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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옮긴글]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1.26|조회수339 목록 댓글 0

정도전과 정몽주 그리고 이성계는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를 만들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달랐기에 안타깝게도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정몽주는 조선 개국전, 정도전은 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에 의해 제거됩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이색 밑에서 배우고 자란 친한 친구였습니다.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습니다.

 

 


단심가를 적은 정몽주 - 신진사대부의 유생이자 이색의 제자

 

문무를 고루 겸비한 태종 이방원 - 이성계의 아들로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평생 벗으로 가기로 도원결의 하였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에게 맞아 죽으면서  "방원이한테 전하거라 . 내가 고려의 충신으로 죽게 해주어서 고맙다고..."라는 가슴뭉클한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선죽교 - 정몽주가 이방원의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 원래 선지교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다. 태조 왕건이 송도(지금의 개성시)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이방원도 정몽주의 마음을 돌려 보기 위해서 하여가를 지어 보냅니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를 본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자신의 마음이 변함이 없다는 단심가를 지어 보내어 절대로 역성혁명에 가담할 수 없다는 뜻을 보냅니다.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만일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고려왕조를 굳건히 지켰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땟을까요? 고려가 천년왕조를 유지해가며 명나라에 사대주의를 하지 않고  중국앞에 굴복하지 않은 당당한 자주외교를 했을거라고 추측합니다. 또한 왜국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자국을 보호하며 왕권강화를 유지했을거라 판단합니다.
 
하지만 정치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피바람이 불고 변하는거라고 하죠. 권력이란게 바람앞에선 등불이라고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기위해선 당여들의 권세가 필요하긴 합니다. 고려내에 권문세족 일파는 없어졌으나 명나라에 사대주의를 하는 강건파와 대립하여 지속적인 마찰은 일어났을거 같내요. 

결국 조선이나 고려나 다름없이 정치 판도는 비슷했을거에요. 명나라에 사대주의를 하냐 안하냐, 중국에 자주외교나 굴복외교나 이 차이임.


<출처> 네이버카페 정사모(cafe.naver.com/zheng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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