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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옮긴글] 정몽주는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1.27|조회수122 목록 댓글 0


공민왕이 1374년 재위 23년 만에 시해 당했을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37세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조정은 이인임 등 친원 수구파가 장악하였다.


이에 앞서 정몽주는 공민왕 21년(1372년) 임자년 3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명나라가 서촉(西蜀) 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으로 당시 명나라의 수도였던 금릉(金陵), 오늘의 남경(南京)에 다녀왔던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서촉을 평정했다는 것은 옛날 촉나라 땅이었던 오늘의 사천성 성도(成都)를 중심으로 한 하(夏)나라를 정벌하여 복속시킨 일을 가리킨다. 그곳에 원나라 말기에 명옥진(明玉振)이 하나라를 세웠는데 그의 아들 명승(明昇)이 나라를 들어 명에 항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축하하기 위해 고려에서 보낸 사절단이 하평촉사(賀平蜀使)였다.


정몽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외국행이었다. 그런데 그 사행 길에서 정몽주는 또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체험했다. 일국의 사신이라고 해서 전용 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고려의 형편이 그처럼 어려웠다. 정몽주 일행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碧瀾渡)에서 중국으로 가는 상선을 얻어 타고 갔다.


벽란도에서 서해로 나가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요동반도를 거치고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 등주에서 육지에 상륙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육로로 말을 타고 내주 ․ 청주 ․ 제주 ․ 양주를 거쳐 금릉으로 남하하는 길이었다. 양주에서는 다시 배를 타고 소주를 거쳐 양자강을 따라 서쪽으로 들어가 개경을 떠난 지 석 달 만에 비로소 금릉에 이르렀다. 개경에서 금릉까지는 8천 리의 장도였다.


명 태조, 재위 시에는 연호를 따라 홍무제(洪武帝)라고 불렸던 주원장은 만리타국에서 하평촉사로 찾아온 고려 사신단을 반갑게 맞았다. 축하의 말을 듣고, 또 고려의 유학생들을 받아들여달라는 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주원장이 그때만큼은 기분이 매우 좋았던 덕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원장은 여기에 더해서 먼 길에 빈번한 사신행은 양국이 피차 부담스러운 일이니 그저 3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고, 또 공물도 너무 무리할 것 없이 토산물 얼마를 가져오면 된다는 유례없는 호의를 베풀었다. 고려 사신단은 무거운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 길에 올랐다. 다시 양자강 수로를 타고 하구로 내려간 다음, 양주에서 상선을 타고 산동반도로 올라갔다.


산동반도 등주에서 다시 고려로 가는 배를 탔다. 항해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하늘 멀리서부터 시커멓게 구름이 몰려오고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왔다. 배는 거센 폭풍우에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되어 이리저리 마구 휩쓸려 떠돌다가 그만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몽주는 외딴 무인도에서 열하루 동안이나 버텼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바위섬에는 샘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섬을 돌아다니며 나무 열매를 따먹고 바닷가에서는 작은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가까스로 굶어죽는 것을 면했다. 12일째 되는 날 마침내 지나가는 배에 구조될 수 있었다. 그 중국 어선에 구조되어 정몽주는 다시 남경으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명 조정의 칙서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공민왕 22년(1373년) 계축년 7월 13일에야 가까스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몽주의 두 번째 사신행은 우왕 3년(1377년) 9월 일본에 사신으로 간 것이었다. 그보다 앞선 우왕 1년에 왜구의 잦은 침노로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자 수상 이인임(李仁任)은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시대였다. 무로마치막부의 실권자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나홍유를 고려의 간자(間者), 즉 밀정으로 몰아서 옥에 가두어버렸다. 나홍유는 그렇게 갇혀 있다가 마침 일본에 머물고 있던 고려 승려 양유(良柔)의 주선으로 가까스로 풀려나 돌아올 수 있었다.


왜구의 노략질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이제 전라도와 충청도 해안은 물론 양광도(경기도)의 해안도 수시로 침노 당했다. 우왕 2년에는 남해안의 창원 ․ 진해 ․ 울산, 서해안의 공주 ․ 부여까지 유린당했다. 우왕 3년이 되어 조정에서는 안길상(安吉祥)을 다시 일본에 보냈지만 그는 그만 일본에 가자마자 병들어 죽고 말았다.


일본 사신행이 그렇게 무서울 때였다. 그럴 때에 친원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정몽주로 하여금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자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정몽주는 이인임의 친원반명 정책에 맞서서 친명반원 정책을 주장하다가 귀양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일본에 가서 죽든지 살든지 골치 아픈 정몽주를 보내자 했던 것이다.


김구용(金九容)과 정도전(鄭道傳) 등 성균관의 동료들이 모두 만류했다. 이인임 일파의 농간에 걸려드는 것이라면서 굳이 말렸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들 말뜻은 내 잘 알겠네. 하지만 나라를 생각해야 하네.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가? 왜구들 때문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생각해야만 하네! 이 나라는 결코 이인임 같은 친원파들만의 나라가 아닐세!”


왜구의 침노는 멀리 신라 초기부터 있어온 일이지만, 고려가 왜구의 노략질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당한 것은 여원(麗元) 연합군의 일본 원정 실패 이후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원과의 관계가 악화함에 따라 군사력이 북방 지역에 집중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군사적 방비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탓도 컸다.


고려에 대한 왜구의 침노는 집요하고 잔악했다. 왜구는 주로 한반도 남해와 서해안, 특히 세미(稅米)가 집결되는 조운(漕運) 중심지와 조운선 자체 등을 끈질기게 공략했다. 조운의 집결지인 양광도의 강화도와 교동도, 충청도의 아산, 전라도의 순천과 나주, 경상도의 합포와 울산 등지는 왜구의 침노가 특히 빈번했다.


공민왕 9년(1360년)에 왜구는 강화도를 습격하여 300여 명을 살해하고 미곡 4만 석을 탈취했다. 또 공민왕 23년(1374년)에는 350척의 어마어마한 왜구 선단이 합포(마산) 일대에 몰려와 고려군 5천여 명을 죽이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우왕 2년(1376년)에 양광 ․ 전라 ․ 경상 3도의 조운선 운송을 폐지하고 세미를 육로를 통해 운반토록 했다. 그러자 왜구는 이번에는 내륙 지역으로 침략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륙으로 통하는 연안 지역과, 육로와 수로의 거점 지역의 피해가 커졌다. 고려가 정책을 바꾸자 왜구도 침략 형태를 바꾸었던 것이다.


 고려는 조운(漕運)을 통해 세수(稅收) 대부분을 운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들이 습격하여 약탈하기에 만만했다. 더욱이 당시 고려의 남부 지방에는 대규모 왜구를 막아낼 만한 상비 군사력이 없었다. 따라서 불시에 나타나 조창이나 조운선을 습격하는 왜구들을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 조정은 왜구를 막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공민왕 16년(1367년)에는 김룡(金龍)을 사신으로 교토로 보내 아시카가막부에 왜구의 침략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막부는 김룡 등을 교토 천룡사(天龍寺)에 머물게 하고 승려 묘하(妙何)를 시켜 고려에 보낼 답서를 쓰게 했다. 일본은 그 답서에서 이르기를, ‘왜구는 규슈 등지의 해적들이 벌이는 행위로서 앞으로 금지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막부는 김룡 등이 귀국할 때 승려 범탕(梵盪) 등을 동행시켜 고려에 답서를 전달했다. 이렇게 해서 왜구 문제를 계기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고려와 일본의 공식 관계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된 1374년을 전후하여 왜구는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왕 1년에는 나홍유를 일본에 보냈고, 이어서 안길상에 이어 정몽주를 파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벽란도에서 배를 타고 서해로 나가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합포에서 다시 큰 배로 갈아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몽주는 쓰시마와 이키시마를 거쳐 규슈로 건너갔다. 당시 규슈의 지방관, 즉 탄다이(探題)는 이마카와 료슌(今川了俊)이란 무장이었다. 이마카와는 무장이지만 단순무식한 칼잡이는 아니었다. 글공부도 해서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또 그는 고려에서 사신으로 오는 정몽주가 중국의 원나라와 명나라에도 알려질 정도로 학문이 깊고 글도 잘 짓고 인품도 훌륭한 인물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정몽주의 접대에 신중을 기했다. 이마카와 료순과 첫 인사를 나누고 마주앉은 정몽주는 입을 열었다.


“귀국과 우리 고려는 오랜 이웃입니다. 그동안 서로 좋은 일도 있었고, 안 좋은 일도 더러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 두 나라는 싫든 좋든 떨어질 수 없는 이웃입니다. 이웃이란 본래 화목하게 지내야 하는 법입니다. 어느 한쪽이 힘이 세다고 해서 다른 한쪽을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 두 나라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귀국의 무사들이 수시로 바다를 건너와 무력으로 우리 땅을 짓밟고, 약탈을 하고, 사람들을 잡아가고는 하지 않습니까? 물론 전에 우리나라가 원나라와 합세하여 바다를 건너 귀국 가까이 온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일은 우리 고려의 진심이 아니란 사실을 귀하도 잘 알 것입니다. 그 당시는 우리 고려가 원나라의 신하 국이었으므로 원나라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정몽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마카와 료순과 그의 수하 막료들은 통사(通士)가 전하는 정몽주의 말을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정몽주는 다시 말허리를 이었다.


“내 이제부터 하는 말을 귀하는 잘 들어주기 바라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있지요?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커다란 이익을 놓친다는 말이 아니오? 내가 보기에 근래 귀국의 일부 무사들의 행위가 바로 소탐대실 같소이다. 식량이든 가축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서로 정당한 거래로 교역을 하면 이웃 간에 우호도 쌓고 이익도 누리고 좀 좋겠소? 그런데 우리 농민들이 농사짓고, 우리 어민들이 고기 잡을 시간도 주지 않고 걸핏하면 바다를 건너와 방해를 해서야 되겠소? 내 비록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번에 귀국을 방문하여 이렇게 이웃 간의 정리에 대하여 논하게 되어 매우 뜻 깊게 생각하오.”


이마카와 료순은 속으로 감탄했다. 고려의 사신이 전처럼 왜구의 노략질에 관해 입에 침을 튀기며 항의부터 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해적이니 약탈이니 뭐니 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이 그저 이웃 간의 도리를 들어 깨우쳐주니 참으로 뜻밖이었던 것이다.


첫 회담이 끝나자 이마카와 료순은 자신의 심복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오늘 참으로 훌륭한 인물을 만나보았다! 고려 사신 정몽주는 성인(聖人) 같은 분이다!”


이마카와 료순은 정몽주에게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왜구들의 고려 노략질을 근절하겠노라고 거듭 약속했다. 문제는 이마카와 료순의 힘이 미치는 그 범위에 있었다.


고려 사신 정몽주의 명성은 이내 주변에 널리 퍼져나갔다. 인품이 출중하고 학식과 덕망이 깊고 글 잘 하는 고려의 학자가 사신으로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몽주의 숙소에는 규슈 지역 문인과 승려, 그리고 무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몽주로부터 시문(詩文)을 받아든 일본 승려를 비롯하여 식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정몽주를 가마에 태우고는 규슈의 여러 명승절경들을 안내하며 즐겼다. 또한 그들은 정몽주에게 인사하기가 무섭게 시문을 청했다. 그러면서 가보로 삼겠다고 했다.


정몽주가 일본을 떠난 것은 한 해가 지난 우왕 4년(1378년) 무오년 7월이었다. 그의 나이 벌써 귀밑머리 희끗희끗한 마흔 두 살이 되었다. 그는 귀국길에 그 동안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던 윤명(尹明)과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명의 동포를 데리고 돌아왔다. 정몽주의 요구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홍장로(洪長老)란 고승의 힘도 컸다.


그런데 정몽주가 돌아와 보니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친명반원책을 버리고 다시 친원반명책으로 돌아서서 북원의 연호 선광(宣光)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이색(李穡)과 이성계(李成桂) 등과 힘을 합쳐 조정에 압력을 넣어 그해 9월부터는 다시 명의 연호 홍무(洪武)를 쓰게 만들었다. 지금 같으면 원의 연호든 명의 연호든 사대주의는 다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로서는 국운이 걸린 중대 사안이었다.


정몽주는 일본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우산기상시 보문각제학 지제교로 승진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1년간의 고생도 물거품처럼 부서져 왜국의 노략질이 그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마카와 료순은 자기 나름대로 하노라고 애썼겠지만 자신의 관할이 아닌 쓰시마와 이키 등 다른 지역의 왜구들까지 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는 고려시대를 통틀어 탁월한 학자요 문인이요 정치가이면서 출중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출처] 平海居士 黃源甲(http://blog.joins.com/hwang450915)  By 평해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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