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肅宗)
이름 순. 1661년 출생. 1674년 14세에 즉위. 1720년 60세로 승하. 45년 10개월 재위. 능호 명릉 경기도 고양.
경신환국 (1680년) 2차 예송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 일파가 조정에서 대거 축출된 사건이다. 숙종 6년 남인의 영수 영의정 허적이 조부 허잠이 시호를 받게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이날 비가 오자 숙종이 영의정의 잔치에 유악을 보내라하였다. 그런데 허적이 왕의 명이 있기전에 궁중의 유악(기름칠한 천막)을 무단으로 사용하였다. 숙종이 이를 알게 되었고 노하여 군권을 서인에게 주었다. 더구나 잔치는 남인들끼리만 열렸다.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인 인평대군의 아들인 북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역모를 도모한다고 고변하였다. 허견, 허적, 윤휴, 유혁원, 인원령등 남인이 유배되어 처형되어 남인이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다.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로 처형되었다. 허적과 사이가 좋지 않은 허목이 상소를 올리자 성종이 화를 내며 허목을 귀양보냈는데 숙종이 허적을 믿고 의지했었다. 김석주는 (명성왕후의 사촌) 허견이 부녀를 겁탈하고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역적이라고 상소했다. 김석주가 벌군직 이입신과 어영장 박빈에 복선군과 허적부자를 염탐할 것을 지시하였고 복선군의 궁 행랑채 아궁이에 불을 때는 궁녀에게서 군복 백벌을 바느질하다 쏜끝을 다쳤다, 정승 아들이 밤에만 옷감을 가져온다고 말하자 이를 김석주에게 보고하였고 김석주가 숙종에게 고하였다.
기사환국 (1689) 숙종이 후궁인 소의 장씨의 소생 이윤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로 삼으려 하자 영의정 김수홍, 송시열 서인들이 왕후가 아직 젊으니 적자의 생산을 기다려야 한다고 반대하였다. 생후 2달째인 이윤의 원자책봉이 시기상조 라고 반대한 것이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원자에 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고 숙종이 서인들의 입을 막으려 남인들을 대거 중용하였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이에 대해 상소하자 송시열을 유배시켜 사사하고 김수홍과 김수항을 파직시켜 진도에 유배하였다. 남인들이 다시 중전을 모함하자 숙종이 중전을 폐위하고 원자를 세자에 책봉하며 노론 86명을 귀양 보냈다. 한편 숙종이 태어 났을 때 유독 송시열만 병을 핑계로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송시열은 숙종이 효종의 상중에 잉태되어 의도적으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으로 명호를 구하자 송시열이 명호를 정하는 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하여 성종의 화를 돋구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남인들이 극형을 주장하자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갑술환국 (1694) 숙종이 중전 장씨의 처신에 실망하고 민씨의 폐출을 후회하였다. 어느날 밤 숙종이 한 나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자신이 모시던 분이 폐비가 되어 궁 밖으로 내쳐졌는데 오늘이 그분의 생일이라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고하였고 그날 숙종의 성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그 후궁이 연잉군을 출산한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인데 숙종이 숙빈을 가까이 하였다. 노론과 소론이 민씨의 복위를 계획하고 숙빈을 통해 중전 장씨의 투기를 고하게 하였다. 남인 세력의 독재가 심해지자 숙종이 서인들을 불려들여 남인들을 숙청하였다. 이의징이 서인 세력을 제거하여 폐비복위 관련자를 하옥시키자 숙종이 거꾸로 무고한 폐비를 모함한다 하여 처형시켰다. 중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고 인현왕후가 복위하여 환궁하였으나 8년만에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왕후가 최 숙빈이 준 게장을 맛있게 먹자 나인이 장희빈의 사주로 꿀을 넣은 게장을 최숙빈이 가져와 먹고 쓰러졌다. 남인이 퇴출되어 다시 재기를 하지 못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사망하고 희빈 장씨의 저주가 발각되어 희빈이 사사되었고 소론이 숙청되었다.
장희빈 본명은 장옥정. 장옥정의 모친은 노비였고 부친 장형은 사역원의 역관이었다. 11세에 부친 사후 역관인 숙부 장현에 의탁하였고 장현과 남인이 가까워 궁궐 나인으로 입궐하였다. 숙종의 눈에 띄었으나 숙종의 생모 명성왕후가 장옥정이 남인인 장현의 조카임을 알고 궁 밖으로 쫓아냈다. 명성왕후 사후에 인현왕후가 권하여 숙종이 다시 궁으로 불러 숙원(종4품)에서 소의(정2품)가 되었다. 소의가 원자를 출산하자 희빈(정1품)으로 삼았다. 인현왕후 사후에 희빈이 신당을 설치하고 통명전 곳곳에 인형, 새, 쥐를 묻어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이 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나 받아 들이지 않자 사사되었는데 사약을 받은 희빈이 세자를 만나게 해달라 사정하여 세자를 보게 하였다. 세자를 보자 희빈이 세자의 급소를 잡아 당겨 세자가 기절하였다. 이때에 세자는 급소를 다쳐 걸음걸이가 내시처럼 되었다고 한다. 숙종이 이후에 후궁이 왕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여 조선 후기에 후궁이 아들을 낳아도 왕비가 될 수 없었다. 영조 때 정성왕후 사후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를 왕비로 삼지 않고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왕권은 왕비의 적자가 아닌영빈 이씨의 아들 사도세자의 계열인 정조, 순조, 현종, 철종, 고종, 순종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