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나인·항아·홍수)와 관련하여 우리의 인식 속에는 일종의 ‘환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궁녀들이 비교적 괜찮은 신분에서 배출되었을 것이라는 관념이다. 바꿔 말하면, 신분이 미천하면 궁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궁녀가 되면 임금이 사는 궁궐에서 기거할 뿐만 아니라 잘만 하면 임금의 눈에 들어 후궁이나 왕후가 될 수도 있었으니, 미천한 출신의 여인이 궁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숙빈 최씨)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가 천민 출신의 동이가 궁녀가 된 사실을 두고 무슨 대단한 일이나 발생한 듯이 취급한 것도 궁녀에 대한 그 같은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극은 물론이요 동화나 소설에 나오는 궁녀들 역시 일반인보다 높은 신분에서 배출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런 인식은 역사적 실제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녀는 ‘천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신분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부잣집에 노비가 있고 관청에 노비가 있었듯이, 왕궁에도 궁녀라는 노비가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의 사료를 토대로 궁녀의 신분을 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천것은 궁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조장된 데에는 학술논문의 오류도 한몫을 했다. 궁중생활사 연구자인 김용숙(2003년 작고)은 1964년에 발표한 ‘이조 후기 나인생활 연구’라는 논문에서 “(궁녀는)양반과 평민의 중간 위치로 중인계급에서 뽑는다”라고 하여 궁녀의 신분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김용숙은 1987년에 발표한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라는 저서에서는 위의 주장을 정반대로 수정했다. 이 책에서 그는 “궁녀는 원래 비종(婢種, 여자 노비)에서 뽑는 것이었지만, 왕왕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예도 있었던 것 같다”며 앞의 견해를 정반대로 뒤집었다.
‘궁녀는 중인계급에서 선발됐다’던 김용숙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내용이 조선시대의 법전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65년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 권5 ‘형전’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본문] 궁녀는 오로지 각 관청의 하전(下典, 노비)에서만 선발한다. [주석] 내비(內婢)는 충분히 충원할 수 있으나, 사비(寺婢)는 (국왕의) 특명 없이는 선발할 수 없다. 양가(良家)의 딸은 일체 거론할 수 없다. 양인·사비를 추천하거나 들여보낸 자는 장(杖) 60대, 도(徒) 1년 형에 처한다. 종친부·의정부의 시녀는 시녀·별감으로 취하지 않는다.”
위의 규정에 따르면, 궁녀는 관청 소속의 노비 즉 공노비 중에서만 선발하도록 했다. 공노비 중에서도 사비(寺婢) 즉 중앙관청 소 속의 노비인 경우에는 국왕의 특명을 거쳐 궁녀로 선발하고, 내비 즉 내수사(왕실의 재정부서)나 궁방(왕족의 집) 소속의 노비는 그런 제약 없이 궁녀로 선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종친부·의정부 소속의 노비는 궁녀로 선발할 수 없도록 했다.
또 위의 규정에서는 양인 즉 일반인은 궁녀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양인이 궁녀가 되는 일은 형사처벌의 대상이었다. 양인을 궁녀로 만드는 자는 장 60대 및 도 1년 형에 처한다고 했다. 장(杖)은 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이고, 도(徒)는 강제노역을 시키는 형벌이었다.
[대전회통]은 1865년에 편찬되었지만, 위의 규정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것이었다.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왕명이 누적되다가, 이것이 1543~1698년의 왕명 모음집인 [수교집록]에 수록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746년 법전인 [속대전]과 1865년 법전인 [대전회통] 등에 명문화된 것이다.
![궁녀의 모습: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소재한 화성행궁 안에 있는 밀랍인형(좌)<br>[대전회통]권5 형전 규정: ’궁녀는 오로지 각 관청의 하전에서만 선발한다’ (우)](http://www.k-heritage.tv/upload/DataFolder/catel3/100803_kjs_img3.gif)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라는 규정이 조선시대 내내 유효했다는 사실은 현종 5년(1664) 10월 24일자 [현종실록] 에서도 확인된다. “조종(祖宗, 앞선 임금들)의 옛 제도는 다만 각 관청의 하전(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해서 후궁의 인원을 보충할 뿐”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하는 것은 ‘조종의 옛 제도’에 해당하는 오랜 제도였다. 다시 말해, 조선 전기부터 시행되던 제도였다.
위와 같은 법률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런 점을 본다면, 궁녀를 ‘천것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신분’으로 설정하는 TV 사극이나 대중문학의 내용이 역사적 실제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반인이 궁녀가 된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 판서 김원호의 딸을 궁인으로 삼았다”는 태조 6년(1397) 3월 5일자 <태조실록>의 기록처럼 상류층 여식이 궁녀가 된 사례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국가 초기의 예외적 현상에 불과했다. 시스템이 완비된 후에도 일반인이 궁녀가 되는 사례는 여전히 있었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고 불법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공노비 중에서만 궁녀를 선발했을까? 궁녀가 되면 경우에 따라 왕의 여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런 기회를 ‘천것’들에게만 부여한 것일까? 제2편에서 그 의문을 풀어보기로 하자.

글 사진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논문심사 중).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역사 관련 저서로는 [철의 제국 가야], [최숙빈], [한국사 인물통찰], [조선사 클리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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