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대한제국

[옮긴글] 조선 태종(이방원) 이야기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1.20|조회수143 목록 댓글 0


그는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정몽주를 비롯한 구세력(고려말의 권신들) 제거에 큰 역할을 하여 조선을 개국하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정몽주를 포섭하기 위하여 의중을 물어 본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답가 시조인 '단심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천년만년 살아보세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답가를 이방원에게 보낸 직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절개를 목숨과 맞바꾸게 된다.

 

 

훗날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아버지 이성계가 중풍으로 쓰러진 기회(?)를 틈타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늙은 이성계의 사리판단을 새 왕비 강씨와 최측근인 정도전이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 유명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사실상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이 일로 아버지 이성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이성계는 스스로 왕을 양위하고 (태)상왕의 신분으로 멀리 함흥으로 이처하여 오래도록 태상왕과 왕이 대립(?)하는 전대미문의 역사가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은 비록 왕의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아버지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집권 초기에 아버지 이성계와의 불편한 관계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방원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의 관계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리력으로 아버지를 모셔올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차사들을 보내어 간곡히 귀경(歸京)을 요청하였지만,

조선 최고의 신궁(神弓)으로 명성을 날렸던 이성계는 차사들이 찾아오는 족족이 활을 쏴 죽이고 만다.

그리하여 생겨 난 유명한 속담이 '함흥차사'이다.

 

즉위 후, 의정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도 설치하였다.


 

태종 이방원, 그는 조선 제3대 임금(1400∼1418)이시다.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으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韓氏)이다.

비(妃)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한때는 야은 길재(吉再)와 학문을 토론하였고, 원천석(元天錫)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8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1388년에는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 수도인 난징[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고, 정도전(鄭道傳) 등과 도모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게 하였다.

1392년(태조 1년), 조선이 개국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으나,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의 강력한 견제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조선을 건국하는데 1등 공신이었던 정도전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훗날 이방원은 왕자의 난 때 급기야는 정도전을 죽이게 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정치와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은 의도적으로 이방원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하였는데, 이는 그의 야욕과 카리스마가 지나치게 강하여 그가 임금이 될 경우, 정도전이 꿈 꾸는 이상국가인 신권주의(臣權主義)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이방원은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게 된다.

 

훗날, 태조가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군사를 일으켜, 1398년(태조 7년)에 조선건국의 최고

핵심 인물이던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새 왕비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방번()을 멀리 귀양 보내기로 하고, 가는 도중에 부하를 시켜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정치적으로 계산 된 행위로 정종 임금은 권력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다.

 

자신이 곧바로 왕에 등극할 경우,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으므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한시적으로 양보한 것이었다.

1400년(정종 2년) 넷째 형인 방간()이 박포()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 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에 즉위하자 개국공신들이 지니고 있던 사병(私兵)들을 모두 혁파()하고, 1402년(태종 2년) 신권(臣權)의 근간인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는 사간원()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는 사평부()로 개칭하였다.

삼군도총제부()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에는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에서 분장()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모든 일련의 조치들은 당연히(?) 왕권의 강화를 위한 절차였으며, 이러한 제안들은 이방원의 최측근의 한 사람인 하륜(河崙)에게서 대부분 나왔다.

 

한편으로는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들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관직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는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 파아손()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여진인)들을 회유하여 국경과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를 세워 즉위 3년에는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는 호포()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조치하였다.


1402년(태종 2년)에는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그 취지는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역모()를 방지하는 최고의 사정(司政) 권력기관이었다.

 

1404년에는 또 다른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송도(都:지금의 개성)에서 한성(城: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이 또한 태종 이방원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비록 상왕의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의금부를 비롯한 군권(軍權)을 여전히 장악하여 아들 세종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가차없이 척결하였다.

그 결과 세종대에 이르러 왕권의 기틀이 공고하게 다져지고 정치*문화, 사회전반에 걸쳐 우리 역사에 두 번 다시 없을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악역(?)을 담당한 결과라고나 할까.

 

[출처] 네이버블로그 'blog.naver.com/dominggo66'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