한 충청노론은 한원진의 주장을 지지하게 된 것이고 서울노론은 이간의 입장에 선 것이다. 나중에는 자신의 스승의 입장, 내가 사는 지역의 입장을 생각 없이 따라가는 바도 있었을 것이고 전(前)의 주장에 일관성을 유지하고자-마음 속의 일말의 헷갈림에도 불구하고-주장을 꺽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V. 논쟁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

 인간의 본성에 대한 理와 氣에 관한 주장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그야말로 ‘주장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코끼리를 만져 본 사람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코끼리의 전체 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림은 그려 볼 수 있다고 본다.

주희의 성리학을 추종하는 조선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존재론적으로는 동물과 인간의 본성은 같다. 태극이 일자고 거기에서 만물이 유출된 것이니 그러하다. 그러나 수양론 입장에서 理의 실현이라는 가능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인의예지신이라는 ‘빼어난 기’ 혹은 ‘바르고 소통하는 기’를 갖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의예지신은 가능태로 존재할 때 존대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양반이라는 존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양반다울 때 위대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다운 행동을 할 때 인간답다고 하겠다. 즉 인간과 동물의 본성에 대한 소피스트적인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연,지연,혈연에 얽힌 주장과 논리,즉 이른바 진영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체력과 지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패러다임이나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물론 알고는 있어야-자신의 세계관,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능력 범위 내에서 세상을 보고 주장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다른가 같은가하는 논쟁은 자신의 사회적 실천과 결부되지 않는 한 결국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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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권익현 | 작성시간 13.03.30 형 오랜만에 뵙네요 긴 공백기를 깨고 드디어 납시셨군요 월요일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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