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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역사

1장. 발해의 건국과 강역

작성자이태완|작성시간10.09.11|조회수184 목록 댓글 0

 1장. 발해의 건국과 강역

 

1절. 발해 건국기

 

발해의 건국기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실려 있는 바, 먼저 [구당서]부터 차례로 소개한다.

 

  [구당서(舊唐書)]<발해전(渤海傳)>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멸망후에 대조영(大祚榮)은 가족들을 이끌고 영주(營州)에 와서 살았다.

  696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이 패하여 죽은 후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이진충의 잔당을 치게 하였다.

  먼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추격하였다가 고려와 말갈을 합친 대조영에게 패하였다.

  대조영은 군중들을 이끌고 동쪽 계루고지(桂樓故地)에 자리잡았다.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고 하였다.

  高麗 旣滅. 祚榮 率家屬 徒居 營州...祚榮 遂率其衆, 東保 桂婁之故地, 居東牟山, 築城 以居之.”

 

  여기에 [신당서]<발해전>의 기록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동모산은 영주(營州)로부터 2000리 되는 곳이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추장 걸사비우라는 자는 고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 오루하(奧婁河) 변에 자리하였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용서하였으나 걸사비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이해고를 시켜 걸사비우를 쳐서 죽였다.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인 대조영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도망을 쳐서 이해고가 천문령까지 쫓아갔다가 패하고 돌아왔다.

  이후 거란족이 다시 돌궐국에 투항하며 영주를 돌궐이 차지하니 중국과 길이 끊어져 발해를 토벌하지 못했다.”

  위에 소개한 두 기록 사이에 약간의 차이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 첫째는 [구당서]에 없던 걸걸중상이 [신당서]에서 대조영의 아버지라고 등장한 것이고

  둘째는 천문령 전투의 시기가 서로 반대이다. 즉 [구당서]는 천문령 전투 후에 대조영이 동모산을 쌓았고, [신당서]는 걸걸중상이 먼저 태백산 오루하변에 자리를 잡고 진국공(震國公)이라 불리다가 천문령 전투를 맞게 되었다.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면 거의 정확하게 실체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조대기>는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인용되어 있다.


   고려말 태백일사가 편찬한 <대진국본기(大震國本記)>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고구려, 발해 여러 왕의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기록이 있고 이 중 발해의 연호들은 대개 [신당서]와 일치한다. 그러나 [신당서]에서 빠진 걸걸중상의 연호 중광(重光)과 대조영의 연호 천통(天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史實)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를 지지하는 것이 [요사지리지]<동경요양부서문>이다. 윗글에는 발해 대이진(大彛震)왕이 12세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발해 시조를 걸걸중상으로 모시고 계산한 것이다. 후세 사가의 입맛대로 발해 시조를 대조영으로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소개된 건국기는 <조대기>를 인용하였고 앞서의 두 당서 기록과 다르다. 특히 대조영이 건국왕이 아니라 건국왕인 걸걸중상의 태자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개화(開化: 고구려 보장왕의 연호) 27년(서기 668년) 9월1일 평양성 함락 때에 진국장군 대중상(振國將軍 大仲象)서압록하(西鴨淥河)를 지키다가 변고를 듣고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개원(開原)을 지날 때는 소문이 퍼져서 8000인으로 합쳐져서,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후고구려(後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광(重光)이라고 연호를 세웠으며 이후 주위 원근의 여러 성이 따르었는데 중광 32년에 돌아가셨다. 묘호를 세조(世祖)라고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고 하였다.

  태자 조영은 부음을 전한 관리를 따라서 계성(薊城)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고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천도하였다. 말갈의 걸사비우와 거란의 이진영 등과 손잡고 당나라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패시키고 국호를 대진국(大震國)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하였다.

  천통 21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이 즉위(서기 699년)하기 30년 전에, 걸걸중상이 세운 후고구려(後高句麗)가 발해 모국으로서 존재하였고(668년 이후), [신당서]도 이를 인정하여 천문령 전투 이전에 후고구려를 대진국의 전신으로 표기하기 위하여 걸걸중상을 기록한 것이다.


  걸걸중상이 사망한 중광(重光) 32년은 고구려 망국년도인 668을 원년으로 계산하여서 서기 699년이 된다. 또한 719년에, 재위 21년만에 붕어한 대조영의 즉위년도도 역시 699년이 된다. 따라서 대조영의 대진국(大震國) 즉위연도는 확실하게 699년이고, 중광에서 개원한 연호는 천통(天統)이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연도는 이제까지 알려진 698년, 699년 등이 아니라 668년, 걸걸중상의 중광 원년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요사지리지]의 명백한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걸걸중상의 후고구려가 건국된 곳은 오루하변이라고 하였는데, 유수현 대파고성(大古城)이다.

 

  <조대기>의 기록은 후고구려의 태자 조영이 거란의 이진충군에 합류하여 영주 반란을 일으키고, 이진충의 북경 점거에도 동참하여 북경 근처인 계성까지 갔다가 걸걸중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이진충의 거란군은 반란의 기세를 몰아서 영주에서 북경성까지 점거하여 20만에 달하는 당나라 군을 몰살시켰다.

  이후에 당나라의 구원을 자처한 돌궐국의 영주 침략으로 인하여 거란군은 배후에서 고립을 당하여 그만 패퇴하고 이진충은 전사하였다.

  거란 장수였던 이해고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오히려 거란과 연합군이었던 걸사비우의 말갈병과 대조영의 고구려군의 추격에 나서고 있다.

  대조영은 [구당서]에서처럼 본래 영주(營州, 今 朝陽)의 유민이 아니라 발해 건국 후에 영주에 쳐들어와 점령했던 것이다.

  역시 중국왕에게 허국공(許國公)의 작호를 받은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진국공 대중상과 동렬의 위치인데, 송막도독 이진충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거란과 합세하여 당나라를 치러가면서, 대조영도 걸사비우를 따라서 참전하여 계성(薊城; 今 天津市 北)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유물로 추정되는 함화4년(咸和; 836년) 불상(日本 所在)에 허왕부(許王府)가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 663년 설치)를 두어 신라왕을 계림도독이라고 불렀고,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 차츰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이후 674년 신라가 멸망한 고구려 후예인 반란군과 연합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당나라가 소유한 백제 땅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계림도독이던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金法敏)을 삭탈관직하고, 즉 왕위를 폐지하고 대신에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지명한 후에, 신라와 전쟁을 치르었는데 675년부터 2년간 지속되었고 676년의 경기도 적성의 칠중성, 인천의 매초성 전투(買肖城)로 끝났다.

  [신당서]에서 당나라는 매번 승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패수를 장악하여 지켜내었는데 당시 지리적 정황으로는 패수가 바로 청천강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백제의 땅 모두와 고구려 땅의 일부안 청천강까지 당나라가 신라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또한 문무왕도 복권되었다. 문무왕의 복권은 당나라의 인정이 그러한 것이고 실제 신라 왕권은 변함이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668년 평양에서 676년 요동 고성(古城; 안산성)으로 물러나고, 다시 일년만에 요동 신성(新城, 新民市 大紅旗鎭)으로 옮긴다.
  신라가 청천강 이남을 굳건히 지켜내니 대동강 평양에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696년 거란 이진충의 반란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유명무실하다가 705년에 다시 복위되지만 714년에는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으로 또한번 후퇴한다.

  그 이유는 712년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 설눌(薛訥;설인귀의 아들)의 군대가 돌궐의 지원을 받는 해족(奚族, 난하의 북부 민족)에게 대패하여 다시 영주 땅을 돌궐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은 713년에 발해에게 최흔(催炘)이라는 사자를 보내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는데 그 목적은 발해와 당나라가 동서 양면에서 돌궐이 차지한 영주를 협공하자는 속셈이었다. 아무튼, 당의 속셈이 이루어져서 그 몇년 뒤인 서기 716년경에는 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영주 땅이 영주를 지키던 고구려 왕자 고임무의 배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715년 당나라와 발해는 다시 대릉하를 경계로 대치하며 교류하였다.

 

  그리고 730년부터 4개 북방 민족이 북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732년에는 발해가 대장 장문휴를 시켜서 바다 건너 산동의 등주를 침략하고 돌아왔는데 이후 발해와 당의 국경이 만리장성 근처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743년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 盧龍縣)으로 안동도호부가 한번더 생겨났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754년) 이후에 안동도호부 자체가 폐지된다. 당나라가 안서, 안남, 안북 도호부의 눈부신 성과에 의하여 얻어진 국토확장에 비하면 안동도호부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소위 당 현종의 “개원의 치(開元之 治)”는 동쪽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안록산의 난 이후로는 각 지방을 점거한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들에 의하여 당나라 국토가 요리되었다. 이를 번진(藩鎭) 시대라고도 한다.

  그 번진의 선두는 산동에서 제왕(濟王) 칭호를 가졌던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都師) 이정기(李正己)이다. 그는 안록산 이후 가장 큰 절도사였으며, 고구려의 후인으로서 산동반도를 지배하면서 당나라와 발해와 당나라와 신라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또한 소금으로 소득을 올렸다. 이정기는 3대 4왕을 전하였다. 즉 아들 이납(李納)과 손자인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에게 평로치청절도사를 전하여 약 90년 동안 산동 15주의 지배권을 가졌는데, 당나라의 위협을 받으면 발해가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7세기말의 시대 상황을 검토해 보건대 후고구려의 황태자인 대조영이 부왕인 걸걸중상의 명령을 받고, 말갈추장 걸사비우를 따라서 거란의 당나라 침공에 응원하러 갔다가 걸걸중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698년 북경으로부터 패퇴하여 요수를 건너오면서 중국 땅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을 많이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며, 걸사비우의 전사로 인하여 걸사비우의 말갈군중도 흡수하였을 것이다.

  대조영은 698년에 천문령(시라무렌 강 유역, 요서 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분쇄한 다음에 699년 걸걸중상이 죽자 후고구려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조영은 후에 713년을 전후하여 국호를 발해국으로 다시 변경하였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속일본기]에서 보듯이 대무예왕은 고려국왕이라고도 칭하였다.

 

  대무예의 아들 대흠무(大欽茂)는 대흥(大興)으로 개원하였고 752년에 상경홀한성(上京忽汗城; 黑龍江省 阿城)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북경에서 일어난 안록산의 대연국(大燕國)이 당나라와 발해의 완충지가 되었다. 

  대흠무 치세에 787년 이후로 동경성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이무렵 고구려 후손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는 제왕이라 칭하면서 산동의 15주를 차지하였는데 4대를 전하였다.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서 평로치청절도사가 완충 지대였으며 당나라가 이정기를 치면 발해가 구원하였다.


  792년 대흠무가 죽고 흠무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니, 굉림의 아들 화여를 제치고 굉림의 동생인 원의(元義)가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수개월 만에 흠무의 손자인 화여(華璵)가 다시 즉위하면서 상경홀한성으로 다시 돌아오니 흑룡강성 아성 터다.

  화여가 죽고 왕위는 화여의 아들인 숭린(嵩璘)과 다시 동생인 원유(元瑜)을 지나 11대왕에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왕위에 올랐다.

  [신당서]나 [한단고기]의 <발해기>에서 대인수왕은 남쪽으로 임진강까지 신라를 치고 내려와 신라의 패강진이 예성강까지 후퇴되어 설치되었고, 서쪽으로 당나라를 쳐서 조선, 해북(海北;大凌河) 등을 다시 수복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은 대인수의 즉위 전 공적으로서, 대인수는 바로 그러한 공적에 의하여 발해 왕으로서 추대되었다.

 

 

2절. 발해의 강역(渤海 彊域考)

  [신당서]<발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조영(大祚榮)이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하고, 돌궐과 통하니, 지방이 오천리이고 병사는 수만명이었으며
마침내 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 제국을 다 가졌다.(盡得 扶餘 沃沮 弁韓 朝鮮 海北 諸國)

  윗 글중의 해북은 발해의 북쪽이란 뜻이고 구체적으로는 발해 연안 중에서도 훗날의 산해관 북쪽을 의미한다.

  조선(朝鮮)은 고조선이 있던 요동반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변한(弁韓)은 절대로 경상남도 김해가 아니라 난하 유역인 하북성 노룡(盧龍) 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지역은 당나라 평로치청절도사나 노룡절도사와 경계지역이므로 발해가 가진 변한은 본래 변한의 동쪽 일부로서 기후(己其-侯)가 있던 수유성, 즉 금서시 수중현부터 해북까지로 보아야 한다. 최초의 옥저(沃沮)는 요령성 요하 서쪽 신민시, 철법시, 강평현 일대이다. 부여는 시라무렌강, 즉 서요하의 상중류 유역이다.

  712년부터 713년 사이에 다시 거란족, 해족(奚族)등이 다시 돌궐과 연합하여 당나라 북변, 북경 일대를 침략하였다. 이때 요동 땅과 중국 본토와의 허리인 요령성 영주(현재의 조양시)는 돌궐국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즉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돌궐이 내려와 있었다.

  713년 당나라 현종은 칙사 최흔(催炘)을 바닷길로 발해에 보내어 대조영을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책봉하고 돌아갔다.

  이전까지는 대조영이 “계루군왕(桂婁郡王)”이었는데 이제 발해, 요동반도의 주인이 된 것이다.

  발해국왕 대조영은 713년에 이미 국호를 대진국에서 발해국으로 변경하고 요동반도를 다 찾은 것이다.

  당나라는 714년에 돌궐에 대비하여 안동도호부를 진황도시 노룡현에 다시 설치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발해 지도에는 발해국에 발해 바다가 없이 압록강 뒤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위에서 당현종이 최흔을 발해에  파견한 목적은 요령성 영주를 차지한 돌궐국을 동서에서 협공하자는 취지였다. 소위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이다.

  3년 후인 716년 경에 영주의 돌궐국 수비장수인 고구려 유장 고임무(高任武)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고임무는 본래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었다. 대조영의 회유를 뿌리친 고임무의 명분없는 당나라 선택에 의하여, 다시 요령성 영주는 당나라 땅이 되고 발해와 당나라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후로도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는 발해와 연합한 해족, 거란족, 돌궐족의 꾸준한 침략이 있었다.

  그러나 732년에 삼부족이 당나라에게 패퇴하였는데,

  이때 발해가 해군으로서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제압하였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의하면 발해 장수 연충린(淵忠麟)이 당나라의 반격을 요서(遼西)의 대산(帶山)에서 물리쳤다.

  요서의 대산(帶山)은 733년 마도산(馬都山) 전투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도산은 노룡의 진산(鎭山)이라고 하였는데 진황도시 청룡현에 남아 있는 도산(都山;1846M)이다. 하북성 노룡현으로부터 만리장성 바깥에 있다.

  [신당서]<오승체전(吳承王此傳)>에서 발해의 대무예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마도산을 쳐서 성읍을 함락시켰는데 당나라 장수 오승체가 발해군을 그 이남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오승체 신도비문(吳承王此 神道碑文)에서는 발해가 바다(산동반도)에서 나타나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즉 발해의 732년의 당나라 산동반도 침략과 733년의 마도산 전투를 기록한 것이 된다.

  한편 733년 3월 거란이 돌궐의 지원으로 유관의 도산(都山)에서 당나라 유주도사 곽영걸을 패사시켰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발해의 연충린의 승전으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727년 발해 땅이었던 하북성 노룡현이 732년에 당나라에게 들어가자 발해가 산동반도를 치면서 다시금 마도산을 차지하여 국경을 노룡과 청룡지간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사이에 현재 만리장성이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서도 세 곳에 발해 영역에 대한 옛글이 있다.

  1.무예(武藝) 때에 거란과의 서쪽 경계가 오주목(烏珠牧) 동쪽 십리 임황수(臨潢水)이다.

  이 말은 대조영(大祚榮)의 아들 대무예(大武藝)의 치세에는 오늘날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라는 곳의 아래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倫河, 즉 임황수)가 발해의 서쪽 경계라는 것이다. 파림좌기는 거란족의 요나라 수도였던 상경 임황부이고 오이길목륜하는 임황수(臨潢水)라고 부르던 물이다. 오주목(烏珠牧)이 현재의 오이길목(烏爾吉木)이다.

  2. 인안(仁安) 16년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였다.

  3. 장백산의 동쪽을 안변부(安邊府)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부(安遠府)라 하고

     모란강의 동쪽을 철리부(鐵利府)라 하고

     흑수(黑水)의 강변을 회원부(懷遠府)라 하고

     난하(灤河)의 동쪽을 장령부(長嶺府)라 하고

     장령부의 동쪽을 동평부(東平府)라고 하였다.


  여기서 난하의 동쪽이 발해의 장령부라고 하면, 중국의 만리장성 바로 동쪽은 전부 발해 땅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 기존의 역사지도에는 발해 땅이 요동반도에도 못미치고 길림성부터 발해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발해의 강역은 [신당서]<발해전>에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원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발해땅은 오경 십오부 육십이주(五京十五府六十二州)를 두었는데

  숙신의 땅(肅愼故地)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용천부(龍泉府)라고도 했으며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그 남쪽은 중경(中京)이라 하고 또한 현덕부(顯德府)라고도 하였는데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육주를 다스렸다.

  예맥의 땅(Ꞑ貊故地)에는 동경(東京)을 두었는데 용원부(龍原府)라고도 하고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했으며 경주(慶州),염주(鹽州),목주(穆州),하주(賀州) 등 사주를 다스렸다.

  옥저의 땅(沃沮故地)에는 남경(南京)을 두었고 남해부(南海府)라고도 하였으며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고구려의 땅(高麗故地)에는 서경(西京)을 두었으며 압록부(鴨淥府)라고 하였으며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豊州),정주(正州) 등 사주를 다스렸다.

  장령부(長嶺府)는 하주(瑕州)와 하주(河州) 이주를 다스렸다.

  부여의 땅(扶餘故地)에는 부여부(扶餘府)를 두고 항상 강병을 두어 거란을 막았으며 (常屯勁兵 扞契丹) 부주(扶州)와 선주(仙州) 등 이주를 다스렸다.

  정힐부(鄭詰府)는 정주(鄭州), 고주(高州) 이주를 다스렸다.

  읍루의 땅(挹婁故地)에는 정리부(定理府)를 두었으며 정주(定州),반주(潘州) 이주를 다스렸다.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경주(瓊州) 등 이주를 다스렸다.

  솔빈의 땅(率賓故地)에는 솔빈부(率賓府)를 두어 화주(華州),익주(益州),건주(建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불열의 땅(拂涅故地)에는 동평부(東平府)를 두어 이주(伊州),몽주(蒙州),타주(沱州),흑주(黑州),비주(比州) 등 오주를 다스렸다.

  철리의 땅(鐵利故地)에는 철리부(鐵利府)를 두어 광주(廣州),분주(汾州),포주(蒲州),해주(海州),의주(義州),귀주(歸州) 등 육주를 다스렸다.

  월희의 땅(越喜故地)에는 회원부(懷遠府)를 두었으며 달주(達州),월주(越州),회주(懷州),기주(紀州),부주(富州),미주(美州),복주(福州),사주(邪州),지주(芝州) 등 구주를 다스렸다.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미주(郿州),모주(慕州),상주(常州) 등 사주를 다스렸다.

  그외 영주(郢州),동주(銅州),속주(涑州) 등 독립주(獨奏州)가 있었다.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以肅愼故地爲上京曰龍泉府領龍湖渤三州 其南爲中京曰顯德府領盧顯鐵湯榮興六州 Ꞑ貊故地爲東京曰龍原府亦曰柵城府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爲南京曰南海府領沃睛椒三州 高麗故地爲西京曰鴨淥府領神桓豊正四州 曰長嶺府領瑕河二州 扶餘故地爲扶餘府常屯勁兵扞契丹領扶仙二州鄭詰府領鄭高二州 挹婁故地爲定理府領定潘二州 安邊府領安瓊二州 率賓故地爲率賓府領華益建三州 拂涅故地爲東平府領伊蒙沱黑比五州 鐵利故地爲鐵利府領廣汾蒲海義歸六州 越喜故地爲懷遠府領達越懷紀富美福邪芝九州 安遠府領寧郿慕常四州又 郢銅涑三州獨奏州

 

 

2장. 발해 건국지 구국(舊國)과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率賓府 華州, 益州, 建州) 


1절 . 발해 구국

 

  668년 발해 개국조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를 이어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워 중광(重光)으로 개원하였다.

  걸걸중상은 읍루고지이며, 고구려 계루부이기도 한 오루하변 동모산(東牟山)에 나라를 세웠는데
  읍루고지는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향(大坡鄕)의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신당서]에는 발해 구국(舊國)이라고도 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걸걸중상을 진국공(辰國公)으로 봉하였다.


  오루하는 후에 오라라고 줄여서 말하였고 길림시 북교에 오라부 고성이 남아 있고
  대파고성 건너편에는 청나라 오라아문(烏拉阿門) 비석이 있다.
  따라서 발해 오루하는 길림시를 지나는 송화강이다.

 

  834년, 12세 대이진(大彛震)왕 즉위 후에, 발해를 방문한 당나라 장건장(張建章)의 묘비에는 발해 홀한주가 [읍루고지]라고 하였다.

  705년경 당나라 중종 때에 발해 도읍을 홀한주라 하고 발해군왕에 봉하였다. (中宗賜 所都曰 忽汗州 封渤海郡王)

  이것이 발해 최초의 홀한주 기록인데 지금의 장춘시(長春市)다. 홀한하가 송화강을 고쳐부른 이름이다.

 

  장춘시가 한때 홀한주였던 것은 [원일통지(元一統志)]<개원로(開原路)>에 있는 다음 기록에 의한다.

 

  上京故城 古肅愼氏地, 渤海大氏 改爲 上京

  金旣滅遼, 則 上京建邦設都 後改爲會寧府 京之南曰 建州,

  京之西曰 賓州, 又西曰 黃龍府 則 渤海之忽汗郡 後爲 龍泉府

  이를 해석하면 (현재 하얼빈 아성에 위치한) 상경고성은 본래 숙신씨 땅이고 발해 대씨왕조가 처음으로 상경이라 고쳐 불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정하고 뒤에 회녕부라고 고쳐불렀다.

  금나라 상경(하얼빈 남쪽 아성현 白城)의 남쪽은 건주(建州)라 했고, 상경의 서쪽은 빈주(賓州)라고 했고 또 서쪽은 (장춘시 농안현에 있던) 황룡부(黃龍府)라 했는데 본래 발해 홀한군이며 뒤에 용천부라고 불렀다.

 

  보충 증거로서 [원일통지(元一統志)]<오국부(五國部)>의 발해 건주(建州) 기록이 있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 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상경(하얼빈 북쪽)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백두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동서로 각기 발원하고 백두산의 북쪽에서 송화강의 상류가 발원한다. 이 송화강은 요나라 때에 압자하(鴨子河)로 부르다가 혼동강으로 개칭하였다.

  송화강은 길림을 지나 부여시를 지나 눈강(嫩江)과 만나서 동북류로 바뀌어 (하얼빈 아성의) 금나라 상경 북쪽을 지나 흑룡강을 만나고 우수리강을 만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그런데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곳이 발해 솔빈부 건주(建州) 서쪽 50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윗글에서 언급한 상경은 발해 건주 다음이니 당연히 발해 상경이며 금나라 상경과 같은 곳이다.

 

   장춘시는 발해 최초 홀한군이고, 713년 대조영이 중종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은 중경 현덕부성이다.
  이는 698년 발해 구국 동모산에서 발해 2세 대조영의 수도가 된다. 뒤에 발해 4세 문황제 대흠무는 발해 상경으로 천도했는데 이곳이 하얼빈 남쪽 아성(阿城)이다.


  [고탐]의 도리기에 발해 중경에서 동북방으로 600리에 발해 상경이 있었는데 이는 장춘시와 하얼빈 아성간의 방향, 거리와 일치한다. 또한 [신당서]의 대흠무 기록에 상경은 구국으로부터 300리라고 하였고 이는 구국을 장춘시 유수현 대파고성(大坡古城)으로 보면 일치한다.

  “신주에서 육지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는데 천보 중의 발해 왕도이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 왕성은 홀한해에 임하였다.

  왕성 서남 30리에 숙신성이 있고 왕성에서 덕리진을 거쳐 남흑수말갈까지 천리이다.


  神州, 又 陸行 四百里至 顯州 天寶中 王 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城臨忽汗海 (단 2년간 발해 상경이었던 동경성에 대한 기록이 잘못 삽입)

  其西南三十里 古肅愼城 其北 經 德理鎭 至南黑水靺鞨 千里

 

  발해 구국의 대파고성은 동변이 1050m, 서변이 840m 남북이 각각 630m로서 총 3150m의 둘레를 가졌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4문이 있었고 발굴 결과 포문(布文)기와와 녹유(綠釉)기와, 연주수면(連珠獸面) 기와, 꽃무늬 와당 등이 나왔다.
  

  성내에서는 대형 조각 벽돌, 청색 벽돌, 동경, 철솥, 옥기, 석기, 돌공(石球) 등이 나왔다.

  성 외곽에서도 6개의 건축지와 1개의 야철지(冶鐵地)가 나왔다.  

  석각 호랑이와 용운문(龍雲紋) 옥패식(玉佩飾)이 아름답고, 칼, 창, 검, 화살, 불상 등 청동류와 각종 동패식이 출현하며 쌍룡문, 쌍어문 동경 등 여러 동경도 나왔다.

 


  발해 구국   대파고성 평면도

 

 

 

 

 

 

 

 

 

 

          

 

 

 

   성남쪽의 노하침향(老河沈鄕)에서는 발해 최초의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중국에서는 발굴 결과 돈화현 육정산 고분군보다 이른 발해 조기(早期) 양식으로 발표하였다.

  발해 시기 묘장이 139좌이며 석관묘와 목관묘도 있고 철갑편, 철검 등 철기와 구리장식, 은장식 등이 있었다.

  그래서 발해 구국 성지로서 대파고성이 확실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역사적 관심이 집중되야 할 것은 노하침(老河沈鄕)에서 발굴된 동한시대(東漢時代) 묘장 129좌다.

  발해 묘장보다 훨씬 화려하고 정교한 구리장식, 금은 장식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한시대의 숙신족 고분이다.

  발해 상경은 숙신고지에 세워졌다.


 


2절.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率賓府 華州, 益州, 建州) 

  1> 건주(建州)


  다음은 [원일통지(元一統志)]<오국부(五國部)>의 기록이다.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상경(발해)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백두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동서로 각기 발원하고 백두산의 북쪽에서 송화강의 상류가 발원한다. 이 송화강은 요나라 때에 압자하로 부르다가 혼동강으로 개칭하였다.

  송화강은 길림을 지나 부여시를 지나 눈강(嫩江)과 하오린하(藿林)만나서 동북류로 바뀌어 흑룡강이 되고 금나라 상경 북쪽을 지나 우수리강을 만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서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곳이 발해 솔빈부 건주(建州) 서쪽 50리가 되는 것이다.

 

   발해 건주부여시 반덕(班德; 성둘레 1700m )고성이 된다.

 

  2> 화주(華州)

  솔빈부 화주는 솔빈부 부성이다. 부여시 백도눌(白都訥; 성둘레 3132m) 성이 된다. 연화문 와당이 많아서 이미 발해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규정된 발해성중 가장 서쪽이다.

 

  3> 익주(益州)

  솔빈부 익주는 송화강 북안의 증성진(增盛鎭) 부근으로 추정된다. 요나라가 송화강 남쪽에 익주를 다시 만들었으므로 발해 익주는 증성으로 이름을 고친 것이다. 증성 동쪽 신점에서 꽃무늬기와가 나왔다. 

 

 

3장. 상경 용천부, 용주, 호주, 발주  

 

숙신의 땅(肅愼故地)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용천부(龍泉府)라고도 했으며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다음은 [원일통지(元一統志)]의 글이다.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발해의) 상경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역시 원일통지의 내용이다.

  

  상경고성은 본래 숙신고성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이라 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발해 상경에 도읍하고 훗날 회녕부라고 하였다.

 上京 古城은 본래 肅愼氏地이고 渤海大氏가 改爲 上京하였다

  金旣滅遼 卽 上京建邦設都 後改 會寧府


  그런데 고탐의 [도리기]에서 이미 발해 구국 왕성을 언급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압록강구에서 배를 타고 100리를 가서 작은 배로 동북 30리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에 다다르는데 발해의 경계이다.

  다시 강을 오백리 거슬러 오르면 고려 왕도였던 구도현성에 이르고

  다시 이백리를 오르면 신주에 이르고

  신주에서 육지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는데 천보 중의 발해 왕도이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 왕성은 홀한해에 임하였다.

  왕성 서남 30리에 숙신성이 있고 왕성에서 덕리진을 거쳐 남흑수말갈까지 천리이다.


  自鴨祿江口 舟行 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 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古高麗王都

  又 東北 泝流 二百里 至 神州, 又 陸行 四百里至 顯州 天寶中 王 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城臨忽汗海

  其西南三十里 古肅愼城 其北 經 德理鎭 至南黑水靺鞨 千里


  여기서 압록강은 오늘날의 요하(遼河)이고, 발해 신주(神州)는 철령시 서풍현 양천진 성자산산성이다.

  자세한 것은 서경 압록부 신주에 설명되어 있다.

 

   [신당서] 발해전(新唐書 渤海傳)의 상경 천도 대목이 있다.

  발해의 상경성 시대는 발해 대흠무왕 때로서 당나라 천보말이었으니 738년 이후 756년 이전이다.
  대흠무왕의 즉위 15년인 752년으로 추정된다.

  “대흠무가 구국으로부터 300리 되는 홀한하 동편의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欽茂 徒 上京 直 舊國 三百里, 忽汗河之 東.”

  752년 대흠무의 상경 천도 이전의 발해 왕도는 대조영의 홀한성으로서 장춘시 관성자(寬城子)다.

   

  발해의 상경홀한성을 찾는데 길잡이가 되는 홀한하가 곧 송화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먼저, 홀한(忽汗)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호란(呼蘭)이라는 물이름 또는 지명은 송화강의 줄기에서 모두 세 군데에 보인다. 첫번째는 반석과 화전의 사이로서 호란진이 호란하라는 물 위에 있는데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두번째는 흑룡강성 오상의 옆으로 흐르는 호란하가 있다. 세번째는 하얼빈에서 송화강을 건너가면 호란현이 있다. 이 세 호란이 바로 발해의 홀한하를 증거하고 있는것이니 홀한하는 송화강의 옛이름인 것이다.

  이 홀한하의 옛이름은 속말수이고, 발해의 홀한하를 거쳐서 여진 시대 이후에 휘발하가 되었으며, 그 하류는 압자하라고도 부르고 혼동강이라고도 부르던 송화강이다. 반면에 동경성 일대는 몰안강(牧丹江)이다. 홀한강과 몰안강은 다른 것이다.

  홀한의 어원은 고주몽의 홀본이다.

 

  따라서 대흠무가 천도한 상경은 발해 구국 북쪽 300리로서 흑룡강성 아성시 백성자다.

  아성시 백성자는 이미 금나라 상경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발해 상경터였다.

 

  금나라 상경터 발굴도를 보면 [ㄴ] 자인데 두 개의 성터가 겹친 것이다.

  금나라 상경 기록에 의하면 산채를 짓고 살다가,

  서남방에 아골타 묘(지도중 금태조묘)를 만들고
  후에 남북 쌍성을 세워 아골타묘를 이장했다가 도로 원위치했다.

 

  즉 북성이 처음부터 황성이었다.

  그런데 북성과 남성을 나누는 중앙 성벽을 보면 옹성문이 남쪽으로 향했다.
  남북 쌍성이 되고도 북성이 여전히 황성이다.

  그런데 남쪽 성에 분명한 황궁터가 또 있으니, 이는 금나라 황궁이 아니라 발해 황궁일 수밖에 없다.

  즉 가로로 직방형인 발해성이 허물어지고서 그 북방에 금나라 아골타가 성채를 짓고 살다가

  발해 상경성을 포함하는 남성을 다시 만들어서 남북 쌍성으로 다시 만들었다.

 

  발해 상경내 황성은 동경성의 황성(아래 그림)과 거의 같은데
 상경의 내성은 외성의 서쪽 부분이고 동경의 내성은 중앙 북쪽인 것만 다르다.

 

 

금나라 상경성...왼쪽의 혹은 아골타묘다
여기서 남성만 잘라보면↗

금나라 상경의 남성은 발해 상경(2148M X 1523M)

발해 상경내 황성(645M x 500M)터를 볼 수 있다.

이 황성이 금나라 황성이려면 황성이 북성에 있거나
남북성을 가르는 중앙벽 옹성문이 북향으로 나야 한다.

상경내 황성은 동경성의 황성(아래 그림)과 같은데
상경의 내성은 서쪽이고 동경의 내성은 북쪽이다.

 

       발해 동경성과 비교해보자

 

발해 동경성 평면도
중앙 북쪽이 내성과 황성이다.

 

발해 동경성내 내성과 황성/ 상경 황성과 거의 비슷하다

 

  2> 용주(龍州)는 상경, 즉 아성시 백성이다. 성둘레는 남성만으로 보아서 10300M 내외다.

   상경 서남 30리에 석루성(石婁城)이 있었다.  [송막기문]에서 성둘레 5리의 고숙신성이라고 하였다.

   [송막기문]에서 금나라 상경도 거리 설명중의 서루성(西樓城)과 동일한 성으로 고려된다.

  

  3> 호주(湖州)

  발해 호주는 요나라가 호주 흥리군(湖州 興利軍)과 장경현(長慶縣)을 다스렸다. 아성 동쪽 연수(延壽) 흑룡궁 부근으로 추정된다. 요나라 고주(古州), 금나라 곡주(谷州)가 있었다.  

 

  4> 발주(渤州)

  발해 발주는 요나라가 청화군(淸化軍)과 공진현(功珍縣)을 두었다.

  발해 구국이었던 유수현 대파고성으로 고려된다.



4장. 용원부 동경성, 경주(慶州), 목주(穆州), 염주(鹽州), 하주(賀州)

 

  흑룡강성 영안현에 위치한 발해 동경성터다.

  동경성은 성둘레가 17500m 정도다. 내성은 성둘레 4500M다. 황성은 2500M 정도다.

  동경성터에서 상경(上京)이라고 새겨진 벽돌과 기와가 각각 발견되었다. 발해 대흠무왕이 짓고 천도할 때에는 새로운 상경성이었다.

  그러나 화여왕 때에 옛 상경으로 돌아오니 다시금 동경성으로 바뀐 것이다.

  [신당서]<발해전>에서 다음 기록이 있다.

  흠무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으니 친척인 원의가 왕이 되었다. 그해 원의가 의심이 많으니 국민들이 그를 죽이게 되었다.

  굉림의 아들 화여를 왕에 세우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欽茂子 宏臨早死 族弟 元義立 一歲 猜虐 國人殺之

  推 宏臨子 華璵爲王 復還 上京

 

  이 호주 동경성은 다른 말로 용원부이고

  한때 호주 동경성이 발해 상경성일 때의 또다른 발해 동경성은 책성부다.

  이 호주 동경성은 외성이 37리이고 내성 둘레는 9리이며 황성 둘레는 5리이다.

  또한 부근 성터에서 발해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물한주 겸 삼왕대도독지인 勿汗州 兼 三王 大都督之印”이 나왔다.

  물한주는 물이 많은 주라는 뜻이 되는데 경박호와 관련된다.

  동경성은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벽곡현(壁谷縣), 웅산현(熊山縣), 백양현(白楊縣) 등

  6현을 다스렸다.

 

 

  발해의 동경성 시대는 당나라 정원 때였으니 785년 이후 794년 이전이다.

  대흠무왕 즉위 50년인 787년 경으로 추정된다.

  대흠무왕은 즉위초에 대흥(大興)이라는 연호를 세웠다가 774년 보력(寶力)으로 개원했다.

  이 시기에 777년 2째딸 정혜공주를 돈화(敦化)의 육정산(六頂山)에 묻은 것이다.

  돈화는 뒤에 발해 독주주의 하나인 동주(銅州)가 되었고 돈화의 오동산성(敖東山城)은 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돈화의 오동산성은 석성으로서 성둘레는 4리이다.


  한편 대흠무왕은 다시 개원하여 대흥보력(大興寶力)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그 원년은 즉위 당시를 기산점으로 하고 있는 실정이나, 개원한 보력에서 다시 대흥보력으로 연호를 되바꾼 시기는 알수 없다.

  2> 경주(慶州)

  경주는 흑룡강성 녕안현 동경성이다.


발해 불상

 

발해 자기


정효공주 묘실 벽화


정효공주묘비

 


정혜공주묘 사자석등


쌍용문 동경


쌍어문 동경

 

  경주(慶州)는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웅산현(熊山縣), 벽곡현(壁谷縣),백양현(白楊縣) 등이 있었다.

  용원현은 영고탑으로 추정한다.

  발해 백양현(白楊縣)은 장안산성으로부터 서남으로 1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화룡현(化龍縣) 용수진(龍水鎭) 남쪽 양목정자산산성(楊木頂子山山城)으로 추정한다. 둘레가 2680M이다. 부근에서 발해 문왕의 네째 딸, 정효공주묘가 발굴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그녀가 묻힌 곳은 염곡(染谷)이었다.

  2> 목주(穆州)


  [요사지리지]에서 목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었다. 즉 요나라 목주는 이름만 발해 목주이고 그 땅은 발해 회농군에 설치한 것이다.

  발해 목주는 동경성 동쪽 목릉(穆稜)으로 추정된다.


  3> 염주(鹽州)


  [요사지리지]에서 염주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염주(鹽州)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 거리이다.

  역시 이름만 발해 염주이고 땅은 용하군 땅이다.

  발해 용원부 염주는 연길시(延吉市)로 추정된다.


  4> 하주(賀州)


하주는 혼춘시(琿春市) 부근으로 추정된다.


  5> 천정군(泉井郡)
 

  천정군(泉井郡)은 신라와 발해의 전쟁으로 알려졌다. 이 전쟁은 733년 말과 734년 초에 걸쳐서 있었다.

  본래는 732년 발해가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침범한 데 대한 당나라의 보복으로 시작된 전쟁인데, 당나라 현종의 사주를 받아서 김유신의 손자 김윤문(金允文) 등을 앞세워 신라와 발해의 연합군이 발해의 동남쪽을 치고 올라갔다가 폭설로 인하여 수많은 동사자만 내고 물러간 곳이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의 패인이 정말 폭설 때문이었는지는 발해의 입장이 밝혀져 있지 않아 단정할 수 없다.

  이 전쟁 후에 확정된 양국의 동해안 국경은 니하(泥河)라고 하는데, 강원도 오대산의 진고개에서 흘러내리는 연곡천을 당시의 니천으로 보고 동해안의 국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말 “질다”에서 파생된 부사 “진-물”을 한문으로 바꾼 것이 니천인 것이다.


  발해 천정군(泉井郡)은 함경남도 원산시 서북쪽 교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덕원(德原)도호부는 고구려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고려시대 용주(湧州)가 되었다고 하였다.

  신라 때에 정천군이라고 부른 적도 있는데 정천성은 덕원부 북쪽 15리에 석성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4300척으로서 1470M 내외였다.

  현재 원산시의 덕원리, 용주리 동북쪽에 위치한 문천시 거령산 남쪽 고성리(古城里)가 천정군 고성의 위치이다.

  5장. 서경 압록부(西京鴨淥府) 신주(神州), 환주(桓州), 정주(正州), 풍주(豊州)


  서경 압록부는 압록강에 있었는데 그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遼河)다.

 

압록강이 요하인 증거들

 

1)[원사지리지]<동령로>(현재 대동강 평양에 설치한 관청)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拔平壤),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옛 평양이 아니다."

즉, 결론은 지금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옛 평양이 아니며, 고대 압록수는 현재 대동강 평양에서 서북으로 천리니
현재의 요하가 당시 압록수였고 그곳 요하 변에 조선이고 낙랑이며 평양이 있었다.


2)[삼국유사]에서 고국원왕은 안시성(安市城)으로 천도했고 이는 환도성이었다고 했다. 또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요수는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서도 안시성이 환도성이다. 


3) 대동강 평양에서는 6세기경에 고구려인에 의해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 (刻書)]가 발견되었는데 평양이라는 말은 없고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4) 연개소문 차자로서 대막리지였던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즉, 고구려가 패망한 대동강의 마지막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이제 [신당서]의 압록강인 요하를 600리 거슬러 올라가 구도현성, 즉 고구려 환도성을 찾는다.

철령시 최진보 관음각 산성이 고구려 환도성, 즉 안시성인 증거들

1) 다음은 [신당서]<도리기>에 나오는 지리 설명이다.
압록강 입구에서 600리에 구도현성, 옛 고려왕도가 있었다.
여기서 이백리를 더가면 신주다.

自鴨淥江口 舟行 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 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 東北泝流 二百里 至神州.

2) 이에 대해 [요사]<지리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환주(桓州)는 고려때 도성이었고, 환도, 신향, 기수 3현이 있었다. 산상왕이 여기로 옮기니 신국이라고 불렀고, 고국원왕 때에 불탔다.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 三 桓都 神鄕 淇水縣, 高麗王於此 國人謂之新國 剏立宮闕 五世孫剑 宮室焚蕩.

 

3) 이 환주, 구도성 위치는 철령시 20km 동남쪽, 범하(汎河) 북쪽의 최진보 관음각산성(성둘레 7000M 석성)과, 범하의 남쪽 청룡산성(성둘레 4000M) 일대다. 범하의 중국 발음은 환(fan)하다. 즉 환도성에는 환하가 흐른다. 지금도.

(아래 지도 참조)
 

4) 범하 아래 청룡산성 토성은 산상왕이 세우고, 위나라 장수 무구검(毋丘儉)에게 도륙 당해 불내성(不耐城)이라고 불린 환도성이다. <무구검전>에 불내성을 파훼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밭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범하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시 도읍할 수 없어서 동천왕은 평양성을 세웠다.

5) 이후 패전에 책임을 지고 범하의 북쪽 시하(柴河)에 동천왕이 자살하여 묻혔다. 신하들도 함께 자살하여 시원(柴原)이라고 불렀다. 그후 고국원왕이 안시성을 다시 세웠지만 고국원왕도 남쪽에서 패전하여 단웅곡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아래 지도 참조)

 

6) 위쪽 최진보 관음각산성, 즉 안시성은 그 북쪽에 당태종이 전장을 내려보던 당왕영산(唐王營山)이 서북에 있고, 산성의 동남에는 고구려후원군이 진을 친 고려영(高麗營)이 있다. [철령현지](鐵嶺縣志)에 소개되어 있다.
[주필산](
駐蹕山)은 철령 시내 동남 2리인데 청나라 황제의 주필산으로 소개되어 있다.
청나라 황제 이전에 당태종 때의 주필산인 것이다. 서북 조병산시(調兵山市)도 조필산(調
山)이었다.

 

7) 발해 환주의 3현은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3현이다. 환도현은 범하 북쪽 관음각 산성이 되고, 신향현은 범하 남쪽 청룡산성 일대가 되며 기수(淇水)은 개원시(開原市)가 된다.
개원시 청하(淸河)는 [후한서]에서 패수(浿水)였는데
고구려 때 장수왕의 장안성 천도로 새로운 패수가 생겨나서 기수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이며
발해때는 압록수여서 지금도 청하 남쪽가지 상류는 아록하(阿綠河)이며
개원시 서북쪽에 요나라 때 기주(祺州)가 있었고, 그후 도하(道河), 구수(寇水) 등의 이름이 붙었다.
 

8) 환주에서 200리 거리의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이다.
철령시 서풍현(西豊縣) 청하변의 양천진(凉泉鎭) 성자산산성인데 내외 쌍성으로 둘레 9000M다.
[요사지리지]에서 설명한 광륜 20리 석성(즉 성둘레 10000m)이라는 기록과 맞는다.
또한
아록하(阿綠河)가 흐르는 압록부이다.

 

고구려 고국이라하면 고국(故國)에 묻힌 신대왕(新大王)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있었다.
이 고국은 서풍현 낙선향 부근으로 고려되는바, 고구려 국내 위나암성(國內尉那岩)이다. (아래 지도 참조)


 
  한편 유리왕의 국내위나암 천도 이후로 신대왕까지 천도한 기록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수성왕 10년에 환도성을 국도로 삼은 증거가 수성왕 천도교서 갈석으로서 나타났다.

 

수성왕 천도교서 갈석

始祖之孫日月之子 承故夫余故邑

遂成王 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司吏玄菟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殊

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

年功 建國都 玄菟郡 紒継

 

수성왕=동서남북수=호영동백수=백제고구려수=백수

부여읍의 계승자 수성왕은

10년만에 동서남북총수(즉 백수)가 되어서

과거, 비류에 읍도를 세워

[호영동백수사사현도]라고 불러왔던

명제 축다(수성왕의 생부? 추존?)의 뒤를 이어서

(안구태장세예악으로) 백제고구려대표왕이 되어

추모왕의 천부를 대신하여 민태국안 하고

새로 국도를 건설하여 현도군을 계승한다.

 

 그런데 이 수성왕 묘지석은 동천왕, 중천왕 교서 갈석과 같이 나타났다.

동천왕 교서 갈석

正始武止

宮 不從 固諫 食蒿而死

殊 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往丸都 遣訖繼 造邑都

護位 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 宣

동천왕=궁=殊=殊麓酋 =백수

246년 위나라의 침입으로 도망한 동천왕은

굶어죽자는 신하들의 충간을 따르지 않고

망명에서 돌아와 국도에 몸을 받쳐

불내성에 살신 치성을 받치려했다

환도에 돌아와 흘계를 내보내어

새로 도성을 평양에 짓게 하고

왕위를 양위한다.
246년 왕 선포함.

중천왕 교서 갈석

正始武侵 宮百殊 固諫慾鎩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 麓酋

(委+台) 七年十月 繼明王

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殊

代天府祖鄒牟王 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

儉환峴岭 攻數千里 降士數千

國宮前臣高伏 儉鎩 城北 王盲

記天地之中銘存永世 隨登愿此碑永立

以傳百世紹示百殊城民

246년 동천왕은 죽기 위해 망명에서 돌아와
국도를 높이고 불내성에 살신 치성을 드렸다.
흘계를 보내어 읍도를 새로 세우도록 하고
녹추에게 양위하니
246년 10월에 선왕들을 이어서
[호영동국사현도비류]가 되어서
안태천세예악세 하고
백제고구려대표가 되어 추모왕의 천부를 대신하며 성민의 뜻을 따른다.
가을8월에 보기 이천 병사로 위나라장수 무구검과 환현령에서 싸워 수천리를 공격했고 항복한 적이 수천이었다.

동천왕의 신하들이 동천왕을 따라 자살하여 왕릉을 시체로 가렸으니,
이를 천지에 기록하여 시원에 이 비를 세워서 백세 후의 백성들에게 알린다.
(자살은 불내성 중의 빈소 앞에서 이루어지고,
옮겨 묻는 장례식은 2년뒤 시원에서 한 것이다.)

 

 세 교서 갈석이 같이 나타났으므로
 수성왕이 세운 환도성, 산상왕이 다시 세운 환도성과 동천왕이 자살한 불내성은 같은 곳이다.
 이 세 교서의 출토지점이 아직 도굴꾼들의 비밀이다. (당연히 범하일 것이다.)

 단 안시성과 국내성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환도성이 불내성이긴 하지만 환도성이 국내성은 아니다.

 

수성왕의 뒤를 이은 신대왕의 장자 발기가 비류수에 살았고, 신대왕은 국내위나암성에 도읍했다.

그러나 고국천왕 때에 요동왕 공손강이 쳐들어오고 다시 산상왕 때에 발기의 난이 있었는데
발기는 전사하고 발기의 아들은 투항하여 [구려]에 봉해졌다.

이때 산상왕의 승리는 요동국을 크게 밀쳐낸 것이고 그래서 다시 환도성에 도읍하였다.

 

bc.107년에 세운 1차 현도성은 옥저(沃低)에 있었다.
고리군왕 고진의 손자로 옥저후 불리지(弗離支)가 있었으니, 그의 성이 bc 108년에 낙랑군 불이성(不而城)으로 되는데
bc.107년에 1차 현도성을 두었다가 물러나가고
고구려는 수성왕이 현도를 계승하여 환도성을 두었건만 무구검이 침략해와서 불내성(不耐城)으로 되돌린 것이다.

 

9) 발해 신주 신록현(神鹿縣)은 서풍현 자리인데 서풍 이전 이름이 도록현(圖鹿縣)이었다. 압록에서 유래한다.
   발해 신화현(神化縣)은 이수현(梨樹縣) 자리다. 이수현 이전에 봉화현(奉化縣)이었다.
   발해 검문현(儉門縣)은 요나라 홍문현이 되었는데 그 위치는 확실치 않다.

 

10) 서풍현 낙선향(樂善鄕)에서는 철검이 껴묻힌 고분 70개와 고구려 초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스키타이 양식의 동패식도 많이 나왔다.
(아래 지도 참조)
50년대에 발굴 당시에 흉노 고분이라고 하다가 점차 선비 고분으로 바꾸었고,
지금은 부여 고분이라고들 말하는데 사실은 고구려 고국에 묻힌 고분들이다.
물론 고주몽이 처음 도읍한 곳을 부여라고 기록한 것도 있다. 수성왕도 마찬가지다.
낙선은 왕망이 낙랑을 새로 바꾼 이름이기도 하다.

 

11) 동천왕이 비류수에서 이기고도 양맥에서 위나라 무구검에게 패하여
마침내 환도성을 버리고 압록원을 거쳐 패주한 곳은, [동옥저전][무구검전]에 의하면
북옥저 매구루(買溝婁)인데 이게 오늘날의 매하구시(梅河口市)다. (아래 지도 참조)

 

12) 요나라 건국초에 망해버린 발해 압록부의 기병들이 반란하여 압록강에서 유격작전을 하였다.
이때 요나라가 추격하고 쫓아버리고 성을 세워 막았는데 휘발성(輝拔城)이다. 매하구시 동쪽 휘남현(輝南)에 있다.
이는 발해 압록강이 휘발성의 남쪽 집안 쪽이 아니라 휘발성의 서북, 동요하(東遼河)였다는 증거다.(아래 지도 참조)


13) 무구검의 부장 왕기가 천리까지 동천왕을 더 쫓아가서 소위 [무구검기공비]집안(集安)에서 발견된다.
무구검 침략 때의 기공비는 역사 기록에 숙신 남계(肅愼 南界)에 세웠다.
숙신 남계가 북옥저의 남쪽 집안성인 것은 틀림없지만
환도성에서 천리나 도망간 숙신 남계를 다시 환도성이라고 바꿀 수는 없다.

 

 

 

 

14) 이제까지 발해 압록부 환주, 환도성 등으로 치부해온 집안성(集安)은
 압록강구에서 600리가 아니라 400리 정도다.
 지도상에서 압록강구와 요양시까지가 350리인 것을 감안하면 쉽게 알 수 있다.

 

15) 집안의 산성이 약 6700m의 성둘레를 가졌다. 그 부근에서 가장 크다.
 하지만 압록부성은 성둘레가 10000m에 근접해야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상류에 그에 가까운 석성은 전혀 없다.
 

16) 요나라는 안시성민들을 빼서 요양 남쪽 탕지보로 옮겨 철주(鐵州)라 불렀고,
그 자리에 요동의 양평인들을 배치하여 귀덕주(歸德州)를 두었다가 금나라 때 무순으로 옮겨가고 빈 성이 되었다.

 

 결론적은 집안은 북옥저였고, 고주몽 때부터 고구려에 복속했으며
 343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 수도가 된 평양 동황성이었다.
 집안에서 발굴되는 진(晉)나라가 고구려에 하사한 관인(官印)을 보면 당시 고구려 도성이 확실하다.

 따라서 동천왕이 지은 평양성, 후에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은
 집안 서쪽으로 보아서 환인현 오녀산성이다.  
 고국원왕이 먼저 백제의 치양(단동시 관전현)을 침공했다가
 거꾸로 백제의 보복 침공으로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전사한다.

 

 

  서경 압록부에는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 4주가 있었다.

  

  1>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이다.
  철령시 서풍현(西豊縣) 청하변의 양천진(凉泉鎭) 성자산산성인데 내외 쌍성으로 둘레 9000M다.
  [요사지리지]에서 설명한 광륜 20리 석성(즉 성둘레 10000m)이라는 기록과 맞는다.
  또한
아록하(阿綠河)가 흐르는 압록부이다. 

  유리왕의 양곡(凉谷)과 동서 양성이 기록에 있다.

 

   발해 신주 신록현(神鹿縣)은 서풍현 자리인데 서풍 이전 이름이 도록현(圖鹿縣)이었다. 압록에서 유래한다.
   발해 신화현(神化縣)은 이수현(梨樹縣) 자리다. 이수현 이전에 봉화현(奉化縣)이었다.
   발해 검문현(儉門縣)은 요나라 홍문현이 되었는데 그 위치는 확실치 않다.

 

양천 성자산산성

 

  2> 환주(桓州)


  환주(桓州)는 고려때 도성이었고, 환도, 신향, 기수 3현이 있었다. 산상왕이 여기로 옮기니 신국이라고 불렀고, 고국원왕 때에 불탔다.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 三 桓都 神鄕 淇水縣, 高麗王於此 國人謂之新國 剏立宮闕 五世孫剑 宮室焚蕩.

 

  환주, 구도성 위치는 철령시 20km 동남쪽, 범하(汎河) 북쪽의 최진보 관음각산성(성둘레 7000M 석성)과, 범하의 남쪽 청룡산성(성둘레 4000M) 일대다. 범하의 중국 발음은 환(fan)하다. 즉 환도성에는 환하가 흐른다. 지금도.

 

  발해 환주의 3현은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3현이다. 환도현은 범하 북쪽 관음각 산성이 되고, 신향현은 범하 남쪽 청룡산성 일대가 되며 기수(淇水)은 개원시(開原市)가 된다.
 

  3> 풍주(豊州)


  풍주는 발해 반안군(盤安郡)이었는데, 녹주의 동북 210리다.

  이는 발해 풍주를 요나라가 발해 반안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즉 녹주 동북 210리는 요원시 반석현 부근인데, 이는 대조영의 동생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의 봉지다.

  발해 풍주와 안풍현(安豊縣)은 압록하의 발원인 현재의 요원시(遼源市)로 추정된다.

 

  4> 정주(正州)


  정주는 녹주의 서북 380리로서 비류왕 고지라고 하였다. 쌍료현(雙遼縣) 동명향(東明鄕)이다. 백우유지(白牛遺址)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온다.  

 

 

  6장.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홀한주(忽汗州)

  1>현주(顯州)

 

  [신당서]에서 발해 중경 현덕부는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등 육주를 다스렸다고 한다. 홀한성은 고구려어 이고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현주인 것이다.

  고탐의 [도리기]에서 장춘시 위치를 천보 때 발해 수도 중경현덕부 현주(顯州)라고 했다.

  장춘시가 바로 [도리기] 중의 상경 용천부의 600리 서남이며, 압록부 서경에서 400리 거리다.

  장춘시는 현재 공개적으로 숙신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현주는 장춘시 관성자로 추정된다. 관성자는 성둘레가 22리, 약 11000m였다. 현주는 포(布)가 유명했는데 포다현(布多縣)과 관련되며 덕혜현(德惠縣) 포해향(布海鄕)으로 추정된다.

  장녕현(長寧縣)이 있었는데 요나라 영주로 데려갔다.

 

 

  2> 노주(盧州)

  [요사지리지]에서 발해 노주 설명은 발해 삼로군 설명이 되어 있다.
  [신당서]<발해전>에서는 발해국 노성의 벼(盧城之稻)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화전현(樺甸縣)으로 추정된다.

 

  3> 탕주(湯州)

  탕주에 대한 [요사지리지]의 기록은 5현이 있었는데 영봉현(靈峰縣), 상풍현(常豊縣), 백석현(白石縣), 균곡현(均谷縣), 가리현(嘉利縣) 등이다.

  탕주는 이통(伊通)현으로 추정된다.

  탕주의 영봉현(靈峰縣)은 이통시 대고산진으로 추정된다.다.

  백석현(白石縣)은 이통현 서북 백석구로 고려된다.

 

  4> 흥주(興州)

  [요사지리지] 흥주 기록은 발해가 3현을 두었는데 성길현(成吉縣), 산산현(蒜山縣), 철산현(鐵山縣) 등이다.

  발해 흥주는 길림시로 추정된다.

  성길현(成吉縣)은 영길현으로 추정된다.

 

  5> 철주(鐵州)


  [요사지리지] 철주 기록은 4현을 두었는데 위성현(位城縣)과 하단현(河端縣), 창산현(蒼山縣), 용진현(龍珍縣) 등이다. 위성지철이 유명했다.

  철주는 구대시(九臺市)로 추정된다. 동북방 상하만(上河灣)진에 고구려 유적지가 많은데 철산지이기 때문이다.

  발해 위성현(位城縣)은 상하만(上河灣)진으로 추정된다.

  발해 하단현(河端縣)은 송화강 강 하류인 덕혜현 조양향(朝陽鄕)으로 추정된다.

 

  6> 영주(榮州)


  발해 영주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공주령시(公州嶺市) 진가둔 고성(秦家屯 告城)로 추정된다.
  발해 황제 대조영(榮) 대진국(辰國) 성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 즉 1차 홀한성이다.

  대조영과 관련되고 고주몽(홀본동강)과 관련되어서 신집(新集)성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장춘시 관성자는 훗날 지어진 중경으로 보인다.

 


  7장. 남경 남해부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 (椒州)

       

  1> 남경성 옥주


  다음은 발해 남경 남해부 해주에 대한 [요사지리지] 기록이다.

“해주는 고구려 남해군이었다. 옥저의 수도였고 고구려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발해는 남경 남해부를 두었다. 석성을 세웠다. 성의 폭은 9리이다. 발해 남해부는 3주를 다스렸는데 옥주, 정주, 초주이다. 6현이 있었는데 옥저, 취암, 용산, 빈해, 승평, 영천 등이고 요나라는 하나로 통합하여 임명현이라고 하였다.

  海州. 高麗 南海軍. 沃沮 故地, 高麗爲 沙卑城, 渤海 南京 南海府. 疊石爲城. 幅員 九里 領 三州. 沃州, 睛州, 椒州.

  古 六縣. 沃沮, 鷲巖, 龍山, 賓海, 昇平, 靈泉.  統一縣, 臨溟縣.”

 

  발해 해주성은 대연림의 동경 요양 반란 때에 1년을 넘겨가며 저항했는데 해성이 포하(蒲河)와 수산(手山) 사이에 있었다.  4500m의 석성은 무순시 고려산성이 오로지다. 남쪽 해성시의 영성자산성은 석성이 아닌 토성이고, 개주시 청석령산성은 5000m정도다. 옥저, 취암, 용산, 빈해, 승평, 영천 등은 무순시와 서남 등탑현, 동남 무순현, 청원현, 신빈현 일대로 추정된다.

  

  여기서 꼭 고려할 것이 있다. [요사지리지] 요주 암연현 기록이다.

  “요주는 발해 초주였다. 동북으로 이백리 거리에 해주가 있다.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초산, 초령, 사천, 첨산, 암연현 등이다. 요나라는 하나로 통합하여 암연현이라고 하였는데 고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에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접했다.

  耀州: 渤海 椒州. 古 五縣.  椒山, 貂嶺, 斯泉, 尖山, 巖淵.  統一縣. 巖淵縣. 東界 新羅, 故平壤城 在縣 西南.”

  초주는 동북으로 해주까지 200리며, 초주 암연현은 동북으로 해주까지 120리이다.

 

  오늘날 요나라 요주 고성으로 고려되는 곳은 훨씬 남쪽 대석교시다. 그러나 발해 초주였던 요나라 요주는 본래 요양시 안평 부근에 있었다. 몇년 뒤, 요나라가 요주 관할의 요양 땅에, 요나라 [남경성]을 새로 건설하면서, 요주가 떠밀려 대석교까지 내려간 것이다. 이때 요나라 노주나 철주 등도 함께 떠밀려 갔다.

  초주 암연현은 암주성(岩州城) 혹은 연주산성(燕州山城)이라고 했던 요양시 동북방 60리 서대요진(西大窯鎭)의 석성이다.

 

  장수왕이 도읍했던 고평양성은 연주산성의 서남으로서 요양시 동북방 동경릉 일대다.
  동명왕릉은 요양시 동쪽 30리 동명산에 있었다고 원일통지 등에 전해온다.

  요주의 초산, 초령, 사천, 첨산 등 4현은 요양시 궁장령구 안평부터 천산 동쪽과 본계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발해 남해부 해성인 무순시(撫順市) 고려산성(高麗山城)

 

 

  2> 정주(睛州)


  [요사지리지] 정주 기록은 다음과 같다.

“빈주는 발해 정주였다. 5현이 있었는데 천정, 신양, 연지, 랑산, 선암 등이며 모두 폐지했다.

  嬪州 本 渤海 睛州, 古 五縣, 天睛. 神陽. 蓮池. 狼山. 仙巖. 皆廢”


  빈주는 남경 서북으로 120리에 외롭게 옮겼다. 본래 발해 정주는 무순시 서북쪽 포하성(蒲河城)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천정현(天睛縣), 신양현(神陽縣), 연지현(蓮池縣--포하진 동북 蓮花池), 낭산현(狼山縣), 선암현(仙巖縣)은 무순시 북쪽에 분포했을 것이다.

 

  3> 초주(椒州)


  [요사지리지] 초주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요주는 발해 초주였다. 동북으로 이백리 거리에 해주가 있다.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초산, 초령, 사천, 첨산, 암연현 등이다. 요나라는 하나로 통합하여 암연현이라고 하였는데 고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에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접했다.

  耀州: 渤海 椒州. 古 五縣.  椒山, 貂嶺, 斯泉, 尖山, 巖淵.  統一縣. 巖淵縣. 東界 新羅, 故平壤城 在縣 西南.”


  초주(椒州)는 요양시 동쪽 하란진(河蘭鎭) 부근이다. 암연현(巖淵縣)은 요양시 동쪽 석성, 연주산성이다.

  초산현(椒山縣), 초령현(貂嶺縣), 사천현(斯泉縣), 첨산현(尖山縣)은 본계시와 천산 동쪽 요양시 부근이다.

 

  4> 사비성(沙卑城)

  청나라 때 팔기 목장 중 하나인 [비사 목장] 비문이 요양시 서쪽 사령에서 나왔다. 요양시 서쪽에 비사성이 있었을 수 있다.

  요양시는 고구려 구려(勾麗)현, 발해 상락(常樂)현과 금덕(金德)현이었다. 태자하를 사이로 동북은 평양이 있던 구려(勾麗), 상락(常樂)현이고 서남은 금덕사가 있던 금덕현으로 고려된다.

 


  5> 토호포(吐號浦)


  [속일본기]에 발해 남해부 토호포(吐號浦)에서 사절들이 일본으로 출발한 기록이 있다. 현재 알 수 없다.
  [신당서]<발해전>에 “남해 신라도(南海 新羅道)”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발해의 남해부에서 압록강을 건너 신라로 진입한 것이다. 남해 신라도가 동해안이라면 동해안의 일본도와 구별되지 않는다.

 

  발해 남해부 남쪽은, 즉 요양시 남쪽은 더이상 발해 주현(州縣)이 없고 훗날의 발해 군현(郡縣)이 있었다. 이는 고덕무의 후고구려가 700년부터 820년까지 존재했기 때문이다. 대인수황제가 후고구려를 흡수한 뒤에 그 땅으로 새로운 군현을 만들었다.

 

  8장. 부여부 부주, 선주(扶餘府, 扶州, 仙州)

 

  1> 부주(扶州)


  발해 부여부는 부여고지이다.

  [요사지리지]는 장춘시 북쪽 농안(農安)을 부여부 성으로 기록했다. 요나라는 황룡부 용주를 두었다.

  농안현 고성에서 발해 유물이 발굴되었고 그 북쪽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이 세운 천리장성을 찾아냈다고 한다.

 

  2> 선주(仙州)

  선주는 알수 없다. 서남쪽 쌍성보진(雙城堡鎭)으로 고려된다.


  발해 강수현(强帥縣)과 발해 신안현(新安縣)을 합쳐서 요나라 귀인현(歸仁縣)이 되는데, 귀인현은 [금사지리지]에서 세하(細河)의 남쪽이라 하였으며, 세하는 파라포와 이통하를 연결하는 물로 추정한다.

  발해 강수현(强帥縣)은 농안현 화인성(和人城)으로 추정한다.

 

  9장. 정힐부(鄭詰府; 鄚詰府), 정주(鄭州; 鄚州), 고주(高州)


  1> 정주(鄭州)


  발해 정힐부(鄭詰府; 鄚詰府)에는 정주(鄭州; 鄚州)와 고주(高州)가 있었다.

  발해 정힐부는 고구려 막힐부의 후신이며 이에 대한 [요사지리지]의 기록은 두 군데에 있다. 하나는 동경도 관할 한주(韓州)의 기록이고 또하나는 한주와 가까운 상경도 봉주(鳳州)의 기록이다.

  1)한주는 고리국의 유하현이 있었다. 고구려는 막힐부를 두었다. 발해 역시 막힐부라 하였다. 요나라 태종은 삼하, 유하 2주로 다스렸고 성종은 유하현 하나로 통일하였다. 유하현은 발해 오희현 땅이었고, 거기에 발해 만안현을 더한 것이다.

  韓州: 本 槁離國 舊治 柳河縣. 高麗治 鄚詰府. 都督 鄚,詰 2州. 渤海因之 今廢. 太宗 置 三河, 楡河 二州. 成宗 倂 二州置. 統縣一.

  柳河縣: 本 渤海 奧喜縣地 倂萬安縣置.”

 

  즉 요나라 첫번째 한주 치소가 고구려 막힐부 치소 막주다.

  내몽고(內蒙古) 통료시(通遼市) 과이심좌익후기(科爾沁左翼後旗) 호단(浩但)이 첫번째 한주 성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단의 탑목격월고성(浩坦塔木格月古城)은 호단 동쪽, 당니하 남안(位于苏木东塘尼河南岸)에 있고 동서 800m,남북 650m의 성인데 (东西长 800 米,南北宽 650 米) 요나라 한주 첫번째 성터 유적이다.(系辽代韩州第一筑城遗址)

   막주(鄚州)는 호단으로 비정되고 정주(鄭州)는 쌍료현 정주(鄭州)로 비정된다.

   2>고주(高州)

  [요사지리지]에서 봉주는 고리국의 옛 수도로서 발해의 안녕군 경계에 있다. 남왕부의 오장 분지이다. 한주로부터 북쪽으로 이백리에 있다. 봉주에서 상경은 구백리이다.
  鳳州, 槁離國 故地, 渤海之 安寧軍境. 南王府 五帳分地. 在韓州 北二百里, 西北至 上京 九百里

  고주는 통료시 구리(歐里)로 비정되는데 한주 북쪽 200리가 고리국(槁離國)고지(故地)로서 요나라 봉주였기 때문이다.
  고리국은 졸본부여 수도였다.

 

   10장. 안원부(安遠府),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부(安遠府)라 하였고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등 4주를 다스렸다.

  

  1>영주(寧州)는 영고탑(寧古塔)으로 추정해온 옹우특기(翁牛特旗)다.

안원부 4주 중에서 유일하게 [요사지리지]에 기록이 남아 있는 모주(慕州)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주(慕州)는 발해 안원부(安遠府地)이다. 발해는 모화(慕化), 숭평(崇平) 2현을 두었지만 폐지하였다. 녹주(淥州)의 서북 이백리에 있다.”이는 옮겨간 것이다.

  모주는 해모수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북부여 도성 위치로 고려되고 무엽산과 관련하여 아로과이심기 천산이다.

 

  미주(郿州)는 나만기(奈曼旗) 청룡산진(靑龍山鎭)으로 추정한다.

  상주(常州)는 과이심좌익후기 감기하(甘旗下) 동쪽 상승(常勝)으로 추정한다.

 

 

   11장. 장령부(長嶺府)  하주(瑕州), 하주(河州)

 


  1> 하주(瑕州)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서 장령부는 난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발해 장령부(長嶺府)에는 하주(瑕州)와 하주(河州)가 있었다.

  또한 장령은 영주도(營州道)로서 육로로 당나라 영주에 제일 가까운 곳이다.

  하주(瑕州)는 적봉시(赤峰市)로 추정된다.

 

  2>하주(河州)

 

  하주(河州)는 적봉시 영성(寧城) 흑성자(黑城子)로 추정한다.

 

 

  12장. 동평부(東平府)

 

  

  1> 이주(伊州)


  발해 동평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요사지리지]의 기사는 요주와 기주, 그리고 자몽현에 관한 세 기사인데 해석하기 쉬운 순서대로 본다.

  1) 요주(遼州)는 본래 불열국성(拂涅國城)이었는데, 발해는 동평부(東平府)라고 하였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친정할 때에 이세적(李世勣)이 요성을 함락시켰다.

  당 고종이 정진(程振)과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고려 신성(新城)까지 토벌할 때에 여기서 고려군을 대파시켰다.

  요 태조가 발해를 칠 때 이 동평부를 먼저 치고 주민들을 옮겼다.

  발해 동평부는 이(伊),몽(蒙),타(陀),흑(黑),북(北) 등 5주와 18현을 다스렸으며 모두 폐지되었다.

  이 곳에는 요하(遼河), 양장하(羊腸河), 추자하(錐子河), 사산(蛇山), 랑산(狼山), 흑산(黑山), 건자산(巾子山) 등이 있다.

  요나라는 1주와 2현으로 다스렸다. 2현은 요빈현(遼賓縣)과 안정현(安定縣)이다.

  2)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나라 루방현(鏤方縣)이었다. 후에는 불열국(拂涅國) 동평부(東平府) 치소였고, 자몽현이라 하였다.

  뒤에 요성(遼城)으로 동평부를 옮겼고 황령현(黃嶺縣)과 함께 소속해 들어갔다. 발해는 다시 자몽현이라고 하였다.

  요빈현(遼賓縣)은 신민시에 요빈탑(遼賓塔)이 있는데 중국에서도 요나라 요성주와 요주 요빈현의 위치로 비정한다. 금나라 때에 요주를 폐지하고 요빈현만 두었는데 요나라 관리였던 요빈주부(遼賓主簿)의 유물이 현지에서 발견되었다.


  [무경총요(武經總要)]에서 요나라 쌍주(雙州)가 요나라 요주의 동쪽 70리이며, 동시에 심양의 북쪽 70리이고, 철령의 서쪽 60리이다. 쌍주는 철령, 심양으로부터 법고현 쌍대자진 고성자향으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비정되었다.

  그 서쪽 70리의 고구려 요동성은 요빈탑(遼賓塔) 위치다. [삼국사기]에서 한나라 양평현지라고 하였는데 양평현성이 매우 가깝다.

 

  2> 몽주(蒙州)


  기주(棋州)는 본래 발해의 몽주(蒙州)였다. 기주는 요나라 묘비로서 강평현 소탑자(小塔子) 고성으로 고증되었다.


  3> 흑주(黑州)  


  발해 흑주(黑州)는 흑산현(黑山縣)으로 추정한다.


  4> 타주(陀州; 沱州)


  발해 타주(陀州)는 신민시(新民市) 양산진(梁山鎭)으로 추정한다. 한나라 양평현이었다.


  5> 북주(北州)


  발해 북주(北州, 比州)는 의현 서쪽 북표(北標)로 추정된다.



 13장. 정리부(定理府), 반주(潘州), 정주(定州)  


  1> 정주(定州)

 

  정리부(定理府)는 읍루고지(邑婁故地)다.

  [요사지리지]의 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다.

  1. 심주(瀋州)는 읍루국지(挹婁國地)이며 발해는 심주(瀋州)에 9현을 두었으나, 요나라는 폐지하고 2현을 남겼다. 요나라는 낙교현(樂郊縣), 영원현(靈源縣)을 두었다.

  2. 정리부자사(定理府刺使)는 읍루국지에 있었다.

  3. 쌍주(雙州)는 읍루고지이고, 발해는 안정군(安定郡)을 두었는데, 요나라 태종을 따라다니던 구리승왕(漚里僧王)이 진주(鎭州)와 정주(定州)의 백성을 옮겨 만들었다.

  쌍성현(雙城縣)을 두었는데 이는 발해 안이현(安夷縣)의 자리이다.

  4 동경요양부 서문에서 요양에서 북쪽으로 읍루현을 지나 범하까지 270리라고 하였다.

 

  정리부자사는 읍루국지에 있었다고 하는 바, 청나라 학자 이신유는 철령 서남 60리에 성곽둘레 3리의 읍루고성이 있었다고 하고, 발해 동모산은 이 부근의 천주산(天柱山)의 옛이름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발해 보산현(保山縣)이 있었기에 동모산으로 오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산현은 대보산(大寶山), 소보산(小寶山)으로 추정하는데 범하(汎河)의 상류다.

 

  정주(定州)는 철령시(鐵嶺市) 남계(南界)인 의로(懿路)로 추정한다.

  정리현(定理縣)은 발해 정주 교외로서 심양시 신성자구(新城子區)로 추정한다.

  안정현(安定縣)은 심양 서쪽 신민시 고대자(新民市 高臺子)로 추정한다. 발해 안정군이 되었다가 요나라 때에는 요주(遼州; 高句麗 遼東城, 요빈탑)에 속한 안정현이 되었다.

  모미현(慕美縣)은 [신당서]의 마미주(磨米州)로 바뀌었다. 삼도강자진(三道崗子鎭)으로 추정한다. 랑미포(狼尾浦)가 마미(馬尾)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북쪽에 마호산(馬虎山)이 있어서 마미포가 본말일 수 있다.

 

2> 반주(潘州)  

  더욱 가치있는 기록은 [원일통지(元一統志)]에 있다. [요서지리지]에 생략된 심주의 9현이 기록된 것이다.

  발해 정리부는 정주, 심주와 정리현(定理縣), 평구현(平邱縣), 암성현(巖城縣), 모미현(慕美縣), 안이현(安夷縣), 심수현(瀋水縣), 안정현(安定縣), 보산현(保山縣), 능리현(能利縣) 등 9현을 다스렸다.

  안이현(安夷縣)은 요나라 쌍주 위치로서 쌍성현령의 비문이 새겨진 신성자구 석불사향(石佛寺鄕)으로 고증되었다.
  심주는 심양시고 심수현은 심양시 남쪽이다.
  
심수현(瀋水縣)은 심양 남쪽 혼하보로 추정된다.

  평구현(平邱縣)은 심양시 우홍구(于洪區) 평나(平那)로 추정한다.

  암성현(巖城縣)은 고구려 백암성으로서 당나라에 함락당해서 당나라 암주가 되었었다. 암성현은 요서의 거란 지역에서 뽑아내서 심주에 옮겨 속하게 한 것이다.(拔屬沈州)
  암성현과 능리현은 알 수 없다.

  

 

  14장. 안변부(安邊府) 안주(安州), 경주(瓊州)

  [한단고기]에서 발해 안변부(安邊府)는 장백(長白)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고, [신당서지리지]에서는 안주(安州)와 경주(瓊州)가 있었다고 한다.

  발해 안변부는 이제까지 소련 연해주로 추정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흑룡강성 보청현 요력하(撓力河, 우수리강 지류) 하류 남안의 소가하(小佳河)에서 발견된 발해 시대 고성을 발해 안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발해 주현의 성으로서는 너무 작은 규모이다. 또한 이곳은 발해 철리부 지역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발해 공격 때에 천정군을 지나서 책성부, 즉 동경용원부로 닿았으므로 안변부는 한반도에 없다.
  또한 안변부가 신라도나 일본도가 아닌 것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2> 경주(瓊州)

  발해가 현재의 동경성에 천도하기 전에

  고구려 경주(慶州)가 있었고, 책성부라고 했었는데
  그 위치로서 훈춘시(琿春市) 춘화향(春化鄕)의 성장립자산성(城墻砬子山城)이 고려된다.
  석성이면서 둘레 20리의 대성이다. 동경성이어야만 하는 규모이니 동경성으로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주(安州)


  동녕(東寧)으로 추정한다. 동녕에는 돌궐국의 왕실이 피난하여 들어와 살았다.

 

 

  15장. 회원부(懷遠府),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 등 9주

 

  1> 달주(達州)

  전곽현(前郭縣)에 탑호성(塔虎城)이 있는데 본래 이름은 달로(達魯)고성이라고도 한다. 이 달로는 월희국의 성이라는 뜻이다. 북쪽 월량포가 월라, 즉 달라국, 월희국의 중심이다. 이 달로고성은 회원부 부성이고 달주성이었다.

 

  2>주(越州) 

 

  오란호특시(烏蘭浩特市)로 고려한다.

 

  3>회주(懷州)

 

  [요사지리지]의 발해 회원부 기사는 아래와 같다.

  요나라 신주(信州)는 본래 월희(越喜) 고성(古城)이었고 발해 회원부였다.

  요나라 신주는 공주령시 회덕진(懷德鎭) 신집고성(新集古城)으로 옮겨왔다.

  회주는 장령현(長嶺縣)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4> 부주(富州)


  부주에 관한 [요사지리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흥현(新興縣)은 본래 월희국지로서 발해 부주(富州)였다.

  

  백성시(白城市) 통유현(通楡縣)의 서쪽에 신흥(新興)이 있고, 그 서쪽의 오란화(烏蘭花)는 월희(越喜)의 변음(變音)이다.

  따라서 발해 부주(富州)는 통유현 서쪽의 오란화로 추정한다.


  5> 지주(芝州)

 

  제제하얼(齊齊哈爾)로 추정한다.

 

  6> 미주(美州),복주(福州),사주(邪州),기주(紀州)는 백성시, 조남시, 건안현 진뢰현 등에 있었을 것이다.

  흑수부는 발해의 서쪽 변경이므로 당나라와 직접 교통할 수 있어서 발해 건국 초기에 발해 몰래 당나라와 교류하였다.

  발해 3대 황제인 대무예는 726년 흑수부를 정벌하여 회원부를 설치하고 당나라와의 협공 위협을 없애버렸다.
  과거에 고구려가 거란의 협공내지는 거란의 선봉 때문에 나라가 무너진 것을 교훈으로 삼은 것이었다.

  발해 건국 초기에 당나라와 자주 교통한 흑수부는 발해의 저항을 받지 않는 교통로를 이용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백성시 흑수진(黑水鎭) 부근으로 추정된다. 서기 726년에 발해가 흑수부를 정복하고, 그후로 흑수말갈족은 송화강 북쪽의 제제하얼 동쪽으로 민족 대이동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단고기]에서 발해의 서쪽 경계가 오주목(烏珠穆)이라 하였는데, 발해 회원부의 끝이 거란족과의 경계였다고 본다.


  16장. 철리부(鐵利府)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

 

  1> 광주(廣州)

  [신당서] 발해전에서 철리부 6주는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 등이다.

  또한 고탐의 [도리기]에서 상경성에서 천리 북쪽에 남흑수말갈이 있었다.

   상경성 서남 30리에 숙신성이 있고 왕성에서 덕리진을 거쳐 남흑수말갈까지 천리이다.

  其西南三十里 古肅愼城 其北 經 德理鎭 至南黑水靺鞨 千里


  발해 상경성인 아성시에서 북으로 곧장 올라가면 철리시(鐵力市)가 나온다. 남흑수말갈의 철리부다. 거기서 더 북진하면 흑룡강이 나오는데 여기가 북흑수말갈이 된다. 즉 남흑수말갈은 그래도 송화강의 줄기이고 북흑수말갈은 완전한 흑룡강변이 된다.

  광주는 철력시다.

 

  2>분주(汾州)는 가목사시(佳木斯市)로 추정한다.

  3>포주(蒲州)는 부금시(富錦)로 추정한다.

  4>해주(海州)는 하바로프스크로 추정한다. 
  5>
의주(義州)는 의란(依蘭)으로 추정한다.

  6>귀주(歸州)는 무환현(撫還縣)으로 추정한다.

  17장. 독주주(獨奏州)와 기타 발해주(其他 渤海州)

 

  1> 영동속(郢銅涑) 3주

  독주주(獨奏州)란 발해 15부에 속하지 않는 왕실의 식읍주로 추정되는데 영동속(郢銅涑) 3주가 있었다.

  속주(涑州)는 속말강(涑末江)이라고 하던 송화강 유역으로 통화시 대통구(大統溝) 나통산성(羅通山城)으로 추정된다.

  동주(銅州)는 석목현을 두었으니 대석교시(大石橋市)다.

 

  영주(郢州)는 돈화현(敦化縣) 오동산성(敖東山城)으로 추정된다.

 

   2> 진주 개모성(辰州 蓋牟城) 약홀주(若忽州), 현도주(玄兎州), 목저주(木低州)

 

  진주 개모성(蓋牟城)이란 고마성과 마찬가지로 왕검성의 의미가 있다. 

  당나라 안동도호부 동북방으로서 법고현 엽무대다. 단군 왕검 조선 편에 자세하다. 

  발해 문왕 대흠무의 치세에 약홀주 도독이 있어서 일본과 교류하였다. <광개토왕 비문>중의 백제 58성 중에서 세 번째로 기록된 약모로성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단동시 수암현이다.

  그외 [속일본기]에서 발해에 목저주, 현도주 등이 있었는데 목저주는 무환지로 고려된다.  

  현도주는 안록산의 대연국(大燕國)으로 가던 길목으로 부신시 부근으로 고려된다.

  

  18장. 기타 발해 군현

 

  1> 용하군(龍河郡),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등 4현(縣)

  요나라 염주(鹽州)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 거리이다. 이 염주는 우리나라 평안북도의 요나라 염주군을 의미하는데 발해 때는 용하군이었던 것이다. 용하군은 지금 용천군(龍川郡)이 되었다.

 

  2> 회농군(會農郡)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등 4현(縣)

  요나라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며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등 4현이 있었으나 모두 폐지하였다. 동북으로 개주까지 120리이며 회농현 하나로 통일하였다.

  발해 회농군의 위치는 개주 서남 12리로서 단동시(丹東市) 동구현 고산진(孤山鎭)으로 추정된다.

 

  3> 길리군(吉理郡), 홍하(洪賀), 송성(送城), 길리(吉理), 석산(石山)등 4현(縣)

  요나라 하주(賀州)는 본래 발해 길리군(吉理郡)이며 홍하(洪賀), 송성(送城), 길리(吉理), 석산(石山) 등 4현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길리군이 개주로부터 거리 표시가 없는 것은 요나라 개주 위치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4> 삼로군(杉盧郡), 산양(山陽), 삼로(杉盧), 한양현(漢陽), 백암현(白巖), 상암현(霜巖) 등 5현(縣)

  요나라 노주(盧州)는 발해 삼로군(杉盧郡)으로서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 등이다. 노주는 재경 동쪽 130리에 있다.

  본계시(本溪市) 태자하변에 삼송산성(衫松山城)이 있는데 삼로현의 후신으로 고려된다.

  본(本)을 한으로 읽으면 한수가 된다. 삼로군은 본계시다.

 

  5> 반안군(盤安郡), 안풍(安豊), 협석(硤石), 발각(渤恪), 습양(濕陽) 등 4현(縣)

  요나라 풍주는 녹주의 동북 210리로서 동풍현 일대다. 발해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의 봉지다.

 

  6> 동산군, 함주(咸州)는 발해 동산군이었다. 함평현은 천보 중 안동도호치다. 영평이주간(營平二州間)이다.

  안동도호부는 677년 신성에서, 714년에 평주로 옮겼고 천보2년 (743년)에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에 두었다가 758년에 폐지했다. 영주 유성군(營州 柳城郡) 유성현 등은 699년 북경으로 후퇴하였다가, 717년 동쪽으로 나왔는데 [영원주지](寧遠州志)에 의하면 영원주가 바로 [당나라 유성현]이고 따라서 당나라 영주 위치다.
  이 당나라 영주 위치는 만리장성 산해관(山海關) 바로 동쪽의 수중현(綏中縣) 평천영(平川營) 부근이다. 평로군을 두었었다.

  요서고군성은 영평이주간으로서 영주였던 수중현(綏中)과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사이가 되며 이는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위치다. 발해 동산현은 하북성 무녕현이 된다.

 

  7> 철리군(鐵利郡), 숭산현(崇山縣), 위수현(潙水縣), 녹성현(綠城縣)

  요나라 광주는 한나라 양평현이었고 고려 당산현이었고 발해 철리군이었다.

  요나라 귀덕주(歸德州) 귀덕현(歸德縣)은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고 발해 숭산현(崇山縣)이었다.

  요나라 숭주(崇州)는 발해 숭산현(崇山縣), 위수현(潙水縣), 녹성현(綠城縣)이었다.

 

  이 중심은 한나라 양평현이고 특히 광녕부가 있던 북진(北鎭) 부근으로 고려된다.

  북진에 요나라가 건주, 현주 등을 설치하면서 그 자리에서 쫓겨나간 사람들이 요동반도로 이주해 들어간 것이다.

  

  8> 요나라 종주(宗州)는 발해 웅산현(熊山縣)이었고 이는 강평현(康平縣)이다.

 

  9> 요나라 건주(乾州) 영산현은 발해 영봉현(靈峰縣)이었고, 사농현은 발해 녹군현(鹿郡縣)이었다. 영봉현은 북진(北鎭) 부근이고 녹군현은 여양(閭陽) 부근이다.

 

 

 발해의 연호표

 

代數

묘호(廟號)-익호(諡號)

姓名

在位期 

연호 年號

수도 首都

 

1대

世祖 辰國 烈皇帝 

乞乞仲象

668-699

重光 

진국 (舊國)

장춘시 유수현 대파고성

2대

太祖 聖武 高皇帝

大祚榮

699-719 

天統 

忽汗城(중경)

장춘시 관성자

3대

光宗 武皇帝  

大武藝

719-738

仁安

 

 

4대

世宗 光聖 文皇帝

大欽茂

738-794

大興

상경/(752?)

흑룡강성 아시하 아성

 

 

 

774

寶力

 

 

 

 

???

大興56

동경/(787?)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5대

 

大元義

794

 

 

 

6대

仁宗        成皇帝

大華璵  

794

中興

상경 / 794

흑룡강성 아시하 아성

7대

穆宗        康皇帝

大嵩璘

794

正曆  

 

 

8대

毅宗        定皇帝

大元瑜

809  

永德

 

 

9대

康宗        僖皇帝 

大言義

812 

朱雀

 

 

10대

哲宗        簡皇帝 

大明忠

817     

太始

 

 

11대

聖宗        宣皇帝

大仁秀

818    

建興

 

 

12대

莊宗        和皇帝

大彛震

832    

咸和 

 

 

13대

順宗        安皇帝

大虔晃 

858 

 

 

 

14대

明宗        景皇帝 

大玄錫

872

 

 

 

15대

 

大瑋瑎

894 

 

 

 

16대

              哀帝 

大諲選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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