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발해의 건국과 강역
1절. 발해 건국기
발해의 건국기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실려 있는 바, 먼저 [구당서]부터 차례로 소개한다.
[구당서(舊唐書)]<발해전(渤海傳)>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멸망후에 대조영(大祚榮)은 가족들을 이끌고 영주(營州)에 와서 살았다.
696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이 패하여 죽은 후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이진충의 잔당을 치게 하였다.
먼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추격하였다가 고려와 말갈을 합친 대조영에게 패하였다.
대조영은 군중들을 이끌고 동쪽 계루고지(桂樓故地)에 자리잡았다.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고 하였다.
高麗 旣滅. 祚榮 率家屬 徒居 營州...祚榮 遂率其衆, 東保 桂婁之故地, 居東牟山, 築城 以居之.”
여기에 [신당서]<발해전>의 기록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동모산은 영주(營州)로부터 2000리 되는 곳이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추장 걸사비우라는 자는 고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 오루하(奧婁河) 변에 자리하였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용서하였으나 걸사비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이해고를 시켜 걸사비우를 쳐서 죽였다.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인 대조영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도망을 쳐서 이해고가 천문령까지 쫓아갔다가 패하고 돌아왔다.
이후 거란족이 다시 돌궐국에 투항하며 영주를 돌궐이 차지하니 중국과 길이 끊어져 발해를 토벌하지 못했다.”
위에 소개한 두 기록 사이에 약간의 차이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 첫째는 [구당서]에 없던 걸걸중상이 [신당서]에서 대조영의 아버지라고 등장한 것이고
둘째는 천문령 전투의 시기가 서로 반대이다. 즉 [구당서]는 천문령 전투 후에 대조영이 동모산을 쌓았고, [신당서]는 걸걸중상이 먼저 태백산 오루하변에 자리를 잡고 진국공(震國公)이라 불리다가 천문령 전투를 맞게 되었다.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면 거의 정확하게 실체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조대기>는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인용되어 있다.
고려말 태백일사가 편찬한 <대진국본기(大震國本記)>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고구려, 발해 여러 왕의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기록이 있고 이 중 발해의 연호들은 대개 [신당서]와 일치한다. 그러나 [신당서]에서 빠진 걸걸중상의 연호 중광(重光)과 대조영의 연호 천통(天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史實)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를 지지하는 것이 [요사지리지]<동경요양부서문>이다. 윗글에는 발해 대이진(大彛震)왕이 12세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발해 시조를 걸걸중상으로 모시고 계산한 것이다. 후세 사가의 입맛대로 발해 시조를 대조영으로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소개된 건국기는 <조대기>를 인용하였고 앞서의 두 당서 기록과 다르다. 특히 대조영이 건국왕이 아니라 건국왕인 걸걸중상의 태자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이르기를, 개화(開化: 고구려 보장왕의 연호) 27년(서기 668년) 9월1일 평양성 함락 때에 진국장군 대중상(振國將軍 大仲象)은 서압록하(西鴨淥河)를 지키다가 변고를 듣고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개원(開原)을 지날 때는 소문이 퍼져서 8000인으로 합쳐져서,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후고구려(後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광(重光)이라고 연호를 세웠으며 이후 주위 원근의 여러 성이 따르었는데 중광 32년에 돌아가셨다. 묘호를 세조(世祖)라고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고 하였다.
태자 조영은 부음을 전한 관리를 따라서 계성(薊城)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고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천도하였다. 말갈의 걸사비우와 거란의 이진영 등과 손잡고 당나라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패시키고 국호를 대진국(大震國)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하였다.
천통 21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이 즉위(서기 699년)하기 30년 전에, 걸걸중상이 세운 후고구려(後高句麗)가 발해 모국으로서 존재하였고(668년 이후), [신당서]도 이를 인정하여 천문령 전투 이전에 후고구려를 대진국의 전신으로 표기하기 위하여 걸걸중상을 기록한 것이다.
걸걸중상이 사망한 중광(重光) 32년은 고구려 망국년도인 668을 원년으로 계산하여서 서기 699년이 된다. 또한 719년에, 재위 21년만에 붕어한 대조영의 즉위년도도 역시 699년이 된다. 따라서 대조영의 대진국(大震國) 즉위연도는 확실하게 699년이고, 중광에서 개원한 연호는 천통(天統)이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연도는 이제까지 알려진 698년, 699년 등이 아니라 668년, 걸걸중상의 중광 원년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요사지리지]의 명백한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걸걸중상의 후고구려가 건국된 곳은 오루하변이라고 하였는데, 유수현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조대기>의 기록은 후고구려의 태자 조영이 거란의 이진충군에 합류하여 영주 반란을 일으키고, 이진충의 북경 점거에도 동참하여 북경 근처인 계성까지 갔다가 걸걸중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이진충의 거란군은 반란의 기세를 몰아서 영주에서 북경성까지 점거하여 20만에 달하는 당나라 군을 몰살시켰다.
이후에 당나라의 구원을 자처한 돌궐국의 영주 침략으로 인하여 거란군은 배후에서 고립을 당하여 그만 패퇴하고 이진충은 전사하였다.
거란 장수였던 이해고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오히려 거란과 연합군이었던 걸사비우의 말갈병과 대조영의 고구려군의 추격에 나서고 있다.
대조영은 [구당서]에서처럼 본래 영주(營州, 今 朝陽)의 유민이 아니라 발해 건국 후에 영주에 쳐들어와 점령했던 것이다.
역시 중국왕에게 허국공(許國公)의 작호를 받은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진국공 대중상과 동렬의 위치인데, 송막도독 이진충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거란과 합세하여 당나라를 치러가면서, 대조영도 걸사비우를 따라서 참전하여 계성(薊城; 今 天津市 北)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유물로 추정되는 함화4년(咸和; 836년) 불상(日本 所在)에 허왕부(許王府)가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 663년 설치)를 두어 신라왕을 계림도독이라고 불렀고,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 차츰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이후 674년 신라가 멸망한 고구려 후예인 반란군과 연합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당나라가 소유한 백제 땅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계림도독이던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金法敏)을 삭탈관직하고, 즉 왕위를 폐지하고 대신에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지명한 후에, 신라와 전쟁을 치르었는데 675년부터 2년간 지속되었고 676년의 경기도 적성의 칠중성, 인천의 매초성 전투(買肖城)로 끝났다.
[신당서]에서 당나라는 매번 승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패수를 장악하여 지켜내었는데 당시 지리적 정황으로는 패수가 바로 청천강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백제의 땅 모두와 고구려 땅의 일부안 청천강까지 당나라가 신라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또한 문무왕도 복권되었다. 문무왕의 복권은 당나라의 인정이 그러한 것이고 실제 신라 왕권은 변함이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668년 평양에서 676년 요동 고성(古城; 안산성)으로 물러나고, 다시 일년만에 요동 신성(新城, 新民市 大紅旗鎭)으로 옮긴다.
신라가 청천강 이남을 굳건히 지켜내니 대동강 평양에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696년 거란 이진충의 반란 이후에, 안동도호부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유명무실하다가 705년에 다시 복위되지만 714년에는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으로 또한번 후퇴한다.
그 이유는 712년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 설눌(薛訥;설인귀의 아들)의 군대가 돌궐의 지원을 받는 해족(奚族, 난하의 북부 민족)에게 대패하여 다시 영주 땅을 돌궐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은 713년에 발해에게 최흔(催炘)이라는 사자를 보내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는데 그 목적은 발해와 당나라가 동서 양면에서 돌궐이 차지한 영주를 협공하자는 속셈이었다. 아무튼, 당의 속셈이 이루어져서 그 몇년 뒤인 서기 716년경에는 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영주 땅이 영주를 지키던 고구려 왕자 고임무의 배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715년 당나라와 발해는 다시 대릉하를 경계로 대치하며 교류하였다.
그리고 730년부터 4개 북방 민족이 북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732년에는 발해가 대장 장문휴를 시켜서 바다 건너 산동의 등주를 침략하고 돌아왔는데 이후 발해와 당의 국경이 만리장성 근처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743년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 盧龍縣)으로 안동도호부가 한번더 생겨났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754년) 이후에 안동도호부 자체가 폐지된다. 당나라가 안서, 안남, 안북 도호부의 눈부신 성과에 의하여 얻어진 국토확장에 비하면 안동도호부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소위 당 현종의 “개원의 치(開元之 治)”는 동쪽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안록산의 난 이후로는 각 지방을 점거한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들에 의하여 당나라 국토가 요리되었다. 이를 번진(藩鎭) 시대라고도 한다.
그 번진의 선두는 산동에서 제왕(濟王) 칭호를 가졌던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都師) 이정기(李正己)이다. 그는 안록산 이후 가장 큰 절도사였으며, 고구려의 후인으로서 산동반도를 지배하면서 당나라와 발해와 당나라와 신라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또한 소금으로 소득을 올렸다. 이정기는 3대 4왕을 전하였다. 즉 아들 이납(李納)과 손자인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에게 평로치청절도사를 전하여 약 90년 동안 산동 15주의 지배권을 가졌는데, 당나라의 위협을 받으면 발해가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7세기말의 시대 상황을 검토해 보건대 후고구려의 황태자인 대조영이 부왕인 걸걸중상의 명령을 받고, 말갈추장 걸사비우를 따라서 거란의 당나라 침공에 응원하러 갔다가 걸걸중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698년 북경으로부터 패퇴하여 요수를 건너오면서 중국 땅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을 많이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며, 걸사비우의 전사로 인하여 걸사비우의 말갈군중도 흡수하였을 것이다.
대조영은 698년에 천문령(시라무렌 강 유역, 요서 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분쇄한 다음에 699년 걸걸중상이 죽자 후고구려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조영은 후에 713년을 전후하여 국호를 발해국으로 다시 변경하였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속일본기]에서 보듯이 대무예왕은 고려국왕이라고도 칭하였다.
대무예의 아들 대흠무(大欽茂)는 대흥(大興)으로 개원하였고 752년에 상경홀한성(上京忽汗城; 黑龍江省 阿城)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북경에서 일어난 안록산의 대연국(大燕國)이 당나라와 발해의 완충지가 되었다.
대흠무 치세에 787년 이후로 동경성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이무렵 고구려 후손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는 제왕이라 칭하면서 산동의 15주를 차지하였는데 4대를 전하였다.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서 평로치청절도사가 완충 지대였으며 당나라가 이정기를 치면 발해가 구원하였다.
792년 대흠무가 죽고 흠무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니, 굉림의 아들 화여를 제치고 굉림의 동생인 원의(元義)가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수개월 만에 흠무의 손자인 화여(華璵)가 다시 즉위하면서 상경홀한성으로 다시 돌아오니 흑룡강성 아성 터다.
화여가 죽고 왕위는 화여의 아들인 숭린(嵩璘)과 다시 동생인 원유(元瑜)을 지나 11대왕에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왕위에 올랐다.
[신당서]나 [한단고기]의 <발해기>에서 대인수왕은 남쪽으로 임진강까지 신라를 치고 내려와 신라의 패강진이 예성강까지 후퇴되어 설치되었고, 서쪽으로 당나라를 쳐서 조선, 해북(海北;大凌河) 등을 다시 수복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은 대인수의 즉위 전 공적으로서, 대인수는 바로 그러한 공적에 의하여 발해 왕으로서 추대되었다.
2절. 발해의 강역(渤海 彊域考)
[신당서]<발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조영(大祚榮)이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칭하고, 돌궐과 통하니, 지방이 오천리이고 병사는 수만명이었으며
마침내 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 제국을 다 가졌다.(盡得 扶餘 沃沮 弁韓 朝鮮 海北 諸國)
윗 글중의 해북은 발해의 북쪽이란 뜻이고 구체적으로는 발해 연안 중에서도 훗날의 산해관 북쪽을 의미한다.
조선(朝鮮)은 고조선이 있던 요동반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변한(弁韓)은 절대로 경상남도 김해가 아니라 난하 유역인 하북성 노룡(盧龍) 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지역은 당나라 평로치청절도사나 노룡절도사와 경계지역이므로 발해가 가진 변한은 본래 변한의 동쪽 일부로서 기후(己其-侯)가 있던 수유성, 즉 금서시 수중현부터 해북까지로 보아야 한다. 최초의 옥저(沃沮)는 요령성 요하 서쪽 신민시, 철법시, 강평현 일대이다. 부여는 시라무렌강, 즉 서요하의 상중류 유역이다.
712년부터 713년 사이에 다시 거란족, 해족(奚族)등이 다시 돌궐과 연합하여 당나라 북변, 북경 일대를 침략하였다. 이때 요동 땅과 중국 본토와의 허리인 요령성 영주(현재의 조양시)는 돌궐국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즉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돌궐이 내려와 있었다.
713년 당나라 현종은 칙사 최흔(催炘)을 바닷길로 발해에 보내어 대조영을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책봉하고 돌아갔다.
이전까지는 대조영이 “계루군왕(桂婁郡王)”이었는데 이제 발해, 요동반도의 주인이 된 것이다.
발해국왕 대조영은 713년에 이미 국호를 대진국에서 발해국으로 변경하고 요동반도를 다 찾은 것이다.
당나라는 714년에 돌궐에 대비하여 안동도호부를 진황도시 노룡현에 다시 설치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발해 지도에는 발해국에 발해 바다가 없이 압록강 뒤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위에서 당현종이 최흔을 발해에 파견한 목적은 요령성 영주를 차지한 돌궐국을 동서에서 협공하자는 취지였다. 소위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이다.
3년 후인 716년 경에 영주의 돌궐국 수비장수인 고구려 유장 고임무(高任武)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고임무는 본래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었다. 대조영의 회유를 뿌리친 고임무의 명분없는 당나라 선택에 의하여, 다시 요령성 영주는 당나라 땅이 되고 발해와 당나라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후로도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는 발해와 연합한 해족, 거란족, 돌궐족의 꾸준한 침략이 있었다.
그러나 732년에 삼부족이 당나라에게 패퇴하였는데,
이때 발해가 해군으로서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제압하였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 의하면 발해 장수 연충린(淵忠麟)이 당나라의 반격을 요서(遼西)의 대산(帶山)에서 물리쳤다.
요서의 대산(帶山)은 733년 마도산(馬都山) 전투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도산은 노룡의 진산(鎭山)이라고 하였는데 진황도시 청룡현에 남아 있는 도산(都山;1846M)이다. 하북성 노룡현으로부터 만리장성 바깥에 있다.
[신당서]<오승체전(吳承王此傳)>에서 발해의 대무예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마도산을 쳐서 성읍을 함락시켰는데 당나라 장수 오승체가 발해군을 그 이남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오승체 신도비문(吳承王此 神道碑文)에서는 발해가 바다(산동반도)에서 나타나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즉 발해의 732년의 당나라 산동반도 침략과 733년의 마도산 전투를 기록한 것이 된다.
한편 733년 3월 거란이 돌궐의 지원으로 유관의 도산(都山)에서 당나라 유주도사 곽영걸을 패사시켰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발해의 연충린의 승전으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727년 발해 땅이었던 하북성 노룡현이 732년에 당나라에게 들어가자 발해가 산동반도를 치면서 다시금 마도산을 차지하여 국경을 노룡과 청룡지간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사이에 현재 만리장성이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서도 세 곳에 발해 영역에 대한 옛글이 있다.
1.무예(武藝) 때에 거란과의 서쪽 경계가 오주목(烏珠牧) 동쪽 십리 임황수(臨潢水)이다.
이 말은 대조영(大祚榮)의 아들 대무예(大武藝)의 치세에는 오늘날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라는 곳의 아래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倫河, 즉 임황수)가 발해의 서쪽 경계라는 것이다. 파림좌기는 거란족의 요나라 수도였던 상경 임황부이고 오이길목륜하는 임황수(臨潢水)라고 부르던 물이다. 오주목(烏珠牧)이 현재의 오이길목(烏爾吉木)이다.
2. 인안(仁安) 16년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였다.
3. 장백산의 동쪽을 안변부(安邊府)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부(安遠府)라 하고
모란강의 동쪽을 철리부(鐵利府)라 하고
흑수(黑水)의 강변을 회원부(懷遠府)라 하고
난하(灤河)의 동쪽을 장령부(長嶺府)라 하고
장령부의 동쪽을 동평부(東平府)라고 하였다.
여기서 난하의 동쪽이 발해의 장령부라고 하면, 중국의 만리장성 바로 동쪽은 전부 발해 땅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 기존의 역사지도에는 발해 땅이 요동반도에도 못미치고 길림성부터 발해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발해의 강역은 [신당서]<발해전>에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원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발해땅은 오경 십오부 육십이주(五京十五府六十二州)를 두었는데
숙신의 땅(肅愼故地)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용천부(龍泉府)라고도 했으며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그 남쪽은 중경(中京)이라 하고 또한 현덕부(顯德府)라고도 하였는데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육주를 다스렸다.
예맥의 땅(Ꞑ貊故地)에는 동경(東京)을 두었는데 용원부(龍原府)라고도 하고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했으며 경주(慶州),염주(鹽州),목주(穆州),하주(賀州) 등 사주를 다스렸다.
옥저의 땅(沃沮故地)에는 남경(南京)을 두었고 남해부(南海府)라고도 하였으며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고구려의 땅(高麗故地)에는 서경(西京)을 두었으며 압록부(鴨淥府)라고 하였으며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豊州),정주(正州) 등 사주를 다스렸다.
장령부(長嶺府)는 하주(瑕州)와 하주(河州) 이주를 다스렸다.
부여의 땅(扶餘故地)에는 부여부(扶餘府)를 두고 항상 강병을 두어 거란을 막았으며 (常屯勁兵 扞契丹) 부주(扶州)와 선주(仙州) 등 이주를 다스렸다.
정힐부(鄭詰府)는 정주(鄭州), 고주(高州) 이주를 다스렸다.
읍루의 땅(挹婁故地)에는 정리부(定理府)를 두었으며 정주(定州),반주(潘州) 이주를 다스렸다.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경주(瓊州) 등 이주를 다스렸다.
솔빈의 땅(率賓故地)에는 솔빈부(率賓府)를 두어 화주(華州),익주(益州),건주(建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불열의 땅(拂涅故地)에는 동평부(東平府)를 두어 이주(伊州),몽주(蒙州),타주(沱州),흑주(黑州),비주(比州) 등 오주를 다스렸다.
철리의 땅(鐵利故地)에는 철리부(鐵利府)를 두어 광주(廣州),분주(汾州),포주(蒲州),해주(海州),의주(義州),귀주(歸州) 등 육주를 다스렸다.
월희의 땅(越喜故地)에는 회원부(懷遠府)를 두었으며 달주(達州),월주(越州),회주(懷州),기주(紀州),부주(富州),미주(美州),복주(福州),사주(邪州),지주(芝州) 등 구주를 다스렸다.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미주(郿州),모주(慕州),상주(常州) 등 사주를 다스렸다.
그외 영주(郢州),동주(銅州),속주(涑州) 등 독립주(獨奏州)가 있었다.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以肅愼故地爲上京曰龍泉府領龍湖渤三州 其南爲中京曰顯德府領盧顯鐵湯榮興六州 Ꞑ貊故地爲東京曰龍原府亦曰柵城府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爲南京曰南海府領沃睛椒三州 高麗故地爲西京曰鴨淥府領神桓豊正四州 曰長嶺府領瑕河二州 扶餘故地爲扶餘府常屯勁兵扞契丹領扶仙二州鄭詰府領鄭高二州 挹婁故地爲定理府領定潘二州 安邊府領安瓊二州 率賓故地爲率賓府領華益建三州 拂涅故地爲東平府領伊蒙沱黑比五州 鐵利故地爲鐵利府領廣汾蒲海義歸六州 越喜故地爲懷遠府領達越懷紀富美福邪芝九州 安遠府領寧郿慕常四州又 郢銅涑三州獨奏州
2장. 발해 건국지 구국(舊國)과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率賓府 華州, 益州, 建州)
1절 . 발해 구국
668년 발해 개국조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를 이어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워 중광(重光)으로 개원하였다.
걸걸중상은 읍루고지이며, 고구려 계루부이기도 한 오루하변 동모산(東牟山)에 나라를 세웠는데
읍루고지는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향(大坡鄕)의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신당서]에는 발해 구국(舊國)이라고도 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걸걸중상을 진국공(辰國公)으로 봉하였다.
오루하는 후에 오라라고 줄여서 말하였고 길림시 북교에 오라부 고성이 남아 있고
대파고성 건너편에는 청나라 오라아문(烏拉阿門) 비석이 있다.
따라서 발해 오루하는 길림시를 지나는 송화강이다.
834년, 12세 대이진(大彛震)왕 즉위 후에, 발해를 방문한 당나라 장건장(張建章)의 묘비에는 발해 홀한주가 [읍루고지]라고 하였다.
705년경 당나라 중종 때에 발해 도읍을 홀한주라 하고 발해군왕에 봉하였다. (中宗賜 所都曰 忽汗州 封渤海郡王)
이것이 발해 최초의 홀한주 기록인데 지금의 장춘시(長春市)다. 홀한하가 송화강을 고쳐부른 이름이다.
장춘시가 한때 홀한주였던 것은 [원일통지(元一統志)]<개원로(開原路)>에 있는 다음 기록에 의한다.
上京故城 古肅愼氏地, 渤海大氏 改爲 上京
金旣滅遼, 則 上京建邦設都 後改爲會寧府 京之南曰 建州,
京之西曰 賓州, 又西曰 黃龍府 則 渤海之忽汗郡 後爲 龍泉府
이를 해석하면 (현재 하얼빈 아성에 위치한) 상경고성은 본래 숙신씨 땅이고 발해 대씨왕조가 처음으로 상경이라 고쳐 불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정하고 뒤에 회녕부라고 고쳐불렀다.
금나라 상경(하얼빈 남쪽 아성현 白城)의 남쪽은 건주(建州)라 했고, 상경의 서쪽은 빈주(賓州)라고 했고 또 서쪽은 (장춘시 농안현에 있던) 황룡부(黃龍府)라 했는데 본래 발해 홀한군이며 뒤에 용천부라고 불렀다.
보충 증거로서 [원일통지(元一統志)]<오국부(五國部)>의 발해 건주(建州) 기록이 있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 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상경(하얼빈 북쪽)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백두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동서로 각기 발원하고 백두산의 북쪽에서 송화강의 상류가 발원한다. 이 송화강은 요나라 때에 압자하(鴨子河)로 부르다가 혼동강으로 개칭하였다.
송화강은 길림을 지나 부여시를 지나 눈강(嫩江)과 만나서 동북류로 바뀌어 (하얼빈 아성의) 금나라 상경 북쪽을 지나 흑룡강을 만나고 우수리강을 만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그런데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곳이 발해 솔빈부 건주(建州) 서쪽 50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윗글에서 언급한 상경은 발해 건주 다음이니 당연히 발해 상경이며 금나라 상경과 같은 곳이다.
장춘시는 발해 최초 홀한군이고, 713년 대조영이 중종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은 중경 현덕부성이다.
이는 698년 발해 구국 동모산에서 발해 2세 대조영의 수도가 된다. 뒤에 발해 4세 문황제 대흠무는 발해 상경으로 천도했는데 이곳이 하얼빈 남쪽 아성(阿城)이다.
[고탐]의 도리기에 발해 중경에서 동북방으로 600리에 발해 상경이 있었는데 이는 장춘시와 하얼빈 아성간의 방향, 거리와 일치한다. 또한 [신당서]의 대흠무 기록에 상경은 구국으로부터 300리라고 하였고 이는 구국을 장춘시 유수현 대파고성(大坡古城)으로 보면 일치한다.
“신주에서 육지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는데 천보 중의 발해 왕도이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 왕성은 홀한해에 임하였다.
왕성 서남 30리에 숙신성이 있고 왕성에서 덕리진을 거쳐 남흑수말갈까지 천리이다.
神州, 又 陸行 四百里至 顯州 天寶中 王 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城臨忽汗海 (단 2년간 발해 상경이었던 동경성에 대한 기록이 잘못 삽입)
其西南三十里 古肅愼城 其北 經 德理鎭 至南黑水靺鞨 千里”
발해 구국의 대파고성은 동변이 1050m, 서변이 840m 남북이 각각 630m로서 총 3150m의 둘레를 가졌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4문이 있었고 발굴 결과 포문(布文)기와와 녹유(綠釉)기와, 연주수면(連珠獸面) 기와, 꽃무늬 와당 등이 나왔다.
성내에서는 대형 조각 벽돌, 청색 벽돌, 동경, 철솥, 옥기, 석기, 돌공(石球) 등이 나왔다.
성 외곽에서도 6개의 건축지와 1개의 야철지(冶鐵地)가 나왔다.
석각 호랑이와 용운문(龍雲紋) 옥패식(玉佩飾)이 아름답고, 칼, 창, 검, 화살, 불상 등 청동류와 각종 동패식이 출현하며 쌍룡문, 쌍어문 동경 등 여러 동경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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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쪽의 노하침향(老河沈鄕)에서는 발해 최초의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중국에서는 발굴 결과 돈화현 육정산 고분군보다 이른 발해 조기(早期) 양식으로 발표하였다.
발해 시기 묘장이 139좌이며 석관묘와 목관묘도 있고 철갑편, 철검 등 철기와 구리장식, 은장식 등이 있었다.
그래서 발해 구국 성지로서 대파고성이 확실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역사적 관심이 집중되야 할 것은 노하침(老河沈鄕)에서 발굴된 동한시대(東漢時代) 묘장 129좌다.
발해 묘장보다 훨씬 화려하고 정교한 구리장식, 금은 장식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한시대의 숙신족 고분이다.
발해 상경은 숙신고지에 세워졌다.
2절.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率賓府 華州, 益州, 建州)
1> 건주(建州)
다음은 [원일통지(元一統志)]<오국부(五國部)>의 기록이다.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상경(발해)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백두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이 동서로 각기 발원하고 백두산의 북쪽에서 송화강의 상류가 발원한다. 이 송화강은 요나라 때에 압자하로 부르다가 혼동강으로 개칭하였다.
송화강은 길림을 지나 부여시를 지나 눈강(嫩江)과 하오린하(藿林)만나서 동북류로 바뀌어 흑룡강이 되고 금나라 상경 북쪽을 지나 우수리강을 만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서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곳이 발해 솔빈부 건주(建州) 서쪽 50리가 되는 것이다.
발해 건주는 부여시 반덕(班德; 성둘레 1700m )고성이 된다.
2> 화주(華州)
솔빈부 화주는 솔빈부 부성이다. 부여시 백도눌(白都訥; 성둘레 3132m) 성이 된다. 연화문 와당이 많아서 이미 발해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규정된 발해성중 가장 서쪽이다.
3> 익주(益州)
솔빈부 익주는 송화강 북안의 증성진(增盛鎭) 부근으로 추정된다. 요나라가 송화강 남쪽에 익주를 다시 만들었으므로 발해 익주는 증성으로 이름을 고친 것이다. 증성 동쪽 신점에서 꽃무늬기와가 나왔다.
3장. 상경 용천부, 용주, 호주, 발주
숙신의 땅(肅愼故地)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용천부(龍泉府)라고도 했으며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등 삼주를 다스렸다.
다음은 [원일통지(元一統志)]의 글이다.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발해의) 상경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역시 원일통지의 내용이다.
상경고성은 본래 숙신고성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이라 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발해 상경에 도읍하고 훗날 회녕부라고 하였다.
上京 古城은 본래 肅愼氏地이고 渤海大氏가 改爲 上京하였다
金旣滅遼 卽 上京建邦設都 後改 會寧府
그런데 고탐의 [도리기]에서 이미 발해 구국 왕성을 언급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압록강구에서 배를 타고 100리를 가서 작은 배로 동북 30리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에 다다르는데 발해의 경계이다.
다시 강을 오백리 거슬러 오르면 고려 왕도였던 구도현성에 이르고
다시 이백리를 오르면 신주에 이르고
신주에서 육지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는데 천보 중의 발해 왕도이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 왕성은 홀한해에 임하였다.
왕성 서남 30리에 숙신성이 있고 왕성에서 덕리진을 거쳐 남흑수말갈까지 천리이다.
自鴨祿江口 舟行 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 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古高麗王都
又 東北 泝流 二百里 至 神州, 又 陸行 四百里至 顯州 天寶中 王 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城臨忽汗海
其西南三十里 古肅愼城 其北 經 德理鎭 至南黑水靺鞨 千里”
여기서 압록강은 오늘날의 요하(遼河)이고, 발해 신주(神州)는 철령시 서풍현 양천진 성자산산성이다.
자세한 것은 서경 압록부 신주에 설명되어 있다.
[신당서] 발해전(新唐書 渤海傳)의 상경 천도 대목이 있다.
발해의 상경성 시대는 발해 대흠무왕 때로서 당나라 천보말이었으니 738년 이후 756년 이전이다.
대흠무왕의 즉위 15년인 752년으로 추정된다.
“대흠무가 구국으로부터 300리 되는 홀한하 동편의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欽茂 徒 上京 直 舊國 三百里, 忽汗河之 東.”
752년 대흠무의 상경 천도 이전의 발해 왕도는 대조영의 홀한성으로서 장춘시 관성자(寬城子)다.
발해의 상경홀한성을 찾는데 길잡이가 되는 홀한하가 곧 송화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먼저, 홀한(忽汗)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호란(呼蘭)이라는 물이름 또는 지명은 송화강의 줄기에서 모두 세 군데에 보인다. 첫번째는 반석과 화전의 사이로서 호란진이 호란하라는 물 위에 있는데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두번째는 흑룡강성 오상의 옆으로 흐르는 호란하가 있다. 세번째는 하얼빈에서 송화강을 건너가면 호란현이 있다. 이 세 호란이 바로 발해의 홀한하를 증거하고 있는것이니 홀한하는 송화강의 옛이름인 것이다.
이 홀한하의 옛이름은 속말수이고, 발해의 홀한하를 거쳐서 여진 시대 이후에 휘발하가 되었으며, 그 하류는 압자하라고도 부르고 혼동강이라고도 부르던 송화강이다. 반면에 동경성 일대는 몰안강(牧丹江)이다. 홀한강과 몰안강은 다른 것이다.
홀한의 어원은 고주몽의 홀본이다.
따라서 대흠무가 천도한 상경은 발해 구국 북쪽 300리로서 흑룡강성 아성시 백성자다.
아성시 백성자는 이미 금나라 상경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발해 상경터였다.
금나라 상경터 발굴도를 보면 [ㄴ] 자인데 두 개의 성터가 겹친 것이다.
금나라 상경 기록에 의하면 산채를 짓고 살다가,
서남방에 아골타 묘(지도중 금태조묘)를 만들고
후에 남북 쌍성을 세워 아골타묘를 이장했다가 도로 원위치했다.
즉 북성이 처음부터 황성이었다.
그런데 북성과 남성을 나누는 중앙 성벽을 보면 옹성문이 남쪽으로 향했다.
남북 쌍성이 되고도 북성이 여전히 황성이다.
그런데 남쪽 성에 분명한 황궁터가 또 있으니, 이는 금나라 황궁이 아니라 발해 황궁일 수밖에 없다.
즉 가로로 직방형인 발해성이 허물어지고서 그 북방에 금나라 아골타가 성채를 짓고 살다가
발해 상경성을 포함하는 남성을 다시 만들어서 남북 쌍성으로 다시 만들었다.
발해 상경내 황성은 동경성의 황성(아래 그림)과 거의 같은데
상경의 내성은 외성의 서쪽 부분이고 동경의 내성은 중앙 북쪽인 것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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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상경성...왼쪽의 혹은 아골타묘다 |
금나라 상경의 남성은 발해 상경(2148M X 1523M) 발해 상경내 황성(645M x 500M)터를 볼 수 있다. 이 황성이 금나라 황성이려면 황성이 북성에 있거나 상경내 황성은 동경성의 황성(아래 그림)과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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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동경성과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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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동경성 평면도 |
발해 동경성내 내성과 황성/ 상경 황성과 거의 비슷하다 |
2> 용주(龍州)는 상경, 즉 아성시 백성이다. 성둘레는 남성만으로 보아서 10300M 내외다.
상경 서남 30리에 석루성(石婁城)이 있었다. [송막기문]에서 성둘레 5리의 고숙신성이라고 하였다.
[송막기문]에서 금나라 상경도 거리 설명중의 서루성(西樓城)과 동일한 성으로 고려된다.
3> 호주(湖州)
발해 호주는 요나라가 호주 흥리군(湖州 興利軍)과 장경현(長慶縣)을 다스렸다. 아성 동쪽 연수(延壽) 흑룡궁 부근으로 추정된다. 요나라 고주(古州), 금나라 곡주(谷州)가 있었다.
4> 발주(渤州)
발해 발주는 요나라가 청화군(淸化軍)과 공진현(功珍縣)을 두었다.
발해 구국이었던 유수현 대파고성으로 고려된다.
4장. 용원부 동경성, 경주(慶州), 목주(穆州), 염주(鹽州), 하주(賀州)
흑룡강성 영안현에 위치한 발해 동경성터다.
동경성은 성둘레가 17500m 정도다. 내성은 성둘레 4500M다. 황성은 2500M 정도다.
동경성터에서 상경(上京)이라고 새겨진 벽돌과 기와가 각각 발견되었다. 발해 대흠무왕이 짓고 천도할 때에는 새로운 상경성이었다.
그러나 화여왕 때에 옛 상경으로 돌아오니 다시금 동경성으로 바뀐 것이다.
[신당서]<발해전>에서 다음 기록이 있다.
흠무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으니 친척인 원의가 왕이 되었다. 그해 원의가 의심이 많으니 국민들이 그를 죽이게 되었다.
굉림의 아들 화여를 왕에 세우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欽茂子 宏臨早死 族弟 元義立 一歲 猜虐 國人殺之
推 宏臨子 華璵爲王 復還 上京
이 호주 동경성은 다른 말로 용원부이고
한때 호주 동경성이 발해 상경성일 때의 또다른 발해 동경성은 책성부다.
이 호주 동경성은 외성이 37리이고 내성 둘레는 9리이며 황성 둘레는 5리이다.
또한 부근 성터에서 발해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물한주 겸 삼왕대도독지인 勿汗州 兼 三王 大都督之印”이 나왔다.
물한주는 물이 많은 주라는 뜻이 되는데 경박호와 관련된다.
동경성은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벽곡현(壁谷縣), 웅산현(熊山縣), 백양현(白楊縣) 등
6현을 다스렸다.
발해의 동경성 시대는 당나라 정원 때였으니 785년 이후 794년 이전이다.
대흠무왕 즉위 50년인 787년 경으로 추정된다.
대흠무왕은 즉위초에 대흥(大興)이라는 연호를 세웠다가 774년 보력(寶力)으로 개원했다.
이 시기에 777년 2째딸 정혜공주를 돈화(敦化)의 육정산(六頂山)에 묻은 것이다.
돈화는 뒤에 발해 독주주의 하나인 동주(銅州)가 되었고 돈화의 오동산성(敖東山城)은 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돈화의 오동산성은 석성으로서 성둘레는 4리이다.
한편 대흠무왕은 다시 개원하여 대흥보력(大興寶力)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그 원년은 즉위 당시를 기산점으로 하고 있는 실정이나, 개원한 보력에서 다시 대흥보력으로 연호를 되바꾼 시기는 알수 없다.
2> 경주(慶州)
경주는 흑룡강성 녕안현 동경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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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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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는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웅산현(熊山縣), 벽곡현(壁谷縣),백양현(白楊縣) 등이 있었다.
용원현은 영고탑으로 추정한다.
발해 백양현(白楊縣)은 장안산성으로부터 서남으로 1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화룡현(化龍縣) 용수진(龍水鎭) 남쪽 양목정자산산성(楊木頂子山山城)으로 추정한다. 둘레가 2680M이다. 부근에서 발해 문왕의 네째 딸, 정효공주묘가 발굴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그녀가 묻힌 곳은 염곡(染谷)이었다.
2> 목주(穆州)
[요사지리지]에서 목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었다. 즉 요나라 목주는 이름만 발해 목주이고 그 땅은 발해 회농군에 설치한 것이다.
발해 목주는 동경성 동쪽 목릉(穆稜)으로 추정된다.
3> 염주(鹽州)
[요사지리지]에서 염주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염주(鹽州)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 거리이다.
역시 이름만 발해 염주이고 땅은 용하군 땅이다.
발해 용원부 염주는 연길시(延吉市)로 추정된다.
4> 하주(賀州)
하주는 혼춘시(琿春市) 부근으로 추정된다.
5> 천정군(泉井郡)
천정군(泉井郡)은 신라와 발해의 전쟁으로 알려졌다. 이 전쟁은 733년 말과 734년 초에 걸쳐서 있었다.
본래는 732년 발해가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침범한 데 대한 당나라의 보복으로 시작된 전쟁인데, 당나라 현종의 사주를 받아서 김유신의 손자 김윤문(金允文) 등을 앞세워 신라와 발해의 연합군이 발해의 동남쪽을 치고 올라갔다가 폭설로 인하여 수많은 동사자만 내고 물러간 곳이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의 패인이 정말 폭설 때문이었는지는 발해의 입장이 밝혀져 있지 않아 단정할 수 없다.
이 전쟁 후에 확정된 양국의 동해안 국경은 니하(泥河)라고 하는데, 강원도 오대산의 진고개에서 흘러내리는 연곡천을 당시의 니천으로 보고 동해안의 국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말 “질다”에서 파생된 부사 “진-물”을 한문으로 바꾼 것이 니천인 것이다.
발해 천정군(泉井郡)은 함경남도 원산시 서북쪽 교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덕원(德原)도호부는 고구려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고려시대 용주(湧州)가 되었다고 하였다.
신라 때에 정천군이라고 부른 적도 있는데 정천성은 덕원부 북쪽 15리에 석성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4300척으로서 1470M 내외였다.
현재 원산시의 덕원리, 용주리 동북쪽에 위치한 문천시 거령산 남쪽 고성리(古城里)가 천정군 고성의 위치이다.
5장. 서경 압록부(西京鴨淥府) 신주(神州), 환주(桓州), 정주(正州), 풍주(豊州)
서경 압록부는 압록강에 있었는데 그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遼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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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이 요하인 증거들
1)[원사지리지]<동령로>(현재 대동강 평양에 설치한 관청)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拔平壤), 즉, 결론은 지금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옛 평양이 아니며, 고대 압록수는 현재 대동강 평양에서 서북으로 천리니 2)[삼국유사]에서 고국원왕은 안시성(安市城)으로 천도했고 이는 환도성이었다고 했다. 또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요수는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서도 안시성이 환도성이다.
4) 연개소문 차자로서 대막리지였던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
이제 [신당서]의 압록강인 요하를 600리 거슬러 올라가 구도현성, 즉 고구려 환도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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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시 최진보 관음각 산성이 고구려 환도성, 즉 안시성인 증거들 1) 다음은 [신당서]<도리기>에 나오는 지리 설명이다. 自鴨淥江口 舟行 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 泊汋口 得渤海之境, 2) 이에 대해 [요사]<지리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 三 桓都 神鄕 淇水縣, 高麗王於此 國人謂之新國 剏立宮闕 五世孫剑 宮室焚蕩.
3) 이 환주, 구도성 위치는 철령시 20km 동남쪽, 범하(汎河) 북쪽의 최진보 관음각산성(성둘레 7000M 석성)과, 범하의 남쪽 청룡산성(성둘레 4000M) 일대다. 범하의 중국 발음은 환(fan)하다. 즉 환도성에는 환하가 흐른다. 지금도. (아래 지도 참조) 4) 범하 아래 청룡산성 토성은 산상왕이 세우고, 위나라 장수 무구검(毋丘儉)에게 도륙 당해 불내성(不耐城)이라고 불린 환도성이다. <무구검전>에 불내성을 파훼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밭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범하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래서 다시 도읍할 수 없어서 동천왕은 평양성을 세웠다. (아래 지도 참조)
6) 위쪽 최진보 관음각산성, 즉 안시성은 그 북쪽에 당태종이 전장을 내려보던 당왕영산(唐王營山)이 서북에 있고, 산성의 동남에는 고구려후원군이 진을 친 고려영(高麗營)이 있다. [철령현지](鐵嶺縣志)에 소개되어 있다.
7) 발해 환주의 3현은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3현이다. 환도현은 범하 북쪽 관음각 산성이 되고, 신향현은 범하 남쪽 청룡산성 일대가 되며 기수(淇水)현은 개원시(開原市)가 된다. 8) 환주에서 200리 거리의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이다.
고구려 고국이라하면 고국(故國)에 묻힌 신대왕(新大王)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수성왕 묘지석은 동천왕, 중천왕 교서 갈석과 같이 나타났다.
세 교서 갈석이 같이 나타났으므로 단 안시성과 국내성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환도성이 불내성이긴 하지만 환도성이 국내성은 아니다.
수성왕의 뒤를 이은 신대왕의 장자 발기가 비류수에 살았고, 신대왕은 국내위나암성에 도읍했다. 그러나 고국천왕 때에 요동왕 공손강이 쳐들어오고 다시 산상왕 때에 발기의 난이 있었는데 이때 산상왕의 승리는 요동국을 크게 밀쳐낸 것이고 그래서 다시 환도성에 도읍하였다.
bc.107년에 세운 1차 현도성은 옥저(沃低)에 있었다.
9) 발해 신주 신록현(神鹿縣)은 서풍현 자리인데 서풍 이전 이름이 도록현(圖鹿縣)이었다. 압록에서 유래한다.
10) 서풍현 낙선향(樂善鄕)에서는 철검이 껴묻힌 고분 70개와 고구려 초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11) 동천왕이 비류수에서 이기고도 양맥에서 위나라 무구검에게 패하여
12) 요나라 건국초에 망해버린 발해 압록부의 기병들이 반란하여 압록강에서 유격작전을 하였다.
14) 이제까지 발해 압록부 환주, 환도성 등으로 치부해온 집안성(集安)은
15) 집안의 산성이 약 6700m의 성둘레를 가졌다. 그 부근에서 가장 크다. 16) 요나라는 안시성민들을 빼서 요양 남쪽 탕지보로 옮겨 철주(鐵州)라 불렀고,
결론적은 집안은 북옥저였고, 고주몽 때부터 고구려에 복속했으며 따라서 동천왕이 지은 평양성, 후에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은 | ||||||||||||
서경 압록부에는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 4주가 있었다.
1>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이다.
철령시 서풍현(西豊縣) 청하변의 양천진(凉泉鎭) 성자산산성인데 내외 쌍성으로 둘레 9000M다.
[요사지리지]에서 설명한 광륜 20리 석성(즉 성둘레 10000m)이라는 기록과 맞는다.
또한 아록하(阿綠河)가 흐르는 압록부이다.
유리왕의 양곡(凉谷)과 동서 양성이 기록에 있다.
발해 신주 신록현(神鹿縣)은 서풍현 자리인데 서풍 이전 이름이 도록현(圖鹿縣)이었다. 압록에서 유래한다.
발해 신화현(神化縣)은 이수현(梨樹縣) 자리다. 이수현 이전에 봉화현(奉化縣)이었다.
발해 검문현(儉門縣)은 요나라 홍문현이 되었는데 그 위치는 확실치 않다.
양천 성자산산성
2> 환주(桓州)
환주(桓州)는 고려때 도성이었고, 환도, 신향, 기수 3현이 있었다. 산상왕이 여기로 옮기니 신국이라고 불렀고, 고국원왕 때에 불탔다.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 三 桓都 神鄕 淇水縣, 高麗王於此 國人謂之新國 剏立宮闕 五世孫剑 宮室焚蕩.
환주, 구도성 위치는 철령시 20km 동남쪽, 범하(汎河) 북쪽의 최진보 관음각산성(성둘레 7000M 석성)과, 범하의 남쪽 청룡산성(성둘레 4000M) 일대다. 범하의 중국 발음은 환(fan)하다. 즉 환도성에는 환하가 흐른다. 지금도.
발해 환주의 3현은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3현이다. 환도현은 범하 북쪽 관음각 산성이 되고, 신향현은 범하 남쪽 청룡산성 일대가 되며 기수(淇水)현은 개원시(開原市)가 된다.
3> 풍주(豊州)
풍주는 발해 반안군(盤安郡)이었는데, 녹주의 동북 210리다.
이는 발해 풍주를 요나라가 발해 반안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즉 녹주 동북 210리는 요원시 반석현 부근인데, 이는 대조영의 동생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의 봉지다.
발해 풍주와 안풍현(安豊縣)은 압록하의 발원인 현재의 요원시(遼源市)로 추정된다.
4> 정주(正州)
정주는 녹주의 서북 380리로서 비류왕 고지라고 하였다. 쌍료현(雙遼縣) 동명향(東明鄕)이다. 백우유지(白牛遺址)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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