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미 류 상범. 이 장에서 놀미부락이 관향리에서도,그리고 천남면에서도 더 나아가 군차원에서도 미움살 찍힌 곳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TV 드라마 섭외를 위해 고향동네를 찾아 온 순이에게 부면장이 하는 말에 딱 걸려 있다.
" ...놀미부락은 곤란허다 이겁니다. 싸가지가 없어요. 주민들의 의식이 구태의연하구 저수준이구, 하여간 그중 낙후된 동네니께...."(279쪽). 한마디로 미운 털 박힌 동네의 좌충우돌하는 동넷 사람이야기가 이 소설 <우리동네>의 내용이다.
주인공 류씨는 농삿꾼인디 '다수성 신품종 재배 시범단지'에 자기의 논이 얽혀 들어 마음 내킴 없이 노풍품종의 벼를 심었다가 그해 농사를 잃어 버렸다. 문제는 병든 벼 농약 준다고 무리하게 작업하다 농약 중독이 되어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으며 누워지내고 사람 구실 못 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부인이 요구르트배달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잇게 되는데 그들은 나름 남모호랭교를 믿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실농한 논위 싸래기가 된 벼는 그들 부부가 태워버렸다. 그런데 그 논위에 서울에서 내려온 순이가 자신의 딸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셋트장으로 쓰려고 한다. 농번기 없이 열심히 일 하는 농촌,잘 사는 기계화된 시골을 선전하기 위함이란다. 류씨는 그 땅은 이미 죽은 땅이며 그 땅에 한 사람이라도 들어오면 경칠 줄 알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촬영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보리파종하고 트랙터가 들어가는 드라마 설정 장면을 찍게 된는데...그때 류씨가 트랙터 밑으로 들어가고 엑스트라 운전사의 서툰 운전으로 그만 그를 깔고 넘어가게 된다.
이 장에서는 정승화사건이라고 걸쭉한 여섯 남정네의 외박이야기와 이쁜이계 이야기, 귀숙어매이야기, 순이의 아역배우 엄마이야기, 남모호랭교이야기가 들어있다. 이야기속의 이야기를 나름 구걸지게 나름 허~참스럽게 읽어볼 만하다.
순이가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를 을러도 촬영 협조를 얻지 못하자 면사무소를 찾아 부면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소개한다.
그 녀는 그에게 구십 분짜리 단막극을 찍는데 새해 특집으로 내보낼 정부 시책 선전물치고는 전에 없이 공들여 제작한다는 대목을 몇 번 강조하고 나서는,
순이:
그러니까 새해 새아침을 맞아 충효 사상에 의한 새마음으로 새마을 운동에 몸받친다. 이런 테마죠. 거듭 말씀드리면 잘살게 된 자립 마을을 빽 스크린으로 드라마를 엮어서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고취하자이거죠. 허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일은 이런 일일수록 행정 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뒤따라줘야 해요. (부면장이 그런 말은 노상 들어온 터라 질동이 앞뒤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자, 속이 탄 순이가 말을 이어간다.) 허지만 부면장님, 우리가 행정 기관의 후원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어렵게 아실 건 없어요. 아까 놀미에서 이장하고 지도자를 만나봤는데요. 아무래도 기관장 차원의 지시가 없으면 곤란할 것 같아서 이렇게 뵙는 거예요. 부면장님께서 변차섭이 이동화 이 두 사람을 부르셔가시고 분부를 내리셔야 간단하겠거든요
부면장:
간단치가 않은디유. 농번기는 지났습니다만, 무슨 행사가 있건 최소한도로 민폐를 줄이자는 것이 우리 말단 행정기관의 기본 방침입니다. 그러나 다른 일두 아니구 충효정신, 새마음갖기 등은 정부 주도형 문화 사업이구 해서 가능한 것은 협조를 해드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디 문제는 우리 관내에도 모범 마을이 허다해서 아무데나 상관없겠습니다만..놀미부락은 곤란허다 이겁니다. ....군에서부터 찍혀서 아예 내놓다시피헌 동넵니다.
순이:
허지만 부면장님. 그건 문제가 아니예요. 스켸쥴은 이박 삼일이지만 티뉘에 나가는 건 삼사 분,길어야 오 분 정도거든요. 그것도 들에서만 법석을 떨 거니까 동네는 지저분해도 상관없어요. 내일 피디를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주로 논보리 파종하는 장면을 클로즈업시킬테니까요. 술과 화투로 세월하던 과거의 농촌에 이젠 농한기가 없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거니까....
부면장:
..... 그럼 들어오시는 대로 의논껏 말씀드려서 이렇게 허지요.(먹이고 재우는 것은 새마을 지도자에게 맡기고,노는 논을 골라 논보리 파종하는 시범해 보일 일은 이장에게 책임지우며, 트랙터 경운기 따위 영농 중장비는 농업 학교 실습용을 빌려 쓸 수 있게 직접 교정을 만나주겠다고 말한다.)
부면장:(총무계장에게) 학교 것은 죄다 학교 이름이 찍혀 있던디 우리가 삥기루 지우고 관향리 새마을 영농회루 고칩시다. 쓰구 나서 먼저대루 해주면 구만이닝께
계장:
그런디 여기 문제가 있는 것이요. 배우들이 트랙타나 경운기 운전을 더러 해봤답니까요?
순이:
글쎄요. 다 같이 바퀴 달린 물건이니까, 운전 기사들이 할 수 있잖을까요. 로케 중에 사람이 모자르면 탤런트 운전수들이 엑스트라로 나가도 무난했거든요.
부면장:
곤란헌디.트랙타나 경운기는 그런 민바닥 승용차허구 달러 아무나 집적거릴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러면 그것두 이따 교장 만나는 김에 학생을 몇 늠 내보내게 헐까. 운전수 눈동냥보다는 즉접 실습허는 학생들 눈썰미가 더 여무니께. 성가시지만 도리 웂으니께 소 젖소 염생이두 있는 대루 끌어내어 논두렁마다 늘어세우게 허슈. 구루마 지게 쟁기는 얼씬두 말게 허구, 오토바이 리어커 자즌거는 나라비를 스게 허셔. 이왕 살게 됐다구 전시헐 바이면 바퀴 달린 건 죄다 뵈줍시다.
계장:
오또바이는 베랑 안 어울릴 텐디유
부면장:
어채피 기계 농업을 과시허자는 것이니 쓸디 웂는 소리 말구.변차셉이랑 이동화나 내가 보잔다구 부르슈. 그러구 그 사람들이 갈 때 우리 촌지로 허구 막걸리 두 말 값만 집어주슈. 니열 한 말 모레 한 말 서울 양반들에게 대접허라구. 촌에서는 역시 막걸리가 있어야 후더분합니다요. 허허...
순이:
정말 감사합니다. 협조해 주시는 고마움을 타이틀 백에 넣어드리도록 이르겠어요.
부면장:
겸사의 말씀을. 되려 우리가 부인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그런디 의상이 썩 어울리십니다.
순이:
그래요? 입어보니까 그런대로 실용적인 것 같드군요. 아빠가 관광다녀오시는 길에 미스꼬시백화점에서 쇼핑하셨다는데 역시 디오르보다 삐에르 가르뎅이 물건을 물건처럼 뽑는 것 같아요.
부면장:
하꾸라이구먼요. 어쩐지 다르다 싶더니...
순이:
우리만 해도 국산은 못 입어요. 코스모스 옆에 뮈세 최 뷰띠끄에서도 시늉을 낸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하다못해 아동복 한 가지 제대로 내놓는 메이커가 없는 걸요. 우리 선이만 해도 전국을 누비는 예술인인데 아무거나 입힐 수 있나요. 생각다 못해 사오십만원씩 내버려 가며 샤넬이랑 세리느를 입히지만 그것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웬만큼 부지런해 가지곤 구경도 못해요............
부면장:
(계장에게 건네 받은 봉투를 순이에게 주며) 모처럼 오셨는디, 여기는 이런 디라서 기념될 만헌 토산품도 없고, 이거 인사가 아닌 줄 압니다만 넣어두시지요...
국가주도사업, 전시행정 이런 것이 당시 주된 세태인 것만은 확실하다. 70,80년대 농촌경제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던가? 한 세대만에 우리 경제가 선진국 문턱에 진입하게 된 원동력은 어디인가? 농촌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곳이 어딘가? 대기업위주의 중화학공업정책? 인력수출?....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가능하게 한 것은 멈추지 않는 화수분처럼 농업,농촌,농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