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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10교시 역사가 노자가 말하는 우군, 우민 공동체.-수정중

작성자임건순|작성시간13.09.14|조회수413 목록 댓글 0

 

10교시 노자가 말하는 우군,  우민의  장생 공동체

 

intro

 

노자는 신비하고 난해한 책입니다만 시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참으로 애독되어온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함축적이고 시적인 표현, 경직된 사고에 숨통을 열어주는 듯 한 여러 가지 표현과 주장들. 덕분에 참 많이도 읽혀온 책인데 많이들 읽어온 책인데다가 텍스트 자체의 모호성과 추상성, 시적표현들 덕분에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양한 주석서들과 해석서들이 나왔죠. 정치가, 재야의 지식인 학자, 도사, 승려들 많은 사람들이 읽어오고 내가 본 노자는 이렇다, 노자의 진심은 이런 것이다 많이도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들 해왔는데 한국에서 주류적 노자 해석의 관점은 문명 비판의 책이고 국가의 개입과 강압적 통치를 거부하고 문명이전의 삶을 추억하고 그 때로 회귀하기를 원하고 주장하는 책일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의 이상은 소국과민이라는 공동체로 우리는 알고 있지요.

 

소국과민(小國寡民)

 

무위하는 가운데 각자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성을 해치지 않은 가운데 자족하고 사는 삶. 그것은 소국과민이란 삶의 형태로 이야기 되어 왔죠. 소국과민 통행본 노자 80장에 등장하는 말인데요. 대략 이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문명의 이기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 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겁게하고 멀리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자신의 땅에서 먹는 음식을 달게 이기고 자신의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신이 사는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자신의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울음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서롤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죽을 때가지 이동하지 않는다.“

 

군주와 간섭과 억압은 최소화 내지 배제해야하고 백성들은 최소화된 생산과 행정단위에서 각자가 자신의 본성을 억압 받지 않으며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소박하고 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 백성들은 인위적 제도와 억압, 질곡에서 고통 받지 않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의 양식과 방식에 만족한 채 행복한 채 살지요. 이러한 소국과민은 자연의 질서라 이야기되는 도에 따르는 왕의 무위 통치하에서 가능합니다.

 

는 만물을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하고 완성시키며 형체를 주고 바탕을 이루게 하고 길러주고 덮어준다. 낳으면서도 자기것으로 하지 않고 위해주면서도 뽐냄이 없고 길러주면서도 마음대로 하지 않으니 이를 의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51)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무르면서 말 없는 교화를 행한다. 만물이 움직이더라도 억지로 시작으로 삼지 않고 베풀면서도 은혜로 내세우지 않고 공을 세우더라도 그 공에 머물지 않으니 오직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을 온전히 한다. (2)

 

천지간의 만물을 낳아주고 작동케 하지만 항상 아무런 사심 없이 또 소유욕 없이 그 도의 원리 자체로 움직이며 낳아주고 작동케 하는 그 과정으로 되풀이하는 자연의 질서로 비유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그 도()처럼 군주도 처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도구적 지식이나 과욕의 추구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가 소외되지 않는 자족적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기 위해선 사람들의 사는 공동체는 최소한의 규모를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 소국과민의 공동체는 군주와 통치권력의 무위 하에서만 만들어집니다.

 

소국과민(小國寡民) 소국(小國) 과민(寡民) 작은 나라, 적은 백성. 소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 그것이 노자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모습인거 같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사는 거 같습니다.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견지하면서 지금 자신이 사는 주거지에서 밖으로 이동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이웃 나라가 있지만 늙어죽을 때까지 이웃 나라에 기웃 거릴 생각 자체를 하지 않네요. 그런데 죽음을 무겁게 여겨서 옮겨 다니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죽음을 무겁게 여긴다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인간이면 누구든 자기 목숨 중한 줄 알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게 해서 옮겨 다니지 않게 해라? 어쩌면 이동하거나 사는 곳을 벗어나면 죽음이 기다린다, 즉 누군가 널 죽일 것이다 라고 알게 하고 그것을 주지시킨다는 거 같은데요. 이야 이탈하면 죽음이 기다리는 공동체. 우리는 소국과민하면 그저 평화롭고 조용하고 그 안에서 나름 풍요로움을 영위하며 만족하고 사는 원시적이지만 소박한 삶의 공동체라고 생각하는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는 것, 입는 것, 현재의 삶에서 얻는 것을 만족하고 긍정하게 하라는데 그것을 먹고 입는 사람이 스스로 긍정하는 게 아니라 누구간 그것을 긍정하게끔 시킨다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자신이 사는 거처 역시 그것에 만족하게 하라고 하는데 정말로 사는 거처가 좋으면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거 없이 사는 곳에 애정을 느낄 텐데 사는 곳에 대한 애착도 어느 그 누구가 가지도록 시킨다 내지 강제 한다 같은 뉘앙스가 느껴지죠.

 

이탈하면 죽인다고 위협받는데 진실로 그게 군주와 위정자가 무위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탈하면 죽이네 어쩌고 하는 거 보니 애초에 소국과민이란 건 누가 만들어놓은 작은 칸막이 안에 공동체가 아닐까요? 먹는 것과 입는 것, 사는 거처에 애정을 백성들 스스로가 가지는게 아니라 그렇게 가지도록 누가 시키고 강제하는 거 같은데 말입니다.

 

죽음으로 협박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공동체,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폭력의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폭력의 힘으로 칸막이 쳐놓고 그 우리 안에서 사람들이 살게 하고 벗어나면 죽인다고 겁을 주는 공동체. 스스로 만족의 정도와 삶의 처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니 분수를 알아라,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고 살아라 강요 받는 삶. 정말 무위에 의해 만들어져 자족하는 삶의 공동체일까요?

 

혹시 우린 노자의 소국과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어떤 강력한 통치자에 의해 의도되고 기획되어져서 만들어진 분할되고 고립된 작은 공동체이며 그러한 공동체에서 주어진 여건만을 최고로 알고 이탈하지 않은 우민들이 살고 그 우민들의 사는 작은 공동체 여럿으로 구성된 국가를 노자는 꿈꾸지 않았을까요?

노자하면 우리는 무위를 떠올리고 그래서 최소간섭주의, 불간섭주의를 생각하지만 위에서 분면 강제하고 시키는 주체가 아주 뚜렷히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존재함을 우리는 알 수 있고요 저러한 삶의 방식과 공동체를 백성들 자체가 스스로 처음부터 원한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스스로 원했으면 이탈을 죽음으로써 위협하면서 막을 이유가 이유가 없을 거 같고 자신이 먹는 것, 입는 것을 누가 억지로 만족케 강제할 이유가 없죠.

 

소국과민은 이런 것이다.

 

소국과민을 말한 장의 한자 원문을 보면 사역, 즉 시킨다는 뜻의 사(使)라는 글자가 원문에 많이 등장합니다.

 

使十百人之器毋(온갖 문명의 이기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게 하고

使民中死而不遠徙(백성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 옮겨 다니지 않게 하고

使民結繩而用之(백성들이 결승이란 원시적 문자를 쓰며 살게 하고)

 

분명히 백성들을 使 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에서 시키고 부리고 명령하고 강제하는 사람이 있나 본데 소국과민이란 공동체는 그 사람이 원하는 공동체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과 사상이 바로 노자사상이고요.

 

정말 우리가 소국과민에 가지고 있는 일반적 이미지나 인식은 좀 재검토 해봐야할 거 같고 노자 사상이 정말 자유로운 인간 각자의 삶을 위한 노래인지 그것도 재검토 해봐야합니다.

 

우선 소국과민은 목가적, 신화적, 신비적, 평화적 공동체라기보다는 철저히 의도되고 기획되고 강제된 것인 거 같네요. 더구나 위 원문에서 백성을 使 하는 주체가 자신이 기획한 공동체 울타리에서 백성이 벗어나는걸 절대 원치 않고 벗어나면 죽인다고 협박하거나 실제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요.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명확히 했어야할 것이지만 노자 사상의 수요자는 누구일까요? 앞서 순자 시간에 순자 사상의 수요자가 누군지 명확히 봐야한다고 강조했는데 노자 사상의 수요자는 누구일까요? 백성을 사역(使) 시킬 수 있는 존재 더구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폭력을 가진 존재를 수요자로 한 사상 같은데, 노자 사상의 수요자는 분명히 군주입니다. 순자만큼은 아니지만 통일제국의 군주를 수요자로 한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순자가 산 시대 그리고 노자란 텍스트가 완성된 시기가 비슷한 걸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거죠.

 

자 군주를 위한 사상서 노자 텍스트에서 소국과민을 이상적 공동체로 말했습니다. 소국과민. 소국(小國)의 소를 작은이란 뜻의 형용사로 해석했고 역시나 과민(寡民)의 과를 적다라는 뜻의 형용사로 우리는 해석해 왔지만 앞서 상앙시간에 말한 대로 소()와 과()를 동사로 해석해서 작게 하다, 적게 하다로 봐야합니다. 국가를 잘게 쪼게 백성들이 사는 구역을 작게 하고 그 구역 안에 적은 민들이 살게 하고. 이렇게 작은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절대 다른 곳으로 갈 생각하지 않는 순한지 멍청한지 모를 백성들로 이루어진 나라. 그것이 노자가 꿈꾸던 공동체이고 통일 제국의 군주에게 노자가 통치강령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엣말에 도를 행하는 사람은 백성을 지혜롭게 하지 않고 우매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고

지혜롭지 않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복덕이다.“

 

통행본 65장인데 이렇게 대놓고 노자는 우민정치를 말하죠. 통행본 3장에선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고 했는데 다 같은 것입니다. 기존에는 우매하게 한다는 말이 의미가 좋지 않으니 정말 우매하게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지혜와 잔꾀를 없애도록 하고 순박한 원래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독해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순박하게 만드는 것이나 우매하게 한다는 것이나 그거가 그거고요. 결국 자아의식, 주체의식, 비판정신 없이 군소리 없이 정해준 구역에서 시키는 일 하고 살면서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 만에 만족하고 살라는 것이죠.

 

이렇게 소박하고 우매한 민들로 구성된 소국과민의 공동체 또 그것으로 구성된 국가가 노자가 지향한 국가입니다. 그리고 소국과민은 앞서 관중의 분업이론에서 기획되어 상앙이 정교하게 가다듬었고 그걸 노자가 강신주 선생님의 말대로 시적으로 표현한 셈이죠. 관중에서 시작되어 상앙이 잘 가다듬은 것을 노자가 계승했다. 앞서 두 사람은 모두 국가주의자인데 그럼 혹시 노자도 국가주의자? 네 그렇습니다. 노자는 국가주의자입니다.

 

노자는 국가주의자다.

 

여씨춘추에서는 노자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소국과민이라는 것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해 가져와 보겠습니다.

 

엣날의 성왕이 백성을 이끌 때는 무엇보다도 먼저 농사에 힘을 썼다. 백성에게 농사짓도록 하는 것은 반드시 땅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뜻을 귀하게 여김이다. 백성이 농사지으면 소박해지고 그 소박해지면 부리기가 쉬우며 부리기가 쉬우면 변경이 편안하고 임금의 지위는 높아진다. 백성이 농사지으면 생산이 많아지고 생산이 많아지면 이사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며 이사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죽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법가로 분류되는 상앙의 꿈을 노자도 꾼 셈이죠. 결국 둘이 생각한 공동체의 청사진은 상당히 비슷한 셈입니다. 소국과민에 사는 구성원이 마음은 비어도 배는 채우고 의지는 없어도 뼈가 강해진다고 하는데 상앙이 정확히 원한 바입니다. 잘게 쪼개진 토지위에 붙어사는 농민들 그 농민은 잠재적 병역자원인데 그러니 고분고분하고 뼈는 강하고 배는 불러야겠죠. 뼈가 강하고 배가 불러야 잘 싸우니. 역시나 상앙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혹시 당황스러우신가요?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의 노자와 제가 드리는 말씀 속의 노자가 너무 달라서요? 그리고 너무 일찍 노자가 원한 공동체의 모습을 밝혀서 좀 김이 새시나요?

 

문명비판, 개체의 생명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긍정하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때론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맥락에서 독해되던 노자에 대해 제가 국가주의 내지 군주를 위한 통치술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니 좀 당황스러우실 수 있지만 한국에서 소비되던 방식, 팔리던 방식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전 제가 생각하는 노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노자는 군주를 위한 철학입니다. 어떻게 천하를 취할 것이고 그 천하를 취한 군주의 지위를 길게 또 안정되게 운영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한 책입니다. 사상적 수요자인 군주에게 실용적인 전략, 전술적 지침을 시적표현을 통해 말해주고 그 통치를 통해 우민정치하고 소국과민 만들고 왕 역시 사적 자아의식과 주체의식을 거세한 채 기계적으로 통치하라고 하지요. 그래야 국가와 군주가 장생구시할 수 있다고 하면서요.

 

한국에서는 그렇게 노자를 보통의 독자들에게 저와 같은 관점으로 소개한 사람이 극히 드물지만 다른 나라에선 많이도 노자를 그런 맥락에서 소개하고 읽어왔지요. 병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거의 법가와 유사한 사상가로서 소개한 사람도 있었는데 폭력과 강제, 강력한 통치를 말한 사상가들과 어찌 무위를 말한 노자와 비슷할 수 있겠나 싶지만 실제 저들과 노자는 상당히 비슷합니다.

 

애초에 앞서도 말했듯이 노자는 법가와 병가를 사상적 부모를 두고 있는 이란성 쌍둥입니다. 노자는 병가의 아들답게 또 법가의 형제답게 어떻게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목적을 공유하였고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요. 비록 그들과 달리 인순과 퇴양, 인내라는 노자만의 독특한 실천적 지침, 전술을 제시해 그들과 차별화 되긴 했지만요.

 

노자에 최초로 주석을 단 사람은 한비자고 한비자는 그의 텍스트에서 노자를 참 많이도 근거를 들고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인용했죠. 정말 법가와 노자는 사실상 쌍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란성 쌍둥이라 그렇지. 그리고 상앙편, 신도편에서 언급했듯이 법가도 무위를 아주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들도 군주의 이상적 통치형태를 무위로써 많이 설명했지요. 이렇게 서로가 닮은 것인데 법가는 국가주의자 철저히 군주를 위한 정치사상이고 그들과 많이도 닮은 노자는 국가주의자 내지 철저히 군주를 수요자로 한 사상가다. 이 점을 잊지 마시고 진전되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노회한 늙은이의 이야기.

 

사마천의 사기에서 노자는 주나라 도서관장으로 문서관리 책임자이자 역사가였다고 소개가 됩니다. 도서관에서 문서들을 관리하고 문서를 살피고 읽으며 역사를 꿰고 있는 도서관장이었다는데 이 어르신이 어느날 주나라를 떠날 결심을 했나 봅니다. 주나라의 멸망을 감지하고 혼란스러운 천하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 천하를 버리고 서쪽으로 가려는 이 어르신을 함곡관에서 변방 관리사무소의 관리가 잡습니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하지요. 가르침을 달라고. 간곡히 청하는 관리에게 노자는 글을 남겼고 그것이 바로 도덕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마천이 말한 대로 정말 공자가 노자에게 찾아가 예를 물었는지 그리고 노자란 인물 자체가 실존하는 인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마천의 노자에 대한 서술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장이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해 국가의 고급, 기밀문서를 보관하던 곳의 책임자였고 그는 거기서 차근차근 냉철한 눈으로 문서들을 살피면서 파악하고 깨달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망국의 날이 멀지 않은 주나라에서 근심을 안고 살던 이 어르신은 도서관에 보관된 문서들을 보면서 흥망성쇠 하던 여러 나라의 역사를 훑어보고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나라가 천장지구. 하늘과 땅처럼 장구하게 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런 지침 하에, 이런 전략과 전술, 이런 철학으로 군주가 운신하고, 나라를 경영해라. 그러면 하늘과 땅처럼 장구하게 국가와 군주의 생명이 길어지게 될 것이다. 그가 깨달은 도라는 것은 역사가의 눈에서 나온 것인데 마침 통행본 47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 멀리 나서면 나설수록 아는 것은 점점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돌아나지디 않아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구분하고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문밖에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천도를 안다. 주나라 도서관장 노자가 도를 깨달은 과정에 대해 아니면 도를 깨닫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는 거 같습니다.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익힌 게 아니라 역사서에 기록된 군사적 분쟁, 정치투쟁 속에서 멸망하고 사라졌던 국가들을 보고 장시간 살펴보며 사색을 했고 그 사색의 결과를 추상화 시켜 연역해낸 것 그것이 바로 노자의 도()입니다.

 

사실 노자를 사관과는 연관 짓는 건 현대의 연구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미 한나라 때부터 노자를 사관의 사상이라고 햇습니다. 한서 예문지(藝文志)에도 노자를 역사가라고 하고 군주를 위한 통치술을 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도가 학파는 대부분 역사관 출신인데 그들은 성공과 실패, 보존과 멸망, 재난과 행복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도를 널리 기록한 다음에 그 요점을 파악하고 근본을 잡을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맑움과 비움으로 자신을 지키고 낮음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통치자가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자 그런데 노자의 학문을 종합가 내지 잡가라고 소개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여러 학파 사상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취사해서 모은 사상이고 그의 도덕경을 잡가의 텍스트라고 하는데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음앙가의 큰 질서를 따르고 유가, 묵가의 좋은 점을 채택했으며 명가, 법가의 요점을 모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언급한 한서 예문지도 여러 학파들의 사상을 모았다고 지적 했는데요 노자는 이렇게 잡가적 성향을 띄고 있고 도덕경이란 텍스트는 잡가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잡가, 즉 종합주의적 경향은 전국시대 말기에 등장한 것입니다. 진나라의 대상이자 재상 여불위의 여씨춘추를 대표로 앞서 말한 순자도 그렇고 한비자도 그렇고 모두 잡가라는 범주하에 넣을 수 있는데 통일제국이 다가온 시기에 여러 사상들이 종합, 절충되는 사상의 모색과정이 있었고 노자 역시 그런 사상모색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죠. 앞서 순자를 말할 때 여러 사상가들을 평가 하면서 나름 각자의 장점들을 인정했다고 했는데 단순히 인정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체계 안에 포함시켰는데 특히 노자는 순자와 한비자에 비해 더욱 잡가적 경향을 띕니다. 그런 단순히 모으고 절충만 한 것이 아니라 뚜렷한 방향 하에 편집을 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도덕경입니다.

 

잡가적 경향을 보이니 전국시대 말기의 텍스트이고 어떤 뚜렷한 방향아래 여러 것들을 모아 편집하다보니 나온 책. 그 원칙은 군주의 통치술 특히 군주와 국가의 장구한 생존을 위한 것이었으며 정확히 말해 군주와 국가의 장구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치적 격언들을 모아 놓은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노자라는 이름에 기탁해 나오게 되었는데 노자는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허구적 인물에 가깝습니다. 우리 그냥 쉽게 노자는 어떤 늙은이, 할아버지라고 보면 되고요 역사를 깊이 통찰한 노회한 할아버지의 정치적 격언모음집라고 도덕경을 보시면 됩니다.

 

 

손자의 아들 노자 그리고 그의 쌍둥이 형제 법가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에서 참 많이도 강조한 것인데 사상가는 그 시대가 만드는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사상가는 뗄레야 뗄 수가 없고 시대라는 무대 위에서 사상가는 춤추고 노래한 것인데 그냥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시대적 한계 위에서 사고하고 사유한 겁니다. 그리고 전국시대 말기에 노자라는 텍스트가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상은 국가와 군주의 장생구시가 주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했는데 전국시대적 환경이 진하게 노자에 투영되었죠. 살벌한 전쟁의 시대에 많은 나라와 군주들이 사라졌죠. 그런데 노자는 적극적으로 이기고 드러내놓고 강해지라는 말은 없고 대신해서 퇴양, 유순, 겸손을 말합니다. 근데 그것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퇴양과 유순, 겸손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남고 지지 않기 위함이고요. 손자가 추구한 것처럼 자신의 본전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수히 많은 나라가 멸망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길게 가기 위해 여러 가지 조언과 방침을 말한 책,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지혜를 말한 셈이죠. 최후의 승자는 뭘까요? 결국 천하를 취하는 자입니다. 실제 천하를 취함은 노자의 중요한 주제이고요 천하를 취하는 주체로서 성인을 많이도 말했습니다.

 

사실 노자를 읽어볼수록 손자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굉장히 많이 깔고 있어요. 화복의 변화무쌍함, 환경의 변화무쌍함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무섭고 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손자처럼 노자도 어떤 명예와 윤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윤리적 개인과 사회?? 위험에서 살아남는 개인 특히 군주를 지향하고 도덕적 사회보단 오래 생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손자와 비슷하죠.

 

또 손자는 앞서 말한 대로 전쟁을 정보력이라고 하면서 최대한 상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나는 최대한 상대에게 은폐해야죠. 상대를 드러나게 하게 만들어놓고 나를 하게 즉 숨겨야하는게 손자의 절대적 원칙입니다. 노자 역시 나의 의사와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강조 합니다 통행본 52장에서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닫는다고 했죠. 한비자는 군주가 절대 자신의 속뜻을 드러내지 않아야 신하에게 휘둘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노자 역시 왕을 위한 충고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높게 되려면 낮은 곳으로 임해라 상대를 작게 하려면 우선 크게 해줘라 자신의 진심과는 외려 정반대로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위장의 전략, 전술을 말합니다.

 

또 손자는 아군이 이겨도 어떻게 이기는 지, 즉 바꿔 말해서 상대방이 내가 왜 졌는지도 모르게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하며 자신의 이기는 요령과 비결, 전략, 전술을 절대 노출하지 말라고 하는데 노자 역시 신하를 다루고 백성들을 다루는 통치의 메커니즘을 숨기고 또 숨기라고 강조합니다. 참 손자와 비슷하죠. 그리고 손자의 자식은 법가들도 있는데 노자와 그들은 이란성쌍둥이인데 그 집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집안 식구들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양자가 손자의 어떤 부분을 닮았고 서로 간에 무엇이 어떻게 닮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그래야 그들의 중심적 문제의식이 분명히 이해되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공동체 역시 명징하게 들어옵니다.

 

우선 도덕과 정의가 아닌 강함을 추구합니다. 또 강함을 추구하다보니 냉철한 이성을 강조하지요.

 

손자는 전쟁 상황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상입니다. 전쟁은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윤리와 도덕은 사실 고려할 일이 아닙니다. 노자와 법가, 둘다 공자 맹자, 순자, 묵자처럼 정의로운 사회와 인의, 도덕과 윤리의 현실화와 미래적 확장. 이런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노자는 망하지 않고 길게 가는 것을 추구하고 노골적인 강함을 추구하지 않아 국가와 군주의 힘을 빠르게 극대화 시키는 법가와 달라 보이질 모르지만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게 아니고 오래가는 자가 강한 거라는 말이 있듯이 오래 가는 것을 꿈꾸는 노자는 최강을 추구하는 사상가입니다. 괜히 주자가 노자가 제일 독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최강을 추구하는 노자에게 퇴양, 겸손, 낮은 곳으로 위치함, 그리고 인내를 말하는데 저것들을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전략, 전술일 뿐이죠. 전략, 전술 자체란 말 자체에서 이미 병가냄새가 풍기는데 법가도 여러 가지 전략, 전술을 제시하죠. 특히 한비자는 어떻게 신하들을 통제하고 간신배들을 찍어 누를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신하통제에 대한 기술, 그들과 대결에서 항상 유리한 위치를 가져갈 수 있는 세를 강조하는데 다 손자에게서 영향을 받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전략과 원칙을 가지고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옳고 그름 윤리와 도덕이 아닌 그런 것을 주로 고민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냉철함 일 것입니다. 측은지심? 백성을 자식으로 보는 마음? 천하 만민을 두루 사랑하는 마음?? 그저 현실을 살피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할 뿐입니다.

 

둘째 변화를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전쟁터 상황은 변화무쌍합니다. 유리함이 불리함으로 강함이 약함으로 약함이 강함으로 항상 상황은 가변적입니다. 유가와 묵가에겐 당위적인 가치와 정의가 우선이고 그것은 내일도 모래도 항상 추구되어야하지만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손자에겐 항상 매순간마다 적용되어야할 기준과 원칙은 없고 항상 써왔던 방식과 원칙을 재검토하면서 변화된 상황에서 최적의 카드를 뽑아야합니다. 그래서 유연함을 강조하죠. 항상 변해야하니까요. 손자는 최상의 군대는 물과 같다고 했는데 마침 상선약수를 노자가 말했고 노자 역시 군주의 유연함을 강조하죠.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 군주는 어떤 일관된 원칙과 정의를 고집하는 군주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화할 것이란 전제하에 처신하고 운신한 것을 말합니다

 

 

재앙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 복에는 재앙이 엎드리고 있으니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정해진 올바름이란 없다. 올 바른 것은 다시 이상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은 다시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됨은 참으로 오래 되었구나 이 때문에 반듯하면서도 남을 재단하지 않고 모가 서려 있으면서도 남을 찌르지 않으며 곧바르면서도 널리 펼치지 않고 빛나면서도 번적거리지 않는다”(통행본 58)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함부로 힘을 자랑하고 강공을 펼치고 강경책을 쓰는 걸 항상 노자는 만류합니다. 노자는 설령 자기에 아주 강한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지요. 세상이 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언제 어떻게 변하여 자기가 피해를 입힌 사람이 보복하고 자기 자랑과 교만이 순식간에 화를 불러오는 것으로 다가올지 모르게 때문에 함부로 나서고 자랑하는 것을 강하게 만류하는데 이런 처세의 원칙 뒤에는 역시 화와 복. 길흉으로 다가오는 환경과 세상의 변화무쌍함이 있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진하게 깔려 있습니다.

 

법가도 역시 변화를 전제로 합니다. 앞서 상앙편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변법을 말했는데 그 때 그 때 상황과 환경에 맞는 통치수단이 있기 마련이라며 상앙은 변법을 주장했죠. 뒤에서 다룰 한비자가 역시 항상 상황에 맞는 신축성 있게 법과 제도를 바꿔야한다고 말합니다. 둘다 변화를 전제로 하는 손자의 영향을 받았는데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신중함VS 항상 갱신되는 법과 제도. 이런 대응 원칙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앞서 도덕과 윤리가 아닌 강함을 추구했기에 냉철한 이성을 중시했다고 했는데 변화하는 상황을 전제로 했기에 냉철한 이성은 더욱더 중요할 것입니다.

세 번째 법가의 엄형주의와 차별 없는 법집행과 부대조직, 운영과도 같은 소국과민의 이상 모두 손자의 영향입니다.

 

손자는 전쟁을 통해 사유 했는데요 전쟁 상황에서 부대를 다루고 병사들을 부리는 원칙으로 군법이란게 있습니다. 군법은 우선 엄합니다. 그리고 장수부터 사병까지 똑같이 적용되어야합니다. 지휘가 높고 계급이 높다고 봐준다? 외려 군법에선 지휘가 높고 계급이 높을수록 더 엄하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가 역시 병가의 영향을 받아서 법의 엄격함과 공평무사함을 강조합니다. 상앙이 말하는 엄형주의는 상당히 지나치다 싶죠. 분명 그는 법으로써 법을 없애야 한다. 작은 죄도 엄하게 벌함으로써 백성들이 벌 받아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가혹한 건 사실입니다. 그것은 병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군법처럼 공평무사하게 적용되어야한다고 했는데 모든 법가 사상가들이 한결 같이 주장했죠. 신분과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일괄적으로 법은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역시 손자로 대표되는 병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노자에게도 법의 엄격함과 일률적 적용의 원칙이 눈에 보일까요? 노자에겐 분명 엄격한 법의 집행과 신분, 귀천을 막론하고 법의 일률적 적용 그런 주장은 없습니다만 소국과민의 공동체만 봐도 왠지 군대의 냄새가 강하게 납니다.

 

맛없는 것도 군말 없이 먹어야하고 허름한 옷도 군소리 없이 입어야하고 잠자리가 불편해도 버텨야합니다. 그것이 싫다고 벗어나려고 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자도 춥고 사회의 감옥보다 못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곳 있죠.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 맘대로 벗어나려고 하면 탈영죄로 강하게 처벌 받습니다. 애초에 소국과민을 먼저 말한 상앙도 보면 군부대 편성하는 것처럼 행정구역을 편성했고 언제든 행정구역을 관할하는 관리를 지휘관으로 그리고 구역안의 백성들을 부대원으로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게 하려고 했으며 상앙의 소국과민 통치에 영향을 준 관중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격리수용식 분업체계를 말하면서 잘게 쪼개놓은 행정망에 군사명령을 내릴 때 정치명령에 묻어가듯이 내리라고 햇습니다.

 

대놓고 제나라가 군사력을 키우고 군사조직화를 해버리면 상대 나라에서 의심하고 맞대응해서 군사력을 키울 것이 분명 하기에 행정망과 구역을 정비할 때 단순히 행정망의 정비를 정손 보는게 아니라 행정망을 정비하는 척 하면서 언제든 군대로 바로 변화시킬 수 잇게 그 행정망을 조직하라고 했고 군사명령을 행정명령에 끼워서 내리라고 했죠.

 

관중의 분업이론은 사실 생산력의 극대화 이외에 군사력의 증강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관중 역시 상앙과 노자처럼 국가가 쳐놓은 행정구역 칸막이에서 백성이 벗어나는 것을 병사의 전시탈영처럼 싫어합니다.

 

네 번째로 법가와 노자의 우민통치 전략도 병가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죠. 병사는 군대에서 부속품에 불과하고 시키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수행만 하는 존재여야지 이런 저런 비판적 생각과 독자적 의식을 가지면 병사로서 쓸모가 없다 못해 위험한 존재가 되는데 법가와 노자 시키는대로 하고 절대 딴생각하지 않는 말 잘 듣는 병사와 부대원 같은 백성을 원합니다.

 

 

다섯번 번째 적과의 대결을 전제로 한다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했는데 거꾸로 노자와 법가 사상에서는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 됩니다. 둘 다 군주와 신하를 VS 구도로 놓고 있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언제든 불일치할 수 있으며 권력싸움에서 적이 될 수 있다 보지요. 어떻게 하면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전략과 지침을 생각했습니다.

 

여섯 번째 무()에 대한 강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손자에게 정보력은 중요하고 정보력 싸움이 전쟁입니다. 최대한 상대에 대해서 잘 알아야하고 우리 쪽은 은폐 시키고 상대에 노출 되는걸 최소화 시켜야합니다. 이쪽을 무로 만들고 상대를 유로 만들어야하는데 이것이 노자와 법가에서 말하는 군주의 무위에 많은 영향을 주었죠. 그것은 다음 단락 그리고 다음 시간의 한비자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짜 노자가 말하는 무위다.

 

자 뒤에 한비자를 다룰 것인데 한비자를 위시한 법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 그리고 노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좀 위해 좀 장황하게 손자와 관련 시켜서 봤는데 이제 노자의 무위를 살펴봅시다. 그가 말했던 소국과민을 앞서 보았고 이렇게 무위까지 살펴볼텐데 이제 노자 이해의 팔부능선을 여러분들은 넘게 될 것입니다

 

집안에 전기가 들어오고 컨센트에 코드를 꼽습니다. 냉장고와 전자렌지, 티비, 컴퓨터 이런 가전제품들이 24시간 부지런히 돌아갑니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에서 관찰되는 도()는 이렇게 가정에 들어오는 전기와 비슷한 거 같습니다. 개별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일을 하는 여러 가전제품과 구별되면서 이렇게 가전제품 하나 하나가 총체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도()이죠. 그리고 이 도는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무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정전 상황 등이나 전기세 고지서를 납부할 때를 제외하곤 집안에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죠. 눈에 보이고 실제 움직이는 건 여러 가지 가전제품들이니까요. 유위하는 가전제품들과 달리 도는 무위를 하는데 군주 역시 그 도와 같아야합니다. 신하들을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합니다. 즉 그들은 유위를 하고 그들을 위에서 통솔하는 군주는 무위합니다. 무위 한다고 무위도식할 때의 무위처럼 놀고 먹는 게 아니라 신하들이 움직이게 하는 매니징을 할 뿐이며 아울러 신하들을 포함해 만민들이 각자가 제대로 활동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힘과 원인으로서만 작용한다는 것이죠.

 

왕이 이 일 저일 모두 간섭하고 나설 수 없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모두 꺼내 일을 하나 하나 지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저 신하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의도와 관념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천지처럼 왕도 사심 없이 운영을 합니다. 자신의 사적인 생각과 관념, 의도를 가지고 나서선 안되죠. 그래야 질서 있게 움직이고 돌아가는 자연처럼 신하들이 기능하게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능하려면 사전에 잘 만들어진 법과 법에 기초한 시스템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일과 사무, 통치와 행정의 기준이 없고 시스템적으로 정비된 게 없는데 어떻게 밑에 신하들이 알아서 움직이고 기능할 수 있겠습니까? 노자는 실제 군주는 무위하라고 해도 한번도 법치를 부인한 적이 없고 신도처럼 도가로 분류되기도 하고 법가로 분류되기도 하는 사상가는 무위와 법치를 같이도 말했는데 노자의 무위는 법치와 같이 가는 것으로 보는 게 좋습니다.

 

법에 의해 각자에게 임무가 부여되고 그 임무를 달성했을 시 주어질 상과 인센티브, 그렇지 못할 경우 주어질 페널티와 벌. 왕은 그저 시스템의 정점 위에서 자신의 의도와 주관적 생각을 배제하고 법에 의해 판단하고 법대로만 신하들을 평가해서 움직이게 합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법을 철저히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사심으로서 상을 주고 벌을 주고 특정 신하를 총애 한다던가 변덕을 부려선 안됩니다. 천지만물은 인간이라고 이뻐하지 않고 인간 아닌 미물이라고 버리지 않고 일시적으로 이상징후과 기후, 기상이변을 보여도 항상적인 질서를 찾아가고 보여주는 데 군주도 그렇게 무심하고 또 항상된 질서를 보여주는 자연처럼 객관적인 법대로 운영하며 기능 해야죠

 

노자의 무위라는 것은 법치와 같이 하면 아주 좋고 또 그렇게 귀결 될 수밖에 없습니다.

 

통행본 48장에 보면 이런 노자의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구절이죠.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도를 더하고 도를 들은 사람은 날마나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니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바야흐로 천하를 취하려 한다면 언제나 일이 없음(無事)으로 해야할 것이니

만약 일을 벌이게 되면 천하를 취하기 충분하지 않다.“

 

무위에 이르면 하지 못하는 게 없게 된다. 그 유명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게 없는 무불위가 노자사상의 목표죠. 그리고 여기서도 노자의 천하를 취하겠다는 의식이 잘 드러나는데 역시나 왕을 수요자로 한 철학입니다. 그리고 도()를 장악해야하고 도()대로 행해야 하는 사람은 역시나 군주겠죠. 그 군주는 학문을 하지 말고 뭘 더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문 하는 사람이 없어야할까요? 학문을 단순히 지식, 학술, 사상이라 보지 말고 군주 아래에서 일하는 신민들의 실용적 기술과 일을 하는 요령이 학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갈수록 숙련되어가고 노하우를 쌓아야할 것입니다. 학문 하는 사람은 그렇게 축적해가면서 잘 기능하고 위에서 군주는 덜어내고 무위하고 무사하고 그러면 천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자 이렇게 해석해보면 위구절의 진의가 명확히 들어오고 노자철학의 핵심줄기가 보이실 겁니다.

 

밑에 (신하들이) 학문을 하면 (지식이) 날로 늘어나고, 군주인 내가 도[]대로 행하면 (지식을) 날로 덜어낸다. 덜어내고 덜어내면 (자기 주관, 주장대로)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게 된다. (군주가 자기 주관, 주장대로)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면 천하에 하지 못함이 없게 된다(無不爲)

 

그렇기에 천하를 차지하려면 항상 (군주가 자기, 주관 주장대로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군주가 자기 생각, 고집대로 하는) 일이 있게 되면 천하를 차지할 수 없다.“

 

자 그리고 앞서 보았던 구절 다시 끌어오겠습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

멀리 나서면 나서수록 아는 것은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이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구분하고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앞서 위에 통행본 47장은 노자가 도를 깨달은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한편으론 군주가 군주로서 기능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봐도 됩니다. 일일이 신하들 일 하는 것에 나서고 여기저기 간섭하지 않아도 왕실에서 한눈에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군주의 모습. 모름지기 군주는 문밖에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아야겠죠. 그러기 위해선이 앞서 말한 구체적 기준으로서의 법이 있어야하지요.

 

 

내가 무위하니 백성은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은 스스로 올바르게 되며

내가 일삼는 것이 없으니 백성은 스스로 부유해지고

내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자 하니

백성은 스스로 소박해진다고 하였다. 통행본 57

 

내가라고 했지만 군주가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군주가 무위하면 백성들이 스스로 말 잘 듣고 생산 잘해낼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나 국가가 안정된 토대위에서 계속 되길 원하는 군주에게 실용적 지침으로 무위를 말한 거 같네요.

 

무위와 유위, 무명과 유명

 

사실 무위는 유가에서 먼저 말했습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고 그 역시 이상적 군주의 통치방식으로 말했죠. 군주는 국가의 상징 내지 어른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실질적으로 정치와 통치는 신하들이 하게하라. 유가의 군신공치라 쓰고 지식인과 관료들이 주인공이 되는 정치라 읽는 정치이상을 말합니다. 여러 지식인들과 귀족들 화합에 기초한 정치 하에서 군주는 적당히 국가의 어른 내지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게 좋겠다고 공자도 맹자도 생각했고 그 중에 공자는 가장 먼저 무위를 들먹이면서 군주는 좀 가만 계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유가에서 군주는 분명 유위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의 어른 내지 상징 노릇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요.

 

학문을 쌓아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야하고 항상 관료와 지식인들을 우대하고 백성들의 부모가 된 마음으로 백성들을 살피고 항상 유덕자로서 모습을 보이고 또 그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굉장히 많은 것들이 그에게 요구 되었습니다.

 

공자는 정명론을 말했죠.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 다워야 한다고. 예로 규정된 질서 하에 각자에게 부여된 이름에 걸맞게 덕을 쌓고 바람직한 행위를 항상 보여줘야 한다. 임금이면 임금답게 이름에 규정된 대로 덕을 쌓고하고 신하면 신하답게 신하란 이름에 규정된 대로 덕을 쌓고 행해야한다는 것이 공자의 정명론인데 공자가 말한대로 임금이 임금답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다른 구성원과 같이 임금 역시 항상 이름에 구속 받는 존재고 자기 이름이 임금답기 위해 공부하고 국가의 어른이자 스승이 되어야하는데요. 공자가 무위를 말했다고 해도 공자를 비롯한 유가는 군주의 유위를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노자와 법가는 군주의 무위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에서 잘 드러나죠. 앞서 말한 부분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유가의 유위와 대조해서 노자의 무위를 잘 이해하기 위해 한번 사마담의 논육가요지를 끌어오겠습니다.사마담은 여섯가의 학문적 요점을 개괄하는 논육가요지를 썼는데

 

 

도가道家사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전일케 하고, 행동은 무형

에 합치하여, ‘모든 것들’(인간을 포함)을 충족하게 한다.도가는, [사계절

의 순환변화에 대한] 음양가의 대순大順에 바탕을 두고,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택하고, 명가名家와 법가法家의 핵심을 취한 것이다. (정책은) 계절의

변이와 더불어 사물(의 실정)에 따라 대응하였다. 풍속을 세우고 사업을 추

진함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시[]가 간략하여 쉽게 작동하니,

은 적되 결실은 많았다. 유가는 이와 같지 않았다. 군주는 세상의 모범적

표준이었다. 군주가 선창하면 신하들은 화답하였다. 군주가 선도하면 신하

들은 뒤따를 뿐이다. 이와 같으면, 군주는 수고로우나 신하들은 편하다.

() 정신은 크게 쓰면 고갈되고, 몸은 크게 수고롭게 하면 망가진다. (임금

) 몸과 정신이 소란스러웠는데,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게 생존했다는 것은

(결코) 들은 바 없다.

 

낮의 정무가 끝나고 밤이 되어 경연이라고 신하들에게 강도 높은 수업을 받고는 했던 조선 시대 왕들, 그 경연만 생각해봐서도 유가에서 말하는 임금 노릇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죠. 국가의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신민의 스승 역할을 잘하기 위해 계속 학습을 해야 하고 하지만 반대로 도가는 일은 적되 결실은 많았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수양하는 건 군주에게 해당사항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꾀를 내는 것도 그에게 해당사항 없고요. 그저 주어진, 그리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신하들에게 일을 시키고 그들에게 행위를 사후에 평가하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무위이고요.

 

무위(無爲)를 하는 군주는 무명(無名)입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지향하죠. 무명의 군주는 유가만큼 이름에 구속 받지 않습니다. 이름으로 구획된 질서밖에 있는 존재지요. 신하와 백성 각자에게 각자가 명으로 구체적 책임과 임무를 부여해줍니다. 농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농사를 잘 지어야할 것이고 장수의 이름을 받은 이는 전쟁을 잘 해야할 것이고 궁중에 관료도 이름으로 임무와 보직을 부여해줍니다. 모두가 명으로 부여된 임무와 책임이 있는데 군주는 그저 위에서 그들이 임무와 책임을 잘 수행했는지 기계적으로 평가만하지 자신은 제대로 자신의 이름에 걸맞 는 결과와 실적을 만들어냈는지 안 만들어냈는지 평가 받고 문책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존재하고 기능은 하지만 잘 감지되지 않는 존재이며 이름에 걸맞는 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 비판 당하지 않는 존재. 노자는 무명을 지향합니다.

 

유가에서 자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맹자가 말한 것처럼 일개 시정 잡부이자 신민의 적이 될 수 있는데 무위하는 무명군주는 이름으로 구속되고 비판당하지 않습니다.

 

로봇 같은 군주, 로봇 같은 신민들의 공동체

 

군주의 무위를 말하는 노자 사상은 군주에게 많은 것 안바랍니다. 주어진 매뉴얼대로 시스템 돌리고 주어진 법대로 신민들을 평가하고 유가의 군주처럼 다양한 국정분야에 지식을 쌓을 필요도 학자 뺨칠 정도로 학문적 내공을 쌓을 필요 없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다면 어떤 체력일 겁니다. 실제 노자철학을 통치론이 아니라 양생론으로 꽤나 많이 독해하기도 했는데 양생론적 독해도 설득력 있습니다. 군주가 건강해야 통치가 안정되니까요. 앞서 군주를 전기에 비유했는데 전기가 나가면 가전제품을 쓸 수가 없고 스마트폰 배터리가 나가면 형형색색의 아이콘들이 무용지물이 되는데 전기와 배터리가 항상 충분히 준비되고 공급되어야합니다

 

앞서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에서 정신이 고갈되고, 몸은 크게 수고로와 망가지기 쉬운게 유위를 말하는 유가체제하에 군주라고 했는데 그와 반대되는 무위의 노자 사상에선 철저히 정신의 고갈과 몸의 피로를 경계하지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끼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오직 아끼기 때문에 일찌감치 준비할 수 있으니 일찌감치 준비하는 것을 두텁게 덕을 쌓는다고 한다 두텁게 덕을 쌓으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고 이기지 못할 것이 없으면 막히는 곳을 알 수 없으며 막히는 곳을 알지 못할 정도라야 나라를 가질 수 있으니......”

 

아껴야 한다고 하는데 정신과 육체의 소모와 피로를 최대한 줄여야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덕을 쌓는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유가식의 도덕감정과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는 뜻의 덕이 아니라 노자의 덕은 어떤 강한 생명력(장자도 비슷한데 장자는 개체 고육의 생명력과 개성의 덕으로써 노자와 약간 다릅니다)인데 아껴야 그 덕을 쌓아 이기고 나라를 가질 수 있는겁니다.

 

유가보단 군주가 해야할 것들이 적지만 주어진 법대로 신하와 백성들을 정확히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도 분명 일이니 그 일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보존하라는 것이죠. 실제 노자텍스트에 이렇게 왕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 보존을 위한 조언들이 있는데 그렇기에 양생론적 해석도 상당히 타당하다고 봅니다. 왕이 양생을 해야 무위통치도 길게 갈 수 있으니까요. 무위 그리고 무위를 위한 정신적, 육체적 능력의 보존 그것뿐입니다. 이렇게 노자는 왕에게 많은 거 요구 하지 않습니다. 법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가는 참 많이도 요구합니다.

 

학문과 덕성 함양, 국가의 어른 노릇 정말 할 일이 많습니다. 자연히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고갈과 소모도 우려되는데 체력이 받쳐줘야 유가식의 군주노릇도 제대로 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유가식의 정치론의 가장 큰 문제는 반드시 군주의 지적, 도덕적 역량이 탁월해야한다는 데 있죠, 하지만 군주도 사람이고 지적 도덕적 역량이란 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바에 적잖이 좌우되는 것인데 어떻게 항상 군주가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그리고 이런저런 일하는데 필요한 왕성한 체력까지 갖출 수 있을까요? 유가는 이렇게 군주에게 슈퍼맨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노자와 법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히 군주를 평범한 보통의 인간으로 전제하고 자신의 사상을 말합니다.

 

애초에 말이죠. 유가처럼 전설속의 성인군주와 같은 모습을 모든 군주들에게 기대하고 때론 강제하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보통정도의 지적 능력과 덕성을 가진 군주가 나라를 맡아도 나라가 우왕좌왕 하지 않게 시스템을 잘 만들어야 놓아하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고하고 현실에서 혼란과 무질서를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절박하게 생각한다 면요. 특히 법가들 사상의 특징이 그러한데요. 노자 역시 왕에게 많은 거 안바랍니다. 지혜와 덕성의 추구? 그것의 최대화?? 바라지도 않고 오히려 말립니다. 벗어 던지라고요. 그건 법가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우민정치만 말하는 게 아니라 왕도 우해지게 바랍니다.

 

결론은 우군(愚君)과 우민(愚民) 공동체. 

 

그 입을 막고 귀를 닫으면 죽을 때까지 수고스럽지 않다

 

그 입을 열고 그 일을 이루게 한다면 죽을 때까지 구제할 수 없다. -통행본 52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될 것이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통행본 19

 

입을 막고 귀를 막아야할 사람은 백성뿐만이 아니고 성스러움과 지혜를 끊을 사람도 백성만이 아닙니다. 군주 역시 입과 귀를 막고 성스러움과 지혜를 끊어야합니다. 그래야 무위할 수 있으니까요. 군주에게 크게 기대 안합니다. 지능과 덕성이 최상인 군주만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니 군주 한사람의 지혜와 덕에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인치를 배격하고 자의적 통치를 배격하죠. 그리고 왕의 덕성과 지혜를 기대안하는 정도를 넘어서 왕도 바보에 가까운 사람이 되면 더욱 좋습니다. 주관적 인식을 키우지 말고 사적 자의식을 끊으면 딱 좋죠. 그래서 군주는 항상 고요하고()하고 허()하면 좋습니다, 스스로 사려하지 말 것이며 움직이지 말 것이며 주관적 판단하지 말 것이며 그저 주어진 매뉴얼과 법대로 따라가며 기계처럼 기능하면 됩니다. 그럼 통치의 효율이 높아지고 자신과 국가가 오래갈 수 있습니다.

 

군주도 주어진 대로 기능하고 밑에 신하와 백성들도 주어진 대로 기능하면 됩니다. 내가 왜 주어진 대로 기능해야지??라고 회의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식과 학문 습득 못하게 합니다. 앞서도 우민 정치를 이야기했고 우민정치를 말한 도덕경 텍스트의 부분을 가져왔는데 우민정치를 말한 다른 노자 텍스트 부분을 가져와 보겟습니다.

 

“(군주가) 현명한 인물을 대접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현인이 되고자)

서로 경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욕심이 생겨날 물건을 눈에 띄게

하지 마라, 그래야 백성들이 다른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이 다스릴 때 그들의 마음을 텅 비우게 하고, 그들의 배를 채워주며, 그들의 (사적인) 뜻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뼈대를 강하게 해준다. 늘 백성들로 하여금 (사적인 욕심을 추동하는) 지식도, 욕망도 없게 하고, (허욕을 고취하는) 식자識者들이 설치지 못하게 한다. (군주가 설치지 않는) 무위無爲의 정치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현명한 자를 높이지 마라 즉 지식인들과 유세가에 높은 벼슬과 직위를 주며 왕 옆에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분수를 잊고 시키는 일 하지 않고 학문을 해서 출세를 할 생각을 합니다, 상앙처럼 백성들이 분수에 벗어나는 욕심을 추구하거나 딴 생각하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그렇기에 백성들에게 바람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군주 옆에서 없어야 하지요. 백성들 곁에도 없도록 해야하고요

 

어쩌면 주어진 프로그램대로만 일하는 로봇 백성들을 원하는 거 같은데 군주 역시 로봇을 지향하죠. 사적인 의지와 꾀, 학문 모두 군주도 버리고 주어진 대로 기능하라고만 했으니. 비극인지 희극인지 노자사상은 이렇게 귀결됩니다. 무지무욕하라고 하며 마음을 비우라고 했는데 머리까지 비우라고 하는 거 같죠. 마음을 비워도 배는 부르게 한다는데 노자적 이상에 의하면 백성은 배부르기만 하면 되는 거 같고 왕 역시 배부르기만 하면 되는 거 같습니다. 배부른 상태가 아주 오래 지속되기만 하면 그만이고 그것을 위한 지침서 같습니다. 실제 당시에 문둥이가 왕을 불쌍히 여긴다고 할 정도로 권력다툼과 외세 침입에 군주의 지위는 불안했다는데 머리가 비고  마음이 텅비어도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은 채 배만 부른 채로 천수만 누려도 그게 어디였을까 싶습니다. 실제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였을텐데 노자 사상은 한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습니다. 그만큼 배부른 채 장생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많았다는 것이죠. 전쟁과 분열 상태를 겨우 끝내 진이 들어선 상태에 진이 단명하고 다시 전란에 휩싸이고 이런 분열과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배부른 상태로 장생을 말하는 노자 철학이 매력적이었을 거 같아요.

 

무위하는 우군과 우민의 정치.......

 

백성들이 똑똑해지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똑똑해질 때만 저항하고 반발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도 반발이 일어나고 그 때 일어나는 저항이 위정자에게는 훨씬 무섭습니다. 노자가 우민정치를 말했다고 행여나 군주의 전제적 독재를 하며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고 학정을 해도 좋다고 말한 건 아닙니다. 왕 역시 객관적 법과 프로그램으로 다스려야하기에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 할 수가 없습니다. 자의적 독재는 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가 아니죠. 왕 역시 자동기계의 한 부분으로 기능해야하는걸요. 그리고 노자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정치에 대해 곳곳에서 경고했으니 행여 백성들 못살게 구는 정치를 위한 책으로 오해 하지 마시길

 

-백성들이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두려움이 닥칠 것이다.

백성들의 기거함을 방해하지 말고

그 삶을 억누르지 말라

오직 억누르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스스로 알면서도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

스스로를 중히 여기면서도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통행본 72

 

가혹한 통치로 백성들이 막다른 곳에 다다르지 하지 마라 그렇다면 나라가 망하고 군주의 지위도 잃을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데요. 백성들을 극한으로 쥐어짜서 굶주리게 하고 그러한 학정에 지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태가 없도록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라 합니다. 머리가 비게 할망정 배가 비는 일은 절대 없어야합니다. 그들의 배가 비면 군주의 배는 비다 못해 갈라질 것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정치가 우민정치라고 하지만 최소한 배는 채워줄 것을 말했고 그보다 못한 저급한 정치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군주와 신민, 자의적 독재 없는 정치, 비판적 의식과 자아의식 없는 사회. 배 고프지 않은 소국과민들로 구성된 나라 그 나라 맨 위에 머리와 마음 모두 빈 군주. 그러면서 천장지구 하늘과 땅처럼 오래가는 공동체와 왕. 이렇게 정리가 가능하겠는데요

 

우민정치를 말했기에 우리는 혹평을 가해야할까요? 폭력적 자의적 독재와 지배를 배격했기에 후한 점수를 주어야할까요? 어떤 점수를 주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프로그램과 운영체계, 사회의 틀, 법일텐데 그러니 형제 법가와 노자사상은 같이 가기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노자에 주석을 한비자가 달았고 자신의 사상에 주요근거로 활용했는데 다음 시간은 한비자네요. 자 그럼 한비자 편에서 뵙지요. 마지막 시간입니다.

 

1. 노자의 소국과민 속 인민은 군인과 비슷한데요. 그 군대에 가면 우리는 사람된다고 합니다 군대 가면 정말 사람될까요?

- 설마 사람 되는 것이 힘 있는 자에게 순종하는 그런 거? 소국과민 공동체처럼 愚해지는게 사람 되는건가요? 군대 가서 보수적 인간되고 비판적 사고 거세된 인간으로 거듭되는게 바람직할까요?

2.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누가 더 부럽습니까?

3. 노자에 대한 여성주의적 독해, 생태주의적 독해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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